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천마, 점집에 가다
내당의 화원을 살펴보던 장채원이 걸쭉한 침음을 내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원래 정령수가 피어 있던 곳이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다채로운 빛을 내뿜는 정령수가 있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좀 꾸며놓을까나.”
신경을 안 쓸 땐 몰랐는데, 한번 시선에 들어오자 새삼 앞마당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돌이나 몇 개 놔둬야겠다.”
강이나 바다 근처엔 오랜 세월 물에 씻기면서 아름다운 형태로 깎여나간 자연석들이 많다.
물론 몰래 가져오는 건 불법이지만, 그녀는 바위를 관장하는 대지유신 석공(石公)과 퍽 안면이 있었다.
부탁만 하면 대여섯 개쯤은 척척 내어줄 것이다.
“아니면 정령수를 다시 심을까?”
장채원은 뺨을 긁으며 고민했다.
쓸 만한 정령수 묘목은 최소 3천만 원. 거기다 3년 동안 돌보며 갖고 있는 지식을 모두 전수해야 한다.
“귀찮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울 때는 몰랐는데, 막상 그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하려니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건 천마라는 제법 훌륭한 일꾼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냐. 어차피 천마 녀석, 이곳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잖아.”
냉정하지만 사실이다.
성질을 꾹꾹 누르고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도, 바로 내공을 모아 무림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으니.
“돌아갈 녀석이라고.”
언제고 그날은 오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채원은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정이 좀 들었나 보다.
“아냐, 있을 때 잘 부려먹어야지.”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의 일. 지금은 지금이다.
마음을 고쳐먹은 그녀가 눈을 번뜩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마음껏 부려먹어 주겠어.”
결국 장채원은 쉬고 있는 천마를 불렀다.
커다란 자연석을 몇 개 얻어 오라고 시킨 것이다.
물론 집에서 쉬고 있던 천마는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정령수를 부수뜨린 장본인이라는 이유를 들며 닦달하자, 마지못해 자연석을 마당에 옮겨다 주었다.
“이제 됐나.”
쿵.
마지막으로 들고 온 자연석을 내당으로 옮긴 천마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더 시킬 일이 없다면 가보겠다.”
“밥 먹고 가.”
장채원은 천마의 어깨를 두들겼다.
“모처럼 왔으니 대신 맛있는 거 사줄게.”
시내 번화가의 먹자골목.
장채원이 천마를 데리고 간 곳은 매우 유명한 된장찌개 맛집이었다.
“이게 맛있는 거란 말인가.”
천마는 국물 요리는 별로 즐기지 않았다.
특히 건더기라곤 채소만 들어 있는 된장국이나 순두부찌개 같은 것은 일절 입에 대지도 않았다.
“이럴 바엔 엄마손 백반이 낫겠군.”
실망스런 눈빛으로 메뉴판을 내려다보자 장채원이 씩 웃었다.
“먹어봐. 먹어보면 왜 이걸 따로 파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으음.”
천마는 불만을 꾹 참고 아이처럼 기다렸다.
“된장찌개 2인입니다.”
된장찌개에는 냉이와 소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슬쩍 맛을 본 천마는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찌개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장채원은 귀여운 손자를 보는 것처럼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먹을 땐 은근히 귀엽단 말이지.’
생긴 건 험악하게 짝이 없지만, 밥을 먹을 때만큼은 왠지 순박하게 보였다.
몸집이 큰 탓에 의자에 엉덩이만 걸친 채 오물오물 밥을 먹는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맛있어?”
“그렇다. 상당한 맛이로군.”
밖으로 나온 천마는 된장찌개 집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잘 끓인 된장찌개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요리였다. 천마는 또다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쩝쩝.”
밖으로 나온 천마는 흡족한 표정으로 이를 쑤셨다.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응.”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외출이네.”
거리를 둘러보던 장채원의 눈동자는 햇살을 반사한 강물처럼 반짝였다.
생각해 보니 주말에 외출을 해본 기억이 언제쯤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리에 쏟아진 수많은 인파들을 보니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흥이 났다.
“어라? 웬 점집 골목이?”
쭉 늘어선 상점 반대편 골목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엔 좌판을 깔거나 천막으로 상담소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점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처럼인데 구경이나 해볼까?”
“구경? 뭘 말인가.”
“저거 점집 말야.”
장채원은 아이처럼 해맑게 미소 지었다.
“으응. 나 저런 곳 한 번도 안 가봤거든.”
그녀는 시큰둥하게 서 있는 천마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천마, 점집 같은 거 한 번도 못 봤지?”
“점집?”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림에도 복사(卜師:점쟁이)들은 많다.”
“아, 그래?”
“불안한 말로 사람을 홀려서 돈을 뜯어내니 협잡꾼들이지.”
“응?”
“복사들의 말에 홀려 집안이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단 말이다. 재미로 봤다가 인생을 망치는 것이지.”
장채원은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막장 드라마냐.”
“어쨌건 저런 곳에 갔다간 점주도 신세를 망치고 파산하게 될 거다.”
“악담하냐? 네가 하는 짓이 점쟁이들이 하는 거잖아?”
“잘 아는군.”
“여긴 그런 곳이 아니라니까?”
발끈한 장채원은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재미로 보는 거라고, 재미.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없다고.”
천마는 믿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장채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네가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깨줄 수밖에.”
“무슨 말이냐.”
“가보자. 이 세계의 점집이 어떤 건지 보여줄게.”
사실 그녀는 천마와 함께 점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숨긴 채, 천마의 편견을 깨 주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부담 없이 타로나 볼까.”
역술인 골목을 이곳저곳 둘러보던 그녀는 구석에서 타로를 펼치고 있는 젊은 여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장채원이 다가와 앉자 여성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하지만 거구의 천마가 뒤따라 앉자 여성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같, 같이 오셨나요?”
“아, 네.”
장채원이 활짝 웃자 여성은 불안한 눈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엄청난 근육이 꿈틀대고 붉은 눈이 레이저처럼 쏘아지는 것만 같다.
타로를 펼치려던 여성은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 죄송하지만 오늘 영업은 끝나서요.”
그녀는 젊지만 꽤 오랫동안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봐왔었다.
그리고 천마 같은 인상의 남성에게 괜한 말을 꺼냈다간 험한 꼴을 당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 벌써요?”
“네, 네에. 몸이 안 좋아서.”
장채원은 시선을 피하는 여성의 표정을 보고 사정을 이해했다.
-얘 깍두기 아니에요. 미친개처럼 물지도 않고, 얌전히 이야기만 들을 거예요.
…라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분위기다.
장채원은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올게요.”
“흥, 그것 봐라.”
어깨를 늘어뜨린 채 점집에서 나온 장채원을 보며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사기를 치려다 먹힐 것 같지 않으니 포기한 거다.”
“야, 그게 아니라…….”
네 인상이 더러워서 피한 거야, 라고 말하려던 장채원이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의 기분만 나빠지면 될 일을, 두 사람이 나빠질 필요는 없으니까.
‘이 녀석이랑 괜히 왔나.’
“후후후. 이제야 깨달았나 보군.”
하지만 천마가 ‘거 봐라’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장채원은 오기가 발동했다.
“흥, 웃기지 마. 그럼 다른 곳으로 한번 가보자고.”
장채원이 들어간 곳은 포차처럼 간이천막을 만들어놓은 점집이었다.
커다란 글씨로 사주팔자&관상이라고 적혀 있는 곳을 제치고 들어가자, 작은 책상 앞에 안경을 쓴 중년남성이 앉아 있었다.
“궁합을 보러 왔구만.”
“네에?”
“생년월일하고 태어난 시(時)를 말해봐.”
장채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궁합 보러 온 거 아닌데요.”
“뭘 보든 생년월일하고 태어난 시는 알아야 해.”
“아, 그래요?”
고개를 돌린 장채원은 옆에 서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너 생년월일하고 태어난…….”
그녀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천마는 고아로 태어나 정확한 나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태어난 시를 알 리가 없다.
“저희 그냥 관상 같은 거 봐주시면 안 될까요?”
장채원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중년남성이 돋보기를 꺼내 들었다.
“좋아. 관상으로 두 사람의 궁합을 봐주지.”
그리고 앉아 있는 천마의 얼굴에 돋보기를 갖다 대었다.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맹수와 같은 날카롭고 긴 엄니. 중년남성은 보석을 감별하는 감별사처럼 열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이구먼.”
“네?”
“그… 여하튼 짐승이 될 거구만.”
중년남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 마리 야생마 같은 남자니까 밤에 조심해.”
음흉하게 웃는 남성을 보자 장채원은 오히려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남성은 그야말로 사이비다. 관상을 보기는커녕 지능이 일반인 수준에 미칠 것 같지도 않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올게요.”
장채원이 일어나자 중년남성이 눈을 크게 떴다.
“복채는?”
안면에 주먹을 한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장채원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려두었다.
“재미로 본다…라. 과연 그렇군.”
밖으로 나온 천마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헛소리를 들으면 재미를 느낀다는 건가.”
“아냐. 원래는 이런 게 아니라고.”
장채원은 울고 싶었다.
그저 평범하게 점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역시 천마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걸까?’
애당초 생긴 것 자체가 호러 장르다.
평범한 일상도 천마가 끼어들면 공포, 혹은 블랙코미디로 장르가 바뀌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역시 점쟁이들이 하는 짓은 무림이나 여기나 똑같군.”
천마의 무심한 말에 장채원은 승부욕이 타오른다.
“아냐. 여기에도 사기 안 치고, 용한 점쟁이가 있을 거야.”
이를 꽉 깨문 그녀는 번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문득 천막에 온통 한문으로 글씨를 적어둔 곳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깡마른 노인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며 진지한 눈빛이 척 봐도 심상찮아 보였다.
“좋아, 이번엔 저기로 가자고.”
안으로 들어가니 책상 앞에 깡마른 노인이 천마와 장채원을 쓰윽 올려다보았다.
“흠.”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인 노인은 힘 있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적을 써야 혀.”
“네?”
“부적을 써야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여.”
“아뇨. 저는 그냥 점이나 보러…….”
장채원이 다급히 손을 저었으나, 노인은 대뜸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붉은 액체가 담긴 벼루에 푹 찍어 노란 종이에 글씨를 쓰윽쓰윽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잠시 붓을 멈춘 노인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액운을 막아주는 방액신부 한 장이면 되니까.”
쓰윽쓰윽.
그리고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글씨를 써 내려 갔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부적을 가리키며 픽 웃었다.
“글자 틀렸다.”
“응?”
“액(厄)자가 틀렸잖나. 그건 포(包) 자다.”
“커험.”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누런 종이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이번엔 더욱 글씨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마구 붓을 휘젓기 시작했다.
“저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마가 혀를 찼다.
“저런, 부적 쓰는 걸 동영(東瀛:일본)에서 배웠군.”
“으응?”
노인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천마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부적을 가리켰다.
“음양도의 도인호부(:부적)은 생영(生靈)을 파괴하여 힘을 쓰는 비법이다. 노인네처럼 아무 능력도 없는 자가 마구잡이로 썼다간 스스로 불운을 불러오지.”
“뭐, 뭐라고?”
펄쩍 뛴 노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크험. 어디서 그런 소리를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헛소리야. 지금까지 평생 동안 부적을 써 왔지만 불운 따윈 온 적이 없었어.”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천마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노인이 붓을 담그고 있는 붉은 액체를 가리켰다.
“돈을 아끼려고 경면주사를 쓰지 않고, 붉은 염료를 탔군. 그러니 부적이 소용이 없었던 거다.”
“뭐, 뭐?”
“그리고 도인호부를 쓰는 방법도 틀렸다. 이런 식으로 써서는 어린아이가 누런 종이에 낙서를 한 꼴이지.”
비웃음을 머금은 천마는 장채원을 내려다보았다.
“또 여기 앉아서 계속 헛소리를 들으며 시간 낭비를 할 셈인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던 노인은 붓을 집어 던지고 크게 소리쳤다.
“당, 당장 나가!”
밖으로 나온 장채원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속되는 엉터리 점술가들의 출현에 천마의 얼굴을 보는 게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대로 관두면 천마 말대로 사이비 집합소잖아?’
천마의 눈치를 보던 장채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한 번만 더 가볼까?”
“딱히 재밌는 것 같지 않은데.”
천마가 마뜩찮은 표정을 짓자 장채원이 또다시 손을 이끌었다.
“어차피 재미잖아, 재미. 하하핫.”
이번에 선택한 곳은 ‘관성제군’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적혀 있는 곳이었다.
관성제군. 삼국지에서 나오는 관우를 신격화 한 신을 뜻한다.
“안녕하세요.”
장채원이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자, 덩치가 상당히 좋은 점술가가 인상을 쓰고 앉아 있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점술가는 장채원의 뒤를 따라 들어온 천마를 보자마자 갑자기 기겁을 한다.
“천, 천존(天尊)?”
“네?”
장채원을 스쳐 지나간 점술가는 천마의 앞으로 뛰어가 넙죽 절을 했다.
“천존께서 이 누추한 곳에 어찌 왕림하셨습니까?”
“호오.”
점술가 여성을 내려다보던 천마가 살짝 놀란 듯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뭘 좀 아는 사람인가 보군. 금강승(:밀교의 스님)의 후예인가.”
‘으응?’
“천존이시여! 오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가볍게 점을 보려고 했건만, 역시나 결국 망한 것이다.
“재미로 보기에는 재미가 없군.”
덩치 큰 점술가의 절을 실컷 받고 온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고작 이런 걸 보자고 돈을 내며 돌아다닌단 말인가.”
장채원은 할 말이 없는지 한숨만 푹 쉬었다.
“난 그냥 평범하게 점이나 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천마가 끼면 될 것도 안 되는 걸까?
점집에 들어가는 걸 포기한 장채원이 골목을 돌아서는데,
“어라?”
저 멀리 휘황찬란한 빛이 반짝이는 건물이 보인다.
마치 겉면에 금박을 입힌 것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건물의 외관을 보고 있으니, 도시가 아닌 신비한 나라에 잠시 초대된 듯한 착각마저 느껴진다.
“여기에 이런 점집도 있었나?”
장채원이 입을 벌리자 천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그만하지. 뭘 하든 형편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을 테니.”
“한번 가보자. 신기하잖아.”
천마는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장채원이 막무가내로 몸을 이끌었다.
어쩔 수 없이 천마도 장채원을 따라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딸랑.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복복 인테리어 매장에도 달려 있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 맑은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이쪽입니다.”
여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마치 인간의 일상을 길게 늘어서 표현한 듯 보였다.
마침내 복도 끝에는 아주 주렴이 드리워진 작은 문이 보였다.
“오셨습니다.”
여성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문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성의 목소리다.
마치 아이가 어른 목소리를 흉내 낸 것 같기도 하고, 어른이 아이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분위기 죽여주네.’
장채원이 놀라고 있는 사이, 젊은 여성이 주렴 안으로 손짓했다.
“들어가시지요.”
“아, 네에.”
장채원과 천마가 주렴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방의 모습이 보였다.
탁자와 의자들은 모두 오래된 명품이었고, 벽 한편에는 이해할 수 없는 도형들이 그려진 추상화가 보였다.
“어서 오세요.”
방 맞은편에는 매미처럼 얇은 휘장이 쳐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커다란 장식이 있는 모자를 쓴 듯한 여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목소리는 휘장 안에 있는 여성이 내는 것 같았다.
“어떤 것이 궁금한가요.”
그림자 여성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렸을 때보다 훨씬 맑았다.
그 음성은 마치 시원한 바람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아무거나 물어보아도 되나요?”
장채원의 말에 그림자 여성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연애운이요.”
심호흡을 한 장채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저는 짝을 만날 수 있을까요?”
“궁금한 게 그런 건 아닐 텐데요.”
그림자 음성의 목소리는 매우 나긋했지만,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확신이 있었다.
“진짜 궁금한 걸 물어보세요.”
장채원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제가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반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짝을요.”
장채원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금사빠에 얼빠인 그녀는 ‘좋은 남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후우.”
장채원의 뻔뻔한 질문에 휘장 속 여성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그게 궁금하시다니.”
그리고 다시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아, 정말요? 언제? 어디서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휘장 속 여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휘장 속의 여성이 천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고 싶은 게 있나요?”
“없다.”
천마는 비웃듯이 말했다.
“본좌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도 있나.”
“글쎄요. 다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모른다고도 할 수 없죠.”
“복사들이 즐겨 하는 전형적인 도피성 말투군.”
“그런가요?”
신랄한 말투에도 휘장 속 여성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 말했다.
“그럼 제가 하나 물어도 될까요?”
“맘대로 하라.”
“이쪽 세계는 어떠신가요. 맘에 드시나요?”
그 한마디에 천마의 곁에 있던 장채원이 입을 벌렸다.
그녀는 천마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한 번에 눈치챈 것이다.
‘영험하잖아!’
하지만 천마는 그리 놀라지도 않고 덤덤하게 반응했다.
“그럭저럭.”
“정말 저에게 묻고 싶은 게 없나요?”
천마는 휘장 속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그렇군요.”
들려 나오는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엥? 이게 끝이에요?”
뭔가 진지하게 상담을 하고 싶었는데, 이게 끝이라니?
장채원이 아쉽다는 듯 말하자 휘장 속 여성이 엷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길게 상담해 드릴 수가 없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몸이 안 좋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입맛을 쩝 다신 장채원이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자 휘장 속 여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괴도 인간도 아닌 분에게는 복채를 받지 않습니다.”
영험하다.
장채원은 내심 크게 놀랐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천마 복채라도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네?”
“곧 세상을 떠날 사람에겐 복채를 받지 않습니다.”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오자 장채원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세상을 떠난다’라는 말이, 천마가 죽게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말을 한 것일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놀란 장채원이 다시 질문을 했지만, 휘장 속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터벅터벅.
점집 골목을 나온 장채원이 천마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안 찜찜해?”
“뭐가 말이냐.”
“마지막 말 말이야. 그 점술가가 이상한 소릴 했잖아.”
-곧 세상을 떠날 사람에겐 복채를 받지 않습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나는 좀 불길하게 느껴져서 말야.”
장채원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자, 천마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무슨 뜻이든 상관없다.”
“뭐?”
“본좌에겐 적이 많지. 심지어 무당파의 도사들은 도관에 매일 물을 떠다 놓고 빌 정도다.”
천마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하지만 본좌는 죽지 않았다. 복사들의 말은 모두 헛소리다.”
“그, 그럴까?”
억지로 미소 지은 장채원은 순간 다시 눈썹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무슨 나쁜 짓을 했길래, 도사들이 매일 저주를 하고 그래?”
“무림에 딱히 나쁜 짓이 뭐가 있겠나. 현실에선 대항할 힘이 없으니 미신의 힘을 빌어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뿐이다.”
“그, 그래.”
신랄한 말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동감이 갔다.
그래, 모두 미신이야. 이제 점 따위는 보지 말자.
“그러게. 괜히 시간만 낭비했잖아.”
찜찜함을 훌훌 털어버린 장채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론 나도 그냥 미신이라고 생각해야겠다.”
그리고 천마의 보폭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어?”
뭔가 찜찜함을 느낀 장채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화려하게 지어진 점집 건물은 안개처럼 사라져 있었다.
“뭐야.”
장채원은 눈을 비볐다.
휘황찬란하게 지어진 건물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는 낡은 상가가 있었다.
“천, 천마야.”
황급히 달려간 장채원은 천마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 아까 점집 말이야. 건물이 바뀌었어.”
고개를 돌린 천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가 바뀌었다는 거냐.”
“뭐가 바뀌었다니? 아까 우리가 들어갔을 땐 엄청 크고 금박이 입혀진 건물이었잖아.”
당황한 장채원을 보며 천마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몸이 좋지 않나?”
“뭐?”
“피곤한 것 같으니 어서 들어가 쉬는 게 좋겠다.”
“무슨 소리야? 아까 건물 상태 못 봤어?”
장채원이 펄쩍 뛰자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원래부터 저런 건물이었잖나.”
“뭐라고?”
장채원은 눈을 비볐다.
설마하니 내가 지금까지 뭔가를 착각했었나? 헛것을 본 건가? 아니면 점집에 계속 실패해서 뭔가 상상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천마는 멀리 보이는 시계탑을 올려다보더니 장채원에게 말했다.
“곧 있음 본좌가 좋아하는 ‘세계의 비밀’이라는 프로를 할 시간이다.”
“어?”
“먼저 돌아가도록 하지.”
천마는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휑하니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서 굉음 소리와 함께 하얀 라마스가 쏜살같이 도로로 나갔다.
“대체 뭐야.”
어깨를 늘어뜨리던 장채원은 눈에 힘을 줬다.
“이상해.”
다시 몸을 돌린 그녀는 낡은 건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없어.”
낡은 상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신비한 모습으로 꾸며졌던 점집도, 응대하는 여성도 모두 사라진 것이다.
“설마…….”
이 경우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변덕스런 신이 인간세계에 내려와 자신과 천마에게 장난을 쳤거나, 아니면……
“운명을 관장하는 세 명의 신 중 한 분이 내려온 건 아니겠지.”
장채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러 인간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운명의 신. 그들은 각기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의 일을 이야기해 주곤 한다.
“아닐 거야.”
긴 숨을 들이쉰 장채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그녀는 운명 따윈 믿지 않는다. 운명이 있더라면 그녀는 복복 인테리어를 운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힘들게 은총 따위도 모으지 않았을 것이다.
부르릉.
승합차에 시동을 건 장채원이 핸들을 잡았다.
하지만 머릿속엔 휘장 속의 여성이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곧 세상을 떠날 사람이라는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