제232화. 재각성 전문학원 (3)
일주일 후, 김도윤의 아파트.
띠리리링.
번쩍거리는 전화기 위엔 ‘이수재 원장님’이라는 글씨가 찍혀 있었다.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던 김도윤은 말없이 휴대폰 전원을 껐다.
‘아아.’
먼 하늘을 바라보던 김도윤의 눈동자가 까맣게 물들어갔다.
‘내 짝사랑도 끝이구나.’
쫄쫄이 훈련 이후, 최지수는 김도윤을 외면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거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노골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입은 김도윤은 절망했고, 그날 이후 더 이상 학원장 이수재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띠리리리링.
또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김도윤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휴대폰을 아예 꺼버렸다.
‘지수 씨…….’
최지수의 당황한 눈빛을 떠올린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탕탕탕탕!
그런데 이번엔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김도윤. 안에 있는 거 알아.”
들려오는 목소리. 바로 학원장 이수재의 목소리였다.
김도윤이 보름째 연락을 받지 않자, 수강등록증에 적힌 주소로 아예 찾아온 것이다.
“문 좀 열어봐.”
탕탕탕탕!
계속 현관문을 두들기자 참다못한 김도윤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집까지 왜 찾아오신 거예요!”
“왜냐니? 훈련을 시작했으니 끝내야 할 거 아냐.”
“필요 없어요.”
김도윤이 고개를 젓자 이수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훈련을 수포로 돌릴 거냐?”
“네! 필요 없어요, 다!”
김도윤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원장님 때문에 지수 씨에게 변태로 찍혔어요.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수재가 눈을 껌뻑이자 김도윤은 지금까지 자신의 사정을 모두 말해주었다.
재각성을 하고 싶은 이유.
그것은 주민센터의 일이 고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짝사랑하는 동료에게 조금 더 당당하게 고백을 하기 위해서라는 걸.
“미안하다!”
이수재는 김도윤의 어깨를 붙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번화가 훈련은 하지 않았을 거다.”
번화가의 훈련 당시, 이수재는 울며 뛰쳐나간 김도윤에게 모든 사정을 들었다.
“하지만 이럴수록 넌 빨리 재각성을 해야 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 된 이상, 재각성을 해서 멋진 각성자가 되는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됐어요. 이젠 그만할래요.”
김도윤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학원비는 안 돌려주셔도 돼요. 그러니까 그냥 가세요.”
“내가 학원비 때문에 온 거 같냐?”
이수재는 다시 한번 김도윤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하지만…….”
“고민은 나중에 해! 우선 훈련부터 끝내. 후회 같은 건 나중에 하란 말야!”
처음엔 어떻게든 돈을 뜯으려 하는 학원장 같았는데.
김도윤의 예상과 달리 이수재는 열정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 같았다.
“저는…….”
잠시 고민하던 김도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재각성도 좋다지만 더 이상 그런 훈련은 못 하겠어요.”
“걱정 마. 이렇게 된 이상 최단기간 재각성 할 수 있는 속성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속성… 방법? 그런 것도 있나요?”
“그래. 엄청나게 빨리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어. 특별히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잠시 혹한 표정을 짓던 김도윤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설마 더 괴상하고 부끄러운 훈련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냐.”
이수재가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열정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훈련이야.”
실드경계지역.
거대한 실드 발생 장치가 세워진 이곳은 유령도시처럼 텅 비어 있다.
한때는 많은 상점들이 들어섰고, 사람들도 많이 살던 곳이다.
하지만 해마다 늘어가는 히든몬스터들의 등장과 위협에 결국 사람들은 모두 떠나간 상태였다.
“후우. 후우.”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림자가 실드경계지역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언덕을 오른 그림자는 마침내 실드 발생기가 보이는 경계 끝자락까지 도착했다.
“하아.”
실드가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김도윤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속성 훈련.
그는 이수재가 최단기간 재각성을 할 수 있다는 속성 훈련을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10킬로 런닝은 모두 마쳤고.”
속성 훈련의 첫째.
그것은 바로 10킬로 런닝을 실드경계지역에서 하는 것이었다.
“결국 범법자가 되는 건가.”
실드 너머 보이는 공간을 바라보던 김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속성 훈련의 두 번째.
그것은 바로 실드를 몰래 넘고 들어가 각성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이었다.
“이거… 정말 되는 거 맞아.”
그야말로 황당한 훈련이었다.
실드경계지역을 넘어 던전으로 들어가는 건 범죄다.
만약 협회의 요원에게 걸리면 최소 각성자 자격 정지. 만약 유물을 들고 나왔다간 각성자 등록 취소 처벌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냥 세이프던전 입구에서 나오는 각성자들과 하면 되잖아요?
당시 김도윤이 이렇게 묻자 이수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반드시 실드경계지역에 머물고 있는 각성자랑 악수해야 해. 그게 내가 알아낸 법칙이야!
이수재의 말을 떠올린 김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최소 다섯 명과 하라고 했지.”
심지어 하이파이브는 최소 다섯 명의 각성자와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유를 묻자 하이파이브란 단어 중에 파이브(five)가 들어 있기 때문이란다.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들에는 모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결코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수재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 김도윤은 반박하지 못했다.
“어차피 멀쩡한 훈련 따윈 없었잖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이수재의 훈련법은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꾹 참고 계속 훈련을 했던 것은, 의외로 쏠쏠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느린 동작으로 하는 원펀 훈련법은 상당한 근력 단련이 되었다.
게다 쫄쫄이 훈련 덕택에 어지간한 쪽팔림에는 얼굴조차 붉히지 않게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훈련도 마치고 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긴 뭐, 히든몬스터 출현 방법도 이렇게 엉뚱한 거긴 하지.”
고개를 끄덕인 김도윤은 실드 발생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간다앗!”
용기를 내서 마구 달려가고 있을 무렵,
“어라?”
실드 발생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빌라에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특수대응팀의 팀장, 초홍이었다.
‘사람이 산다고?’
특수대응팀이 이 빌라에 산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김도윤은 달리기를 멈추었다.
“아, 안녕하세요?”
김도윤이 먼저 어색한 인사를 건네자, 초홍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곳에서 사시는 거예요?”
“네에. 저희 팀이 던전 방위팀에서 하는 업무 일부를 돕고 있거든요.”
‘던전 방위팀?’
그제서야 김도윤은 초홍이 입고 있는 셔츠에 협회 마크가 찍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협회 각성자잖아!’
그러고 보니 빌라 옆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트럭.
저것은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초고가의 몬스터 트럭 M903이 아닌가?
김도윤이 안색이 창백해지자, 초홍이 눈을 깜빡였다.
“괜찮으세요?”
“아, 네에. 조금 런닝을 오래 했더니.”
“아, 저쪽 주택단지에서 사시나 봐요.”
“네. 여기 말고는 달릴 데가 없어서. 하하.”
‘큰일 났네.’
김도윤은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이곳에 협회 각성자들이 살고 있다니. 그럼 대체 어떻게 던전 안으로 몰래 들어가 하이파이브를 한단 말인가?
“저, 그럼 수고하세요.”
초홍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김도윤도 고갤 숙였다.
“아, 네에.”
주차장으로 가는 초홍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도윤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졌다.
‘실드경계지역에 머무는 각성자잖아?’
“저, 잠시만요.”
“네?”
차에 올라타려던 초홍에게 달려간 김도윤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럼 저 빌라엔 협회 각성자 분들만 계시는 거죠?”
“네에.”
“아아, 잘됐네요.”
“네?”
“저 죄송한데요.”
초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김도윤이 해맑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 한 번만 해주시겠어요?”
며칠 후 일요일.
특수대응팀의 아침 식사 시간.
팀원들은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고, 초홍은 연신 국과 반찬을 퍼나르고 있었다.
“저, 팀장님.”
그때 멍하니 앉아 있던 유은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이상한 사람. 더 이상 못 오게 하면 안 돼요?”
“이상한 사람?”
“왜 있잖아요. 매일같이 찾아와서 하이파이브 하고 가는 아저씨요. 일명 하이파이브 맨.”
“아아.”
피식 웃은 초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해줘.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유은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매일같이 찾아와 밑도 끝도 없이 하이파이브를 해달라는 사람이 이상하지 않다니?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이상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야.”
유은호의 눈빛을 바라보던 초홍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순응인으로 살고 있는.”
“순응인으로 살고 있는 공무원이라고요?”
“으응, 재각성 학원에 다닌다나 봐.”
초홍은 처음 김도윤이 하이파이브를 요청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학원에서 말하길, 실드 부근에 있는 각성자 다섯 명이랑 하이파이브를 하면 스킬 재각성이 일어난다고 그랬대. 폭발 계열로.”
“컥.”
유은호는 사레들린 목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말했다.
“그게 말이 돼요?”
“안 되지. 아마 사이비 학원에 걸린 것 같은데. 너무 절실하니까 못 말리겠더라고.”
커다란 그릇에 담긴 제육볶음을 내려놓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실드를 넘어서 던전에 갈 생각이었대. 각성자랑 하이파이브 하려고.”
“그랬군요.”
줄곧 묵묵히 듣고 있던 신채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일 와서 거머리처럼 조르길래 해주긴 했는데, 그녀 역시 엄청나게 찜찜했던 참이었다.
“가만? 다섯 명이요?”
그때 한만재가 눈을 껌뻑였다.
“저희 네 명이잖아요. 한 명은 어디서 채워요? 설마 그러고선 몰래 실드에 들어가는 건…….”
초홍은 피식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은 천마의 옥탑방이 있는 방향이었다.
“천마 씨에게 하이파이브를 요청했단 말입니까?”
한만재가 입을 쩍 벌리자 초홍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네.”
“그래서, 해줬어요?”
신채영의 질문에 초홍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해줬는지는 모르겠는데… 볼 때마다 엄청나게 조르고 있었어.”
그날 저녁, 천마의 옥탑방
“꺼져라.”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천마의 눈동자에선 혈염광휘가 쏟아져 나왔다.
“한 번 더 본좌의 휴식을 방해하면 분근착골형을 맛보게 해주겠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한쪽 손만 마주쳐 주시면 됩니다.”
“네놈 따위가 감히 본좌의 손을 맞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천마의 냉소에도 김도윤은 바닥에 엎드릴 듯 고개를 숙인 채 굽신거렸다.
“한 번만 해주시면 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놈!”
쉴 새 없이 사정하는 김도윤의 태도에 결국 천마는 벼락과도 같은 노성을 내질렀다.
“분명 본좌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매일 바퀴벌레처럼 기어 와서 귀찮게 구느냔 말이다!”
귀청이 떨어진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도 김도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게, 하루에 한 번씩 꼭 해야 해서요.”
“하루에 한 번?”
“그게 말이죠…….”
사정을 모두 이야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재각성 학원이든, 짝사랑하는 동료에게 고백을 하든 말든 천마가 알 바가 아니었으니까.
“좀 부탁드립니다. 안 그러면 실드를 넘어서는 범법자가 돼야…….”
김도윤의 외침은 이어지지 않았다.
쾅 소리와 함께 다시 천마가 현관문을 닫은 것이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내일은 꼭 부탁드립니다!”
옥탑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까지도 김도윤은 크게 외쳤다.
창틀에 올라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무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천마 님. 그냥 한번 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싫다.”
[그래도 제법 근성이 있는 인물이 아닙니까? 저토록 무서워하면서도 매일 찾아오는 것이 말입니다.]
천마는 약자를 경멸하지만 꾸준한 노력을 하거나 근성이 있는 자는 예외로 두었다.
그 점을 알고 있는 무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랑이를 할 시간에 그냥 손바닥 한번 부딪쳐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손을 맞댄다는 건, 대등한 무인끼리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저 사람은 그저 학원에서 가르쳐 준 미신을 신봉하는 것뿐입니다. 천마 님과 대등하려는 생각도 없고요.]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신이든 뭐든 관계없다. 본좌의 손과 맞대고 싶으면, 그만한 무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천마의 단호한 말에 무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일주일 후.
일찌감치 엄마손 백반에서 저녁을 먹고 온 천마가 빠르게 TV 앞에 앉았다.
이 시간에는 그가 좋아하는 세기의 미스터리 프로를 하는 시간이다.
-세기의 미스터리터리터리…….
성우의 음산한 목소리와 동시에 이야기가 시작될 무렵,
-속보입니다. 실드경계지역 근처에서 히든몬스터, 혈무(血霧)가 등장하였습니다. 군집형 몬스터인 이 혈무는 추정 위험도…….
갑자기 시작된 속보로 인해, 세기의 미스터리 프로는 중단되었다.
TV를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게 무슨 대단한 소식이라고 매번 화면을 끊는 거냐!”
[다른 방송을 보다가 대피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으음.”
[늘 하시는 대로 천마 님께서 빨리 처리하시면 방송이 정상 송출될 겁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천마 님께서 나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천마의 물음에 방송을 바라보던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혈무는 형체가 없는 군집형 몬스터이기 때문에 처리하기 까다로운 히든몬스터 중 하나입니다.]
“형체가 없다고?”
천마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군집형 몬스터는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마리의 개체의 의식과 생명이 하나로 이어진 형태다.
즉 하나의 개체만 살아 있어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기에, 무조건 한 번에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거기다 형체가 없다니?
[정확히 말해선 붉은 안개 형태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혈무라는 이름이 붙여졌죠.]
천마의 눈동자에선 전에 없던 호기심의 빛이 어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류의 몬스터다.
대체 어떤 식의 안개로 변하는지, 인간의 몸엔 어떻게 흡수가 되는지, 또 어떠한 무학이 통용되는지 천마는 호기심이 일었다.
[혈무는 안개 형태의 모습 때문에 개체의 숫자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에 스며들어 터뜨리는 전법을 사용하죠. 이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각성자라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안개로 변한 거라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천마는 피식 웃었다.
아예 형체가 없다면 모를까, ‘안개’라는 물질로 변했다면 어떻게든 처리할 방법은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실 협회에선 혈무와 같은 몬스터를 처리하는 ‘진공 분쇄기’라는 무기를 개발해 놓았습니다.]
“진공 분쇄기?”
[그렇습니다. 기체 상태의 몬스터를 흡입해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무기입니다.]
“안개 형태로 변하는 몬스터라.”
곰곰이 생각하던 천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실드라는 걸 단번에 통과할 수 있는 게 아니더냐.”
[아무리 안개로 변했다고 해도, 던전 코어의 성분을 지녔기에 실드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재밌겠군.”
[천마 님. 이번에는 협회에 맡겨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천마의 속내를 짐작한 무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무와 같은 몬스터는 힘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장비로 처리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결코 힘으로 상대할 몬스터가 아닙니다.]
“본좌가 완력만 사용하는 인물로 보이나.”
천마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자 무명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물론 천마 님은 이 세상 누구보다 강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굳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진공 분쇄기가 있는 경우 혈무의 추정 위험도는 500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진공 분쇄기만 있다면 9급 각성자도 잡을 수 있죠.]
“흠.”
천마가 잔뜩 인상을 찌푸릴 무렵,
“실례합니다!”
바깥에서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렸다.
재각성을 위해 김도윤은 오늘도 잊지 않고 하이파이브를 하러 찾아온 것이다.
“오늘은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천마가 눈동자에선 혈염광휘가 번뜩였다.
“감히 본좌의 경고를 무시하다니. 간이 부었군”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평소와 달리 천마가 빨리 문을 열어주자 김도윤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천마는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인 김도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좌는 허언을 하지 않지.”
“네?”
“다시 찾아오면 본좌가 분명히 분근착골형을 내린다고 했다.”
분근착골(分筋錯骨).
무림의 대표적인 고문 기법으로, 혈도를 제압해 말 그대로 근육과 뼈를 분리하여 뒤섞는 고통을 주는 고문 기법이다.
하지만 천마가 사용하는 분근착골은 그 궤를 달리한다.
단순한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뼈와 근육을 늘려 버린다. 해혈(解血)하지 않고 장시간 놔두면 그대로 몸이 찢겨 죽게 되는 것이다.
“이건 네놈이 자처한 일.”
“그게 뭔가요?”
김도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천마는 두말하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파파파팍.
전면에 있는 서른여섯 개의 대혈을 빠르게 찍히자 김도윤의 몸에선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피부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뼈가 제멋대로 뒤틀린다.
멀뚱히 서 있던 김도윤의 팔과 다리는 마치 고무줄처럼 꼬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