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09화 (209/285)

제209화. 천마, 강추를 사용하다

무명이 긴장된 음성으로 말했다.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몬스터의 숫자는 줄잡아 오백여 마리. 그 기세와 동작을 보건대 마리당 위험도가 천 이상은 되어 보인다.

[천마 님.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때때로 몬스터들은 독특한 패시브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 몬스터들은 색적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개를 돌린 천마는 걸어오는 몬스터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붉게 물든 삼각형의 눈동자가 은신잠형술을 펼친 자신을 또렷이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어쩔 수 없나.”

지이잉.

그때 갑자기 경기장 주변으로 낮은 진동음이 흘리더니 반구형 에너지 결계가 치솟았다.

마치 천마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경기장 내부를 감싼 듯한 모습이다.

[이 던전은… 함정입니다.]

“재밌겠군.”

두 손을 주물럭거린 천마가 사황은형잠행술을 풀어내었다.

그러자 투명해졌던 그의 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마 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제 계산으론 저 몬스터들은 개체당 추정위험도 일천 급의 몬스터입니다. 단순히 계산해도, 위험도 5만의 몬스터 군단이 등장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너는 아직 전투를 모르는구나.”

지지지직.

내공을 끌어올린 듯 천마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치솟았다.

그 빛이 붉지 않은 걸 보니 순수한 내공을 끌어올린 듯하다.

“전투는 숫자 놀음이 아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반드시 둘이 되는 것이 아니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백 마리의 마물이 본좌를 동시에 공격할 순 없단 말이다.”

몸을 낮게 웅크린 천마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적이 많더라도 공격할 수 있는 숫자는 제한적이다.

물론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압사를 시킬 순 있겠지만, 천하무학의 대종사인 천마에게 그러한 전법이 통할 리 없다.

-구오오오오오!

그때 거대한 나팔 소리와 같은 포효와 함께, 입구에 도열해 있던 몬스터들이 경기장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우웅.

동시에 천마의 우리옷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둥그런 광채가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옷의 공능으로 만들어낸 호신강기를 펼친 것이다.

“권마칠식,”

몸을 웅크린 천마가 호흡을 내뱉자, 오른쪽 주먹이 미세하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망아동쇄!”

콰우우우!

일권을 뻗어내자 드릴처럼 회전하는 강력한 권력이 딜려드는 몬스터 무리들을 반으로 갈랐다.

-케에!

하지만 두 조각 난 채 쓰러진 몬스터는 고작 십여 마리에 불과했다.

권법을 거둔 천마의 굵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생각보다 단단하군.”

갑옷 형태의 외피 때문일까?

일 갑자 공력으로 망아동쇄를 펼쳤음에도 몬스터는 고작 열 마리밖에 쓰러뜨리지 못했다.

“마화열극지!”

다시 양손을 겹친 천마가 손가락을 뻗어내자 초록빛 불줄기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치이이익.

검 끝처럼 날카롭게, 때론 채찍처럼 휘어지는 마화열극지는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을 휴지 조각처럼 찢어버렸다.

[대단하십니다, 천마 님!]

무명은 환호성을 질렀다.

마화열극지의 위력이라면, 500마리가 아니라 1000마리의 몬스터라고 해도 단숨에 찢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우. 후우.”

점차 천마의 입에선 이내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마화열극지는 위력은 강하지만 공력을 극심하게 소모시킨다. 장기전에서 사용할 만한 무공이 아닌 것이다.

“좋다. 무초파유초(無招破有招)가 무엇인지 보여주지!”

호기롭게 외친 천마가 양손과 발을 이용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지만, 지극한 무학의 도리가 담긴 교묘한 공격이었다.

펑! 파파팍!

주먹과 발 그림자가 허공에 수놓을 때마다 펑펑 소리와 함께 몬스터들이 수십 미터 밖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은 몬스터가 있는 반면, 공격을 받고도 다시 멀쩡히 일어나는 몬스터도 있었다.

“후우. 후우.”

그 사이 천마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져 갔다.

호기롭게 말은 했으나, 좁은 경기장에 갇힌 채 오백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이 세계에 온 뒤로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손망치 때문에 본원진기까지 뺏긴 상태가 아니었던가?

[천마 님. 차라리 손망치를 쓰는 게 어떻습니까?]

무명의 조언에 천마는 허리춤에 낀 손망치, 강추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컥!”

그 순간 천마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강추를 집은 순간, 몸 안에 유전되고 있던 내공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 것이다.

아직 신보와 결합하지 않은 탓에 강추는 여전히 천마의 힘을 빨아들이기만 하고 있었다.

“정말로… 탐욕스러운 놈이군.”

입가에 핏물을 흘리면서도 미소 지었다.

목숨을 건 전투. 뼈와 살이 타는 고통. 이것이야말로 천마가 그토록 바라던 싸움이 아니었던가?

콰앙! 콰앙! 쿵!

천마의 몸이 희끗 움직일 때마다 몬스터들은 어김없이 몸뚱이가 터져나갔다.

그는 손과 발뿐만 아니라 흉근, 어깨, 등, 팔꿈치, 발가락 등… 온몸을 무기로 사용해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크에에에!

때때로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천마를 둘러싸고 호신강기를 부수려 했다.

그때마다 혈맥이 갈가리 찢어지고 단전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천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금 아쉽군.’

피와 살이 튀는 전투를 펼치면서도 천마는 못내 아쉬움을 느꼈다.

몬스터들은 무학이 통하지 않는다.

혈도도 없으며 교묘한 초식도 필요 없다. 오로지 강력한 힘으로만 파괴할 수 있다.

만약 상대가 몬스터가 아니라 무림의 고수였다면, 천마는 내공 한 올 없이 손쉽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마 님…….]

그저 전투를 지켜봐야 하는 무명은 괴로운 음성을 내었다.

사방이 막힌 에너지 결계에서, 오백 대 일의 싸움.

조언해 줄 말도, 도와줄 수도 없다. 전투는 오직 치열했으며 잔혹스러웠고, 처절했으며 엄숙했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았다.

퍼억. 후두두둑.

장타로 몬스터의 머리통 내부를 터뜨린 것을 끝으로 마침내 전투는 끝이 났다.

“후우. 후우.”

천마는 결국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시꺼먼 오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박살 난 채 널려 있는 모습은 마치 검은 바닷속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쉬리리링.

그때 묘한 진동음과 함께 검게 물든 몬스터의 잔해가 경기장에 서서히 흡수되었다.

다시 깔끔해진 경기장 가운데엔 무언가가 반짝이는 물건이 솟아올랐다. 풀잎피리였다.

[천마 님. 풀잎피리입니다!]

무명은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초록색으로 물든 작은 피리였다.

“그렇군.”

천마는 피리를 집어 들었다.

손에 닿는 순간 사방으로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온전한 상태가 아닌 반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이상하군요. 왜 절반밖에 없을까요.]

천마의 손에 들려 있는 조각난 풀잎피리를 바라보던 무명은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아닐까 다를까.

-크르르르릉.

또다시 경기장이 뒤흔들리더니 입구에서 몬스터들의 그림자가 스윽 드러났다.

[이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를 바라보던 무명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천마 님. 아무래도 저 몬스터 대군을 두 번 처리해야 온전한 풀잎피리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다.”

몬스터의 체액과 핏물을 뒤집어쓴 천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공은 한 올도 모아지지 않았고, 주먹 한 번 내뻗을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천마는 허리를 곧게 폈다.

[천마 님. 제가 탈출 경로를 찾아보겠습니다.]

철커덕.

다양한 센서들을 뽑아낸 무명이 경기장 주변을 조사하려 했다. 하지만 천마가 손을 내저었다.

“본좌는 물러서지 않는다.”

불가능한 전투에서도, 최악의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다.

아니, 죽음과 삶의 경계 사이에 서 있음을 당연시 여겼다.

[천마 님. 굳이 무리해서 몬스터들을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길고 긴 투쟁이 아니었더냐.”

배고픔과의 싸움, 무공과의 싸움, 적과의 싸움, 자신과의 싸움…. 천마는 그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케에에에.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들은 천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한 포효를 내질렀다.

필승을 장담하는 듯한 모습이다.

[천마 님. 잠시 눈을 감고 귀를 막아주세요.]

지쳐 있는 천마를 바라보던 무명이 짤막하게 외쳤다.

[잠시나마, 몬스터들의 동작을 저지하겠습니다.]

-위이이이잉.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무명의 몸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번쩍!

갑자기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더니,

삐이이이!

청각을 마비시키는 고주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비상 무기 중 하나인 음파섬광탄을 사용한 것이다.

-크르르르르.

효과가 있는지, 몬스터들은 저마다 눈과 귀를 가린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을 뜬 천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다. 이런 것은.”

[알고 있습니다.]

무명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다.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천마의 힘을 맹신하고 가변던전을 얕본 것일까?

천만의 말씀.

무명은 이런 상황까지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천마 님. 방금 입수한 반 조각의 풀잎피리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천마는 의아한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군말 없이 품속의 풀잎피리를 내밀었다.

풀잎피리를 받아든 무명은 쭉 메고 있던 작은 보자기를 꺼내었다. 그곳엔 반으로 갈라진 투명한 보석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냐.”

[지금까지 천마 님이 입수하신 던전 재료입니다. 그동안 저는 신보를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 일부라도 결합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히든몬스터 흑동마군의 눈알, 히든몬스터 불신자의 검날, 아이스 글레셔의 발톱, 삼족오의 깃털, 세이렌의 비늘.

무명이 들고 있는 둥그런 덩어리는 지금까지 천마가 입수한 재료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저는 이 불완전한 상태로 손망치와 결합을 시킬 예정이었습니다만, 반 조각의 풀잎피리가 있으니… 확실히 신보의 효과를 가져올 테죠.]

무명은 풀잎피리를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천마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예상했다.

그리고 불완전한 신보 조각이 최후의 수단으로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 결합하겠습니다.]

무명은 들고 있던 풀잎피리를 둥근 보석에 밀어 넣었다.

샤라라라랑.

그러자 하프를 연달아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묘한 빛이 쏟이지더니, 지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되는군요.]

어느새 무명의 손엔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반 조각의 보석이 들려 있었다.

보석을 집어 든 무명은 즉시 천마의 허리춤에 있는 강추의 손잡이에 갖다 대었다.

철컥.

경쾌한 결합음과 함께 반 조각의 보석은 나무 모양의 손잡이 정중앙에 딱 박혔다. 동시에 새하얀 빛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천마 님. 어떻습니까? 망치의 힘이 느껴지십니까?]

반 조각의 보석을 장착했음에도, 강추가 천마에게 힘을 빌려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불완전한 신보라 해도 천마의 힘을 빨아들이는 걸 중단하고, 무기로써의 역할만이라도 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흠.”

빛나는 강추를 집어 들었지만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내공력을 빨아들이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소용없군.”

손망치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반쪽짜리 신보로는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 같다.

지이이잉.

그때, 손망치에서 진동음이 들리더니 손잡이에 박혀 있는 신보에서 붉은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떼레레렝!

동시에 요란한 벨소리가 손망치에서 울려 퍼졌다.

복복 인테리어 매장에 있는 신뢰용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벨소리와 매우 흡사했다.

“이게 뭐냐.”

강추에 부착된 신보에선 계속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마치 ‘버튼을 눌러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화 같은데요…….]

무명이 벙찐 음성으로 말하자, 천마는 무의식중에 반짝이는 신보를 꾹 눌렀다.

-여보세요?

그러자 손망치에서 아주 맑은 여성 안내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신계 전용 서비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천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손망치는 전화기였단 말인가?

“이게 뭐냐.”

황당한 표정으로 망치를 내려다볼 무렵, 무명이 눈 센서를 번뜩이며 말했다.

[천마 님. 제게 맡겨주시겠습니까?]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명이 재빨리 천마의 어깨에 올라타며 말했다.

[지금 대량의 몬스터에게 포위되었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아, 그러셨어요?

여성 상담원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시는 곳 좌표 좀 불러 주시겠어요?

[북위 37° 38′ 동경 127° 13′. 콜로세움 던전 중심부입니다.]

-10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이용하시겠습니까?

무명의 눈 센서가 희미해졌다.

10포인트? 그게 뭐지?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500마리의 몬스터들이 포효를 터트리며 경기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크에에에에에!

톱날처럼 날카로운 치아를 쩍 벌리며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보자 무명이 다급히 외쳤다.

[네! 부탁드립니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데요?

[천, 천마 님. 빨리 이용한다고 대답해 주세요.]

“이용한다.”

천마가 짧게 대답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두두두두.

그 사이 벌떼처럼 달려온 몬스터들이 어느새 천마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했다.

“후읍.”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마는 내식을 조절해 공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몸 안에선 한 방울의 내공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진기가 완전히 메말라 버린 듯 우리옷에서 솟구쳤던 호신강기조차 사라져 있었다.

“…….”

내공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금강지체는 얼마나 유지될까?

오직 근력으로 저 몬스터의 외피를 뚫을 수 있을까? 이를 꽉 깨문 천마가 권법을 펼치려 할 순간,

콰아아아아앙!

갑자기 하늘을 찢어버릴 듯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콰지지지지지직!

수만 가닥의 시퍼런 번개가 몬스터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쿠우우우우! 슈우우우우…….

비처럼 쏟아진 번개는 500마리의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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