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24화 (224/285)

제224화. 천마와 클래시카 개러지 (1)

어느 다가구 주택, 지하 1층 원룸.

천마는 차에 싣고 온 나무색 장판 하나를 텅 빈 방 안에 내려놓았다.

나무무늬가 일정하게 새겨져 있는 이 장판은 하이펫트라고 한다.

주거용 장판 중에선 가장 저렴하고 시공도 간편한 제품이지만, 본드 시공이 불가능하고 재질이 약하다는 단점도 있다.

“최근 만들어지는 건 수축팽창에 의한 줄어듦 현상이 개선된 제품이라 다행이군.”

이미 책을 통해 인테리어 자재들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는 천마.

지식으로만 따지자면, 장채원과 근접한 인테리어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다.

두두둑. 스윽스윽.

기존에 깔려 있던 장판을 둘둘 말아 제거한 천마는 빗자루로 깨끗이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스윽.

그리고 엉덩이 가방에서 줄자를 꺼낸 천마는 내부 사이즈를 치밀하게 측정했다.

“조심히 다뤄야겠지.”

그리고 방 크기에 맞춰 장판을 재단하기 위해 하이펫트를 펼쳤다.

하이펫트는 장판 중에서 가장 내구성이 약하고 쭈글거리기 때문에 시공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제품이었다.

“거실 모양이 특이하군.”

네모진 방이라면 장판 모서리만 따주면 시공이 끝난다. 하지만 이 원룸은 부채꼴 모양인데다 싱크대가 있었다.

거기다 낡은 타일과 싱크대 실리콘 부분이 맞물려 있는 탓에, 싱크대를 그대로 놔둔 후 장판을 잘라 밀어 넣어야 한다.

“편하고 간단한 시공만 할 순 없지.”

번쩍!

커터칼 하나를 쥔 천마의 팔이 움직이며 예리한 빛이 허공을 수놓자,

쩌억.

양쪽으로 펼쳐놓은 세워진 장판 단면이 유리결처럼 깨끗하게 잘렸다.

“흠.”

예리한 커터날을 바라보던 천마는 문득 감회가 새로웠다.

칼이란 오로지 살상을 위한 병기. 하지만 지금은 장판을 자르거나 꺾어 올린 곳을 눌러주는 시공구였다.

“이 날카로운 칼이 병기가 아니라 집을 꾸며주고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니…….”

손에 쥐어진 것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걸 사용하는 인간의 의지였다.

천마가 쥔 것은 커터칼이지만 단순한 시공구가 되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지금 본좌의 손에 극천이 들려 있다고 한들, 장판을 잘랐을 터.”

천마는 장판을 깔면서도 무학의 깨달음을 음미하고 있었다.

“본좌는 현재 마도의 종주가 아니라 인테리어 전문가인 것이다.”

그렇다. 천마는 마문의 종사가 아니다.

가장 예리하고 흉악한 병기를 들었다고 한들, 지금은 그저 한 명의 인테리어 시공자일 뿐이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일은 세상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천마는 기분 좋게 장판 시공을 마치고 라마스의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릉.

흐뭇한 표정으로 계기판을 보던 천마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어느새 계기판에 노란빛으로 물든 수도꼭지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같은 표시군.”

얼마 전 천마는 이 경고등 표시로 인해 라마스의 점화플러그를 교체했다. 그런데 며칠 되지 않아 똑같은 경고등이 뜨다니?

황급히 복복 인테리어로 돌아온 천마.

창고 방에 있는 무명을 데리고 다시 주차장에 있는 라마스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

천마의 물음에 차량을 진단한 무명이 상세하게 답했다.

[진단 결과, 전과 같은 점화플러그 손상이라고 떠 있습니다. 실제로도 플러그에 손상이 되어 있고요.]

“박 씨가 간이 부었군.”

[네?]

“감히 본좌에게 사기를 치다니. 결국 플러그를 교체하지 않고 다시 꽂아놓은 것이 아니냐.”

주먹을 주물럭거리는 천마의 눈에서 혈염광휘가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폐차장 옆 정비소로 달려가 박 씨의 뚝배기를 깨버릴 것만 같다.

당황한 무명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새 제품으로 교체한 것을 저도 확인했습니다. 당시 경고등도 삭제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저 노란불이 다시 뜬 거냐? 새 제품으로 교체한 것이 벌써 고장 났단 말이냐?”

[아마도 또 다른 원인으로 인해 계속 점화플러그 손상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결코 정비소 박 사장님이 천마 님께 사기를 친 것은 아닙니다.]

“흠.”

무명의 말에 천마는 이성을 되찾았다.

하기사, 돈 욕심도 없는 데다 곧 은퇴를 하는 정비소 박 씨가 푼돈이나 벌자고 사기를 칠 리가 없었다.

“그럼 다시 정비소로 가보지.”

[박 사장님께선 사흘 후에 정비소를 오픈합니다. 지금은 가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폐차장 옆 정비소를 운영하는 박 씨는 이제 나이가 들어 정비소를 이삼 일에 한 번씩만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번 오픈하면 밀려드는 손님으로 인해 차량을 정비하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다른 곳은 없나.”

[이 라마스 차량은 워낙 구형이고 부품이 특이합니다. 최신 컴퓨터로 진단하는 정비소보다 박 사장님처럼 정비 경험이 많은 정비사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습니다.]

“흠.”

천마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자 무명의 머릿속에서 끼리릭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잊고 있었군요. 저 역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천마 님. 일전에 명함을 받은 곳은 어떨까요?]

“명함이라니.”

양팔을 벌린 무명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낙지다리 던전에서 보았던 그 요괴 남매 분이 운영한다는 정비소 말입니다.]

클래시카 개러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 위치한 정비소였다.

각종 오일류와 정비 도구가 채워진 정비소엔 리프트 두 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엔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진 사무실이 있었다.

철컥.

라마스를 세운 천마의 눈앞엔 노랗게 물든 올드카가 세워져 있었다. 라마스보다도 더 오래된 올드카 맨티스였다.

“꽤 실력이 있나 보군.”

맨티스를 유심히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량 잡지에서 본 적이 있을 만큼 유명하고 오래된 올드카다. 라마스보다도 10년이나 더 오래된 차량이 새 차처럼 복원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천마가 차량을 바라볼 무렵,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작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회색빛 점프수트에 모자를 꾹 눌러 썼지만 하얀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돋보인다.

바로 낙지다리 던전에서 만났던 요괴, 강민주였다.

“아, 안녕하세요?”

천마의 얼굴을 알아본 강민주가 활짝 웃었다.

“나노봇도 왔네? 안녕?”

[안녕하세요, 강민주 님. 못 보는 사이 더 예뻐지신 것 같습니다.]

대뜸 던지는 무명의 농담에 강민주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래. 고마워. 네 언어팩도 여전하구나.”

그리고 천마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그녀의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라마스를 가리켰다.

“차 정비를 하러 왔다.”

“그러세요? 제가 얼른 봐드릴게요.”

“혼자서 운영하는 거였나.”

주위를 둘러보는 천마의 말에 강민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오빠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시선을 피한 그녀의 눈빛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 천마는 대번에 그 사정을 파악했다.

“또 던전을 간 건가.”

“요새 던전에 일이 좀 있어서요.”

시선을 회피하는 강민주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천마는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던전 재료만 채취하는 게 아니었군.”

천마에게 정곡을 찔린 강민주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원래부터 저희는 다양한 의뢰를 받고 있었어요. 다만 최근 의뢰가 모두 아픈 요괴들을 치료할 수 있는 던전 재료였을 뿐이죠.”

“던전에 또다시 들어가는 건가.”

당시 그녀는 분명 던전에 들어가는 걸 포기한다고 하였다.

강민주도 그 말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도 저번에 겪은 일로 던전 의뢰에 손을 뗄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이더라고요.”

그녀의 반짝이던 눈동자는 노을을 비춘 호수처럼 어두운 색채로 물들었다.

“최근엔 던전으로 몰래 들어가던 요괴들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아마도 저희가 겪은 일을 다른 요괴들도 겪고 있는 거겠죠.”

아마도 강민주의 오빠 강윤후는 실종된 요괴들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예의상이라도 걱정이라던가, 안부를 묻겠지만 천마는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설령 던전이 무너졌다고 해도 감흥이 없을 법한 표정이다.

무심한 천마의 표정을 발견한 강민주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라마스네요. 이 차량이 아직도 굴러다닐 줄이야.”

“그만큼 까다로운 녀석이지.”

그녀가 다가오자 운전석 문 앞에 선 천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비를 할 줄 아는 건가.”

“그럼요. 차량 정비는 오빠보다 제가 먼저 시작했는걸요.”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웃은 그녀가 정비소 앞에 있는 맨티스를 가리켰다.

“제 차량도 제가 다 고친 거예요.”

“그렇군”

그제야 굳은 표정이 반듯하게 펴진 천마가 라마스에서 비켜섰다.

키릭키릭. 위이이잉.

보닛을 열고 차량의 점화플러그를 꺼낸 강민주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이네요. 플러그가 손상되어 있어요.”

“교체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요? 이게 쉽게 나가는 부품이 아닌데.”

유심히 엔진룸을 바라보던 강민주가 눈을 깜빡였다. 진단기를 설치해 검사해 봤지만 역시나 점화플러그 문제로 떠 있을 뿐이다.

“으음.”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뭔가 깊이 생각하는 눈치다.

[강민주 님.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량의 배선을 모두 교체하는 건 어떨까요?]

불쑥 나선 무명의 말에 강민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워낙 낡은 차가 아닙니까? 전기 계통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이참에 모두 교체해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좋은 방법이긴 한데, 비용이 너무 많아 나와.”

‘비용…….’

의아한 생각이 든 무명은 눈 센서를 깜박였다.

애당초 강민주 남매를 천마가 구한 것은 거래였다. 분명 라마스의 무료 정비를 거래조건으로 내걸었을 텐데.

“그리고 지금 상태로 봐선 배선을 모두 건드릴 필요는 없어. 그건 과잉 정비야.”

무명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민주가 천마에게 말했다.

“이 경우, 의심되는 부분은 이쪽이에요.”

위이잉.

공구를 들고 차량의 배터리를 분해한 그녀는 아래쪽 부분을 가리켰다.

“배터리 쪽 마이너스 단자 부분이 단선되면 점화플러그에 충격을 가할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배터리 박스 아래쪽을 들어보자, 정말로 굵은 배선 하나가 반쯤 잘려져 있는 게 아닌가?

“역시 그렇군요. 원인을 찾았어요.”

강민주가 라마스의 배터리 박스 부분의 하부를 가리켰다.

“아마도 주행을 할 때 날카로운 무언가에 부딪쳐 잘려 나간 것 같아요. 드물지만 이런 일이 종종 있거든요.”

“그렇군. 본좌는 몰랐다.”

“다행이에요. 전기 계통 문제는 원인을 못 찾으면 진짜 골치 아픈데.”

정비복을 입은 채 강민주의 활짝 짓는 미소에 천마는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닮았군.’

천마는 불현듯 무림에서 보았던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자처럼 머리를 틀어 올리고, 언제나 측량 공구를 담을 수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 여인, 설리하를 말이다.

‘설리하. 그녀의 환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군.’

무림제일 신수(神手)라 불렸던 설문방(雪文旁)의 무남독녀이자, 금산공방의 주인 설리하.

그녀는 정도문파의 건축물과 사찰을 주로 지었지만, 설문방과 안면이 있는 추금산이 천금을 주고 영입해 천마의 처소를 짓게 하였다.

뚝딱뚝딱.

만마집궁의 가장 은밀하고도 깊은 구중심처.

명장이라 불리는 목수들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노을빛과 닮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왜 본좌의 거처를 짓는 걸 수락한 거지?”

공사 현장에 방문한 천마는 도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여인, 설리하에게 다가가 물었다.

“정파의 노인네들이 죽일 듯이 반대했을 텐데.”

그러자 설리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건축물엔 마도와 정도 같은 구분이 없으니까요.”

직설적이면서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으하하하하!”

천마는 기꺼운 표정으로 앙천대소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건물에 무슨 정사가 있겠는가?”

그날 이후, 천마는 한가할 때마다 설리하의 공사 현장에 종종 방문해 담소를 나누었다.

사실 나누는 대화라곤 설리하가 해주는 건축물에 관련된 것들뿐이었지만, 천마는 흥미 있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때로 장로전에서 ‘마도의 종주로서 체통을 지키시지요. 어찌 한낱 공방의 여인과 친구처럼 지낸단 말입니까’라고 태클을 걸었지만, 천마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날의 일만 없었다면, 그녀와 난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설문방이 만들어낸 신검, 회단비섬(廻丹飛閃)을 혈룡방(血龍幇)에서 약탈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혈룡방주인 도금정이 설문방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설문방의 사건에 분노한 천마는 약탈을 자행한 혈룡방을 일거에 쳐부수고, 회단비섬을 다시 돌려주었다.

하지만 무림의 살육에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설리하는 비구니가 되었다.

‘미인박명이라.’

신비한 불문종파, 정려교종(靜慮敎宗)에 몸을 의탁한 설리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본좌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웠거늘.’

정비복을 입은 강민주를 보자 이 해묵은 기억이 떠오르다니.

“저… 괜찮으세요?”

깊은 회상에 잠겨 있던 천마는 강민주가 빤히 바라보자 손을 내저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천마가 라마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리를 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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