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항아거울 이야기 (1)
“난 언제 저렇게 될까.”
방 안에 앉아 TV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라라. 랄라라.
TV 속 화면에 나오는 가수, 유이나를 바라보는 여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만 있으면 저렇게 될 수 있는데.”
TV를 응시하던 여성은 문득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
꽤나 단아하고 수려한 용모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 춤추고 있는 유이나에 비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아니, 솔직히 말해 유이나와 비교하면 밋밋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안 되는 걸까.”
먼 하늘을 바라보는 여성의 눈에선 뜨거운 갈망이 떠올랐다.
여성은 연기를 전공했고,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여러 번 오디션의 문을 두들겼다.
물론 배우라는 건 연기력으로 승부를 보는 직업이다.
하지만 연기력을 인정받기 위해선 어쨌든 배역을 따내야 한다. 줄곧 단역만 맡아왔던 그녀는 연기력을 증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나도 유이나처럼 예뻤으면.”
벽에 걸어둔 달력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잦아들었다.
달력을 바라보던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오디션, 잘해야 할 텐데.”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 떨어진 오디션 장소만 적어도 노트 한 권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내일도, 그렇게 떨어질 것이다. ‘뭔가 마스크가 아쉽다.’라는 평을 들으면서.
“아냐.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고개를 흔든 여성이 거울을 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올해의 여우주연상을 타게 된…….”
딸랑.
그때 바깥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아름다운 금종이 산산이 깨지는 듯한 소리다. 그리고 그 소리는 왠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뭐지?”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쓰레기를 놓아두는 전봇대 밑에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이 있었다.
“이건…….”
반짝이는 물건을 바라보는 여성의 눈동자는 놀라움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토요일 오후.
바쁘게 돌아가던 매장은 최근 조금 한가해진 편이었다.
덕택에 장채원은 느긋하게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었고, 천마는 응접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녹차 한 잔.”
책을 보던 천마가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비어 있는 찻잔을 힐긋 바라보던 천마가 다시 말했다.
“녹차 한 잔.”
“은진 씨 오늘 출근 안 했잖아. 그리고 늘 그렇게 시켜봤자 은진 씨가 타준 적도 없고.”
“그렇군.”
새삼 주위를 둘러보던 천마는 갑자기 장채원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그럼, 녹차 한잔 부탁하지.”
“뭐? 지금 나한테 녹차를 타 달라고?”
“점주가 더 가깝잖나.”
장채원은 터져 나오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다.
아무래도 저 녀석, 오늘 점심을 잘못 먹은 게 분명했다.
“네가 알아서 타 마셔.”
시선을 돌린 장채원이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며 말하자, 천마가 무심히 대꾸했다.
“본좌는 업무에 관한 책을 보고 있잖나.”
“그런데?”
“점주는 지금 보니 놀고 있군.”
“그래서.”
천마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업무를 보는 본좌를 도와야 하지 않겠나.”
“별꼴이야. 미쳤나 봐.”
“한 번쯤 타줄 수도 있잖나.”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천마는 쩨쩨하다는 표정으로 장채원을 바라보았다.
“본좌는 지금 중요한 대목을 읽고 있다. 차를 타러 나가면 왠지 흥이 깨질 것 같다.”
“직원에게 차를 대령하는 사장 본 적 있냐?”
“이제 곧 보게 되겠군.”
“사장에게 얻어맞는 외국인 직원을 보는 건 어때?”
장채원이 인상을 쓰며 다시 컴퓨터를 볼 찰나,
딸랑.
그때 풍경 소리와 함께 매장의 문이 열리고 작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책을 읽던 천마가 고개를 들자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서 있다.
절벽 위에 피어난 꽃마냥 아름답고 애절하고, 또 가녀리다. 눈동자가 마주치자 환한 빛이 사방을 가득 메우는 듯한 느낌이다.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라 평가받는 가수 겸 배우, 유이나였다.
“안녕하세요. 천마 아저씨.”
천마와 눈이 마주친 유이나가 배시시 웃었다.
한창 노트북을 보고 있던 장채원도 그녀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이나?”
“언니!”
유이나는 달려와 책상에 앉아 있는 장채원의 등을 꼭 안았다.
“잘 지내셨어요?”
“으응.”
장채원은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갑자기?”
순간 활짝 웃던 유이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세히 보니 어딘가 더 수척해진 것 같고 눈빛도 어두웠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무슨 일이야.”
“그게요…….”
유이나는 여러 번 입을 떼었지만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장채원은 멀뚱히 앉아 있는 천마를 발로 밀어내고 그녀를 응접 테이블에 앉혔다.
“괜찮아. 언니한테 차분히 이야기해 봐.”
“언니.”
심호흡을 한 유이나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항아거울.
달의 여신, 항아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거울로 월령일족에게 내려오는 보물이다.
월령일족은 항아거울을 신전이라 불리는 비밀스런 장소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이 묘연히 사라졌다.
문제는 항아거울을 보관하고 있는 신전의 책임자가 바로, 월령일족의 이끄는 후계자로 지목된 유이나의 동생, 유승호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휴대폰에 찍힌 항아거울의 모습과 유승호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장채원이 눈을 깜빡였다.
“우리더러 항아거울을 찾아달라고?”
“네.”
자초지종을 들은 장채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매장 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엔 대문짝만한 글씨로 ‘집수리 전문’이라고 적혀 있다.
“차라리 트레저 헌터들에게 일을 맡기는 게 어때? 그 사람들은 보물을 전문적으로 찾기 때문에 훨씬 빠를 거야.”
유이나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아거울은 요계의 물건이에요. 애당초 요기를 감지할 수 없는 인간들은 볼 수도 없어요”
“아, 그래? 그럼 요괴들 중에 남의 물건을 잘 찾아주는…….”
장채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의뢰해 봤어요. 하지만 행방은커녕 실마리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요.”
유이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주일 후면 장로들이 신전을 검사하러 오는 날이에요. 그 안에 빨리 항아거울을 찾아 갖다 놓지 못하면, 동생은 큰 처벌을 받을 거예요.”
“신전을 제대로 못 지켰다고?”“네.”
“어떤 벌을 받는데? 그냥 죄송하다고 하면 안 돼?”
“그럴 수 없어요.”
유이나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신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벌은 죽음이니까요.”
“뭐? 죽음?”
장채원이 펄쩍 뛰었다.
아무리 보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죽어야 한다니?
“월령일족의 후계자의 자질을 시험받는 게 바로 신전을 지키는 일이에요. 그리고 신전에서 변고가 일어나면 목숨으로 그 죄를 갚아야 하는 거죠.”
유이나의 말에 장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위요괴, 그러니까 일족들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나 엄한 규율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규칙들은 자칫 큰 사고를 칠 수 있는 강력한 요괴들을 억제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다.
하지만 현시대에 맞지 않은 불합리한 부분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동생은 자포자기했는지 항아거울을 찾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어요.”
유이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의뢰할 수 있는 곳엔 모두 의뢰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으음.”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부디 항아거울을 찾아주실 순 없을까요?”
장채원은 침음을 했다.
알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만약 대답해 놓고 항아거울이라는 걸 찾지 못한다면, 유이나 동생의 목이 날아갈 판이니…….
“후우.”
깊은 장고 끝에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너른 인맥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장채원은 인테리어 전문가다.
트레저 헌터나 전문 청부업자도 찾아내지 못한 거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별거 아니군.”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정말요?”
순간 유이나가 구세주를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 보물 같은 건 특징만 알면 쉽게 찾을 수 있지.”
천마의 장담에 장채원이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말처럼 쉬운 게 아냐. 월령일족이 은밀하게 보관하고 있는 보물이 사라진 거라고. 평범한 도둑놈이 훔쳐간 게 아니란 말야.”
“그렇다면 더욱 좋지. 전문가라면 더욱 자신만의 흔적을 남겼을 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찾을 수 있다고?”
“물론이다.”
장채원은 뜨악한 표정으로 천마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중하게 말해. 못 찾으면 미안하다고 끝날 일이 아니란 말야.”
“말했잖나. 보물 같은 건 특징만 알면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특징?”
“그렇다.”
“특징만 말해주면 되는 거야?”
장채원이 되묻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항아거울의 특징은…….”
유이나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천마가 갑자기 손을 가로저었다.
“잠깐.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할 일이요?”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갑자기 장채원을 빤히 응시했다.
재빨리 시선을 피하지만 천마의 붉은 눈동자는 도둑놈을 쫓는 경찰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뭐, 왜? 왜 날 보는데.”
“녹차.”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던 천마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주가 타준 녹차가 한잔 먹고 싶군.”
쪼르르륵.
잇몸을 훤히 드러낸 장채원은 깨끗한 녹찻잎을 담아놓은 찻잔에 조심스럽게 물을 부었다.
그리고 찻잔을 쟁반 위에 올려 두었다.
맑은 찻물이 담긴 찻잔을 무심히 바라보자 있지도 않은 가래가 목에 들끓었다.
-퉤!
당장이라도 목에 걸린 걸 뱉고 싶지만 저 녀석이 눈치를 못 챌 리 없다.
무엇보다 유이나의 부탁이 걸려 있으니 꾹 참아야 했다.
‘이 시키! 헛소리하기만 해봐.’
장채원은 쟁반을 꽉 쥐었다.
만약 헛소리가 나온다면, 그녀가 쥐고 있는 이 쟁반은 천마의 뚝배기를 깨는 용도로 바뀔 것이다.
터벅터벅.
짜증스럽게 걸어간 그녀는 천마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쟁반을 툭 내려놓았다.
“여기.”
후룩.
장채원이 타준 녹차를 한 모금 마신 천마가 인상을 썼다.
“담부턴 조금 진하게 내려라. 물양이 많군.”
“다음이 있을 것 같냐?”
이를 꽉 깨문 장채원이 쟁반을 움켜쥐며 말했다.
“자, 이제 말해봐. 무슨 방법으로 거울을 찾는다는 건지.”
후르륵.
느긋하게 찻물을 훌훌 들이켠 천마가 유이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항아거울이라는 것의 특징부터 들어보지.”
“그게 접이식 탁상거울처럼 되어 있는데…….”
“본좌는 겉모습이 아니라 특징을 말하라고 했다.”
“특징이요?”
붉은 눈을 번뜩인 천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거울은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유이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마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그런 보물을 왜 은밀한 곳에 보관해 두는 거지? 쓰임새가 많을 텐데.”
“그건…….”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그 거울이 갖고 있다는 신비한 힘이라는 게 뭐냐.”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던 유이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항아거울은 오랫동안 갈망했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요.”
“소원이라.”
천마는 별로 놀랍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보물은 무림에도 더러 존재했다.
단지 천 명의 처녀 피를 모아야 한다던가, 만 구의 시체를 모아다 바쳐야 한다던가 하는 등의… 음험한 조건이 따라붙긴 하지만.
“거울만 입수한다면, 소원은 아무나 들어주는 건가.”
“아뇨.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유이나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첫 번째로는 오랫동안 바라왔던, 꿈에서조차 바랐던 강렬한 소망만을 들어줘요. 두 번째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은 오직 여성뿐이고요.”
“여성의 소원만 들어준다고?”
천마가 인상을 팍 쓰자 유이나가 괜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항아님께선 달의 여신이다 보니…….”
“세 번째는?”
“거울을 보고 소원을 빈다고 모두 들어주는 건 아니에요. 항아 님의 힘을 벗어나는 소원은 들어줄 수 없는 거죠.”
“흠.”
무언가를 생각하던 천마가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소원을 이루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겠군.”
“네?”
“거울에 비는 것만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거라면, 지금까지 일족의 여성들은 모두 돌아가면서 그 거울에 소원을 빌며 살아갔을 테니까.”
천마의 추리에 유이나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거울을 통해 소원을 이루게 되면, 점차 심성이 사악하게 변한다고 해요. 그래서 신전에 보관을 해두고 있었던 거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천마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장채원은 쟁반을 쥔 손에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찾을 수 있겠어?”
잠시 고민하던 천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긴 하지만 가능할 것 같군.”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자 그녀는 입을 벌렸다.
“뭐, 어떻게?”
“아까 꿈에서 바랐던 강렬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오랫동안 바라왔던, 꿈에서조차 바랐던 강렬한 소망을…….
유이나의 말을 떠올린 장채원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천마는 이미 범인을 잡은 탐정처럼 씩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다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