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천마와 인어아가씨 (4)
던전 밖으로 나온 천마는 경공을 펼쳐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무명의 안내에 따라, 4킬로 정도 떨어진 던전 휴게소, ‘안개다리’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띠링.
던전에 도착하자 사방으로 투명한 실드 같은 게 쳐져 있었고, 굳게 닫힌 입구에는 카드 결제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띠링.
무명이 결재 시스템 창구에 얼굴을 들이대자, 맑은소리와 함께 휴게소의 문이 열렸다.
“무슨 도구가 필요하다는 거냐.”
휴게실을 둘러보던 천마의 말에 무명이 담담히 대답했다.
[스타 엘리먼트에게 별모래를 획득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냥 때려잡으면 나오는 게 아닌 건가.”
[그렇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때려서는 안 되고 조건을 클리어해야 한다고나 할까요?]
애매모호하게 대답한 무명은 휴게소 끝자락에 있는 잡화점으로 천마를 안내했다.
[실례합니다.]
“아이구, 깜짝이야!”
계산대에서 졸고 있던 중년의 상점 주인은 천마의 얼굴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몬스터가 등장한 줄 알았네. 그런 가면은 왜 쓰고 다니는 거요? 유물이요?”
상점 주인은 천마의 험악한 얼굴이 정교한 가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마의 눈치를 힐끔 살핀 무명이 재빨리 너스레를 떨었다.
[쓰고 있는 동안 자외선과 먼지로부터 피부를 지켜주거든요.]
“으응? 언어팩 끝내주네? 아주 감정이 자연스럽게 실려 있구먼.”
상점 주인이 눈을 껌뻑이자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무명이 매대에 폴짝 뛰어내렸다.
[감사합니다. 여기 있는 주전자와 삼색 매직펜, 그리고 마포걸레, 그리고 나무젓가락도 하나 부탁드립니다.]
유창하게 말을 하는 나노봇을 보며 상점 주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여깄수다. 다른 건 더 필요한 거 없수?”
[있습니다.]
“뭐가 더 필요한데?”
[그건 바로… 아저씨의 호의가 가득 담긴 할인이죠.]
“으하하하하! 형씨, 나노봇에 진짜 웃기는 걸 깔아놓았구먼.”
상점 주인은 무명을 가리키며 한참 동안 낄낄 웃어댔다. 그리고 인심 좋게 할인 가격을 적용해 주었다.
“자, 10퍼센트 할인해 주었수다.”
천마는 대답은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지만 상점 주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각성자들 중에선 독특한 컨셉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위 랭커 중에선 코스프레 옷을 입고 던전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띠링.
무명이 결재를 완료하자 상점 주인이 웃으며 천마에게 말했다.
“그럼, 다녀오슈.”
전투에 지친 각성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던전 내의 휴게소.
이곳의 상점들은 모두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 대신, 항상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를 건넨다.
던전이라는 전장에서 언제 어디서 위험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지.”
인사말의 의미를 느낀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 모습은 던전을 돌아다니는 여느 각성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 * *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하늘이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휴게소에서 배를 채우고 느긋하게 쉬고 있던 천마는 해가 저물자 다시 공동묘지 던전으로 향했다.
던진 중심부로 들어오자 뻥 뚫린 천장에선 밤하늘의 보였고, 하늘에는 촘촘히 박혀 있는 별이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천마 님. 이제 모닥불을 피워주시겠습니까?]
무명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내 천마는 몸을 돌렸다.
파파파팍.
근처에 있는 나무를 잘라다 잘게 자른 천마는, 흐흡 하는 소리와 함께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후욱.
하얀 연기와 함께 모닥불이 피어오르자 무명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모닥불의 빛이 닿는 땅에 아까 얻은 금모래를 뿌리세요.]
“뿌렸다.”
금빛 모래를 바닥에 가득 뿌리자 무명이 다시 말했다.
[그 모래를 정방형 모양으로 만드세요.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흠.”
내공을 끌어올린 천마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흩어져 있던 금모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반듯한 네모 모양 형태로 만들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게 끝인가.”
[그렇습니다. 모닥불의 불빛이 닿는 곳에 금모래를 뿌리는 것이 스타 엘리먼트가 나타나는 출현 조건이니까요. 아마 곧 나타날 겁니다.]
무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밤하늘처럼 생긴 천장에서 별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피잉. 샤라라랑.
동시에 아름다운 오색광채가 땅에서 피어나더니 빛으로 둘러싸인 옷을 입은 작은 소녀가 등장했다. 바로 스타 엘리먼트였다.
“어린아이의 형태를 하고 있군.”
주먹을 매만진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하필 다른 형태도 아니고 귀여운 소녀의 형태라니.
[그렇습니다. 스타 엘리먼트는 히든몬스터라기 보다는 인어와 마찬가지로 중간적 존재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좌는 개의치 않는다. 삼두육비의 괴물 모습이든, 홍안의 꼬맹이든.”
빛으로 둘러싸인 귀여운 소녀, 스타 엘리먼트를 바라보던 천마가 흠, 하는 소리를 내었다.
“다만 모습이 그러하니 본좌가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주지.”
그리고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선공하라.”
공격 자세를 취한 천마가 스타 엘리먼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삼 초를 양보하겠다.”
<키킥.>
[어라?]
스타 엘리먼트가 환하게 미소 짓자 무명이 펄쩍 뛰었다.
[천마 님, 성공하였습니다!]
“무슨 소리냐.”
[스타 엘리먼트에게 별가루를 얻는 비법은, 그녀를 웃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상점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사려고 했던 것인데…….]
‘웃기기 위해서였다고?’
순간 천마의 머릿속엔 휴게소에서 샀던 여러 가지 물품들이 떠올랐다.
주전자, 마포걸레, 삼색 매직펜, 나무젓가락.
그렇다면 어째서 무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품들을 열심히 구매했단 말인가?
-샤라라랑.
그 사이, 맑은소리와 함께 천마가 그려놓았던 금모래들이 어느새 투명한 조각들로 변했다.
저것이 불 속성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보물, 꿈결조각이었다.
<이러면 되는 거지?>
금모래를 꿈결조각으로 바꿔준 스타 엘리먼트가 천마의 바위 같은 얼굴을 바라보더니 또다시 쿡쿡 웃었다.
<다음에 또 재밌게 해줘.>
“뭐라?”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천마가 인상을 쓰자 소녀는 또다시 꺄르르 웃었다.
<표정 너무 웃겨.>
[아하, 천마 님의 얼굴이 웃음 벨이 되었나 봅니다.]
무명이 환하게 웃을 무렵,
샤라라랑.
빛으로 둘러싸인 소녀의 옷이 하얗게 반짝이기 시작하자, 소녀가 던전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또 봐.>
시선을 천마에게 살짝 돌리던 소녀는 한순간 다시 빛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타 엘리먼트. 그녀는 히든몬스터가 아니라 하늘에 내려온 별의 요정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쉽게 성공할 줄이야. 정말 다행입니다.]
천마의 곁으로 굴러온 무명이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제가 준비한 개그가 먹힐지 몰라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제서야 천마는 무명이 왜 그런 물품들을 샀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없이 배낭에 매달아 놓은 주전자와 펜 등을 모두 꺼낸 천마가 떠벌떠벌 떠드는 무명의 앞에 갖다두었다.
[이걸 왜 다시 꺼내십니까?]
무명을 노려보던 천마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해봐라.”
[뭘요?]
“네놈이 준비했다는 것. 그대로 말이다.”
* * *
그날 저녁, 복복 인테리어 내부.
책상에 앉아 견적서를 뽑고 있던 장채원은 뒷문을 열고 나타난 무명을 보자 눈을 껌벅였다.
“뭐야? 그 꼴은?”
주전자에 마포걸레를 뒤집어쓴 무명의 맨들맨들한 뒤통수엔 사람 얼굴이 매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코 부분이 그려진 아래엔 기다란 나무젓가락이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안 웃긴가요?]
양팔을 펼친 채 흔드는 무명을 보자 장채원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고장 났니?”
그때 다시 뒷문이 열리고 두툼한 배낭을 멘 천마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왔다.
“역시 점주도 웃지 않는군.”
“성공한 거야?”
“그렇다.”
두툼한 배낭을 창고 안에 넣어둔 천마는 시선을 떨구고 있는 무명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본좌에게 이딴 짓거리를 하려 했다니.”
[사람마다 유머 코드가 다르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장채원의 물음에 무명이 재빨리 대답했다.
[저는 스타 엘리먼트의 미소를 유도하기 위한 최선의 플랜을 짰을 뿐입니다.]
“뭐?”
무명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장채원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장채원은 천마가 손을 까닥거리며 ‘선공하라’라는 말을 했다는 걸 듣자 풉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크크…….”
하얗게 빛나는 스타 엘리먼트의 앞에서 권법 자세를 취하며 진지하게 서 있는 천마를 떠올리자 장채원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겁내 웃기네! 크하하핫!”
[보십시오. 이건 제 계획이 부족한 게 아니라, 천마 님이 개그에 소질이 있는 겁니다.]
무명이 억울한 목소리를 내자 천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표현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무명은 다시 말했다.
[노력은 재능을 이기지 못한다고나 할까요. 한마디 말로 타인의 평온한 감정을 깨뜨리는 천마 님의 재능이 진심으로 부러울 따름입니다.]
“뭐냐, 그 괴상한 칭찬은. 설마 비꼬는 거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라고 말하려던 무명은 천마의 붉은 눈동자를 보자 개그 욕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아뇨. 진심으로 드리는 찬사입니다.]
* * *
부르르릉.
하얗게 물들어 있는 작은 승합차가 도심을 벗어난 어느 작은 마을에 잠시 멈춰 섰다.
마을 주변엔 푸른 산과 아름다운 대나무 숲이 있었고, 집집마다 아름다운 화원을 꾸미고 있었다.
“저곳이로군.”
마을 끝자락에 있는 집 마당에는 인어 모양으로 된 작은 분수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라마스에서 천마가 내리자 현관문이 열리며 휠체어를 탄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인어였다.
“그런데 정말 녹지 않는 바닥재가 있을까요?”
천마는 대답 대신 웃으며 라마스의 트렁크를 열었다.
끼이익.
트렁크 안에는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있는 꿈결조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게… 녹아내리지 않는…….”
“그렇다. 푹신해서 보행감도 상당히 우수할 거다.”
천마는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꿈결조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마루에는 집기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는 도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섬세하고 따스한 붓질로 그려진 유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 사실 저는 화가 일을 하고 있어요.”
그제서야 천마는 인어가 왜 바다로 돌아가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바닷속에선 그림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을 테니.
“그럼 시작하지.”
천마는 가져온 꿈결조각을 바닥에 하나씩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이 꿈결조각은 슬라임처럼 크기와 모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몸을 낮게 웅크린 천마는 쉬지 않고 열심히 꿈결조각을 집 바닥에 붙였다.
처처처척.
체력이 무한이 마르지 않는 기계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꿈결조각을 시공한 천마.
한 시간도 안 되어 집 내부와 화장실, 발코니까지 모두 꿈결조각을 시공하였다.
“과연, 다르군.”
꿈결조각은 흔히 인테리어 바닥재로 시공하는 대리석보다도 훨씬 더 유려하고 깔끔했다.
또한 두툼한 장판처럼 폭신한 감각이 있는 데다 따스함을 머금고 있어, 맨발로 걸어다니는 느낌이 매우 좋았다.
“이게 정말… 불길을 막을 수 있을까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던 인어가 걱정 반 기대 반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마는 손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직접 확인하라.”
인어는 조심스럽게 휠체어에서 일어나 꿈결조각이 깔려 있는 거실을 거닐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순간 엄청난 고열이 투명한 꿈결조각을 뒤덮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꿈결조각은 녹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깨끗해지는 것만 같았다.
“녹지 않아요!”
인어는 폴짝 뛰며 소리쳤다.
“정말 녹지 않아요! 보세요!”
“본좌도 봤다.”
“아아, 우와아아아!”
두 발로 걷는 것이 언제였던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는 인어의 표정은 기쁨의 눈물이 가득했다.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네?”
“거기 앉아서 다리를 내밀어봐라.”
천마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인어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천마에게 발을 내밀었다.
“발, 발은 왜요?”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천마는 남아 있는 꿈결조각을 그녀의 맨발에 대로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주물주물.
한참 동안 주물거린 꿈결조각은 마치 그녀의 발에 딱 맞는 양말 형태로 변해 있었다.
“이건…….”
인어가 부르르 떨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착용하고 다닌다면 어디든 평범하게 걸을 수 있을 거다. 이 꿈결조각은 불에 영향을 아예 받지 않으니까.”
“그, 그렇군요. 정말… 정말로…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인어를 보며 천마는 씩 웃었다.
“갖고 있는 비늘을 모두 본좌에게 주지 않았나. 이 두 조각의 비늘이면 신뢰 두 개를 한 것과 마찬가지의 공력을 얻으니, 서로에게 빚진 것은 없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기쁨을 참지 못한 인어는 천마의 두 손을 꼭 잡으며 결심한 듯 말했다.
“백 년 뒤에 비늘이 또 생기면… 꼭 드릴게요! 약속할게요!
“고마운 제의다만… 그때까지 있을지 모르겠군.”
“아아.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고 했죠.”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인어가 붙잡고 있는 손을 거두려 했다.
‘음?’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인어의 손에선 매우 생소한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그 기운이 천천히 몸을 타고 전해졌다.
순간 뒤통수 부근이 얼얼해지더니, 눈앞의 시야가 흐려졌다.
-천마 님은 항상 저를 구박만 하시는군요.
천마는 눈앞에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사내가 서 있는 환상을 보았다.
바로 마도제일의 두뇌이자,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천마에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대며 대들었던 수하, 마기자였다.
‘왜 저 녀석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르는 건가.’
생소한 느낌이 천마의 머릿속을 스쳐갈 무렵,
-하지만 제 죽음으로 천마 님을 지켜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꽃잎과도 같은 선혈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마기자의 엷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뭐라고?’
그 순간 눈앞의 환상이 안개처럼 사라지며, 마기자가 아닌 인어의 아리따운 얼굴이 다시 보였다.
“괜, 괜찮으세요?”
인어는 눈을 부릅뜬 채 식은땀을 흘리는 천마를 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여러 번 불렀는데… 갑자기 막 땀을 흘리셔서…….”
정신을 차린 천마는 눈을 껌뻑였다.
이제 보니 인어의 엷고 환한 미소는 마기자와 꼭 닮아 있었다.
“본좌는…….”
심호흡을 한 천마는 억지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삼켰다.
아직도 머릿속엔 알 수 없는 기억과 감각이 남아 있지만, 왠지 그것을 음미할 감정도 기분도 들지 않았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럼 시공을 끝냈으니 돌아가겠다.”
천마가 원래의 안색을 되찾자 인어도 다시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네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전에 말했다시피 이 꿈결조각에 대해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설령 들켰다고 해도 본점이 시공했다는 걸 밝혀서도 안 된다.”
“물론이에요. 걱정 마세요.”
인어는 방긋 웃으며 입술을 가리켰다.
“인어들은 입이 무거우니까요. 아…….”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인어가 천마를 보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냐.”
“주안석 말이에요. 그거 효력이 열흘도 채 못 간다는 거… 말씀 안 드렸잖아요.”
사실 인어들이 심해에서 캐는 주안석은 그 효력이 열흘도 가지 않았다.
물론 심해에 사는 인어들은 언제든지 캘 수 있기 때문에 열흘이든 하루든 상관없었지만.
“본좌는 주안석의 효력이 언제까지 간다곤 말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마의 눈 밑은 왠지 까만 그늘이 져 있었다.
“어차피 주안석이라는 것도 흔한 물건도 아니니… 본좌가 대충 둘러대겠다.”
천마는 이 의뢰를 맡기 위해 장채원에게 사기를 친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열흘 후라는 유예기간이 있었으나,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날들이 될 것이다.
“혹, 혹시…….”
현관문을 나서는 천마에게 달려온 인어가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또 주안석을 드리러 가면 안 될까요? 그러면 사장님께서도 조금 화가 풀릴지 몰라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두 눈이 하얗게 뒤집힌 채 입에서 불을 내뿜는 장채원의 모습을 떠올린 천마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생각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