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천마, 신보를 구하다
가변던전 지역과 맞닿은 어느 폐건물.
끼익.
굳게 닫힌 옥상의 문이 열리고, 어깨에 무명을 태운 천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찬란한 햇살과 실드 색으로 물든 하늘을 문득 바라보던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그리고 품속에서 귀면탈을 꺼내어 천천히 얼굴에 뒤집어썼다.
순간 전신에 활력이 넘치며 텅 비어 있던 단전에도 서서히 내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천마의 어깨에 매달린 무명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대능력은 쓸 수 없는 겁니까?]
“그렇다.”
요 며칠 동안 던전을 돌아다니며 천마와 무명은 귀면탈이 힘을 증폭시켜 줄 뿐만 아니라, 강추가 빨아들이는 흡력을 막아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밤낮으로 귀면탈을 계속 쓰고 있자, 두 기운이 점차 충돌하였다.
결국 견중유(肩中兪), 곡월(曲垣), 천종(天宗) 등, 등 뒤의 경맥 일부가 꼬이고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부작용으로 인해 천마대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걱정이로군요.]
“빨리 이 녀석을 진정시키면 될 일이다.”
천마는 남의 일처럼 느긋한 모습이었다.
곧 손망치에서 쏟아지는 탐욕스런 기운을 막을 수 있을 터. 그렇게 되면 몸이 원상태로 되돌아올 뿐만 아니라, 맘에 쏙 드는 병기를 얻게 될 테니까.
[그럼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무명이 눈 센서를 가늘게 접으며 말했다.
[풀잎피리는 가변던전 중심부 근처, 콜로세움 던전 근처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위험도조차 측정되지 않은 몬스터들이 득실거리죠.]
가변던전.
세이프던전과 달리, 몬스터 출현 숫자와 활동 범위가 일정치 않은 던전을 뜻한다.
잠시나마 이 지역에 들어왔었던 천마 역시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하군.”
그동안 천마는 가변던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들어갈 때가 되자, 문득 궁금증이 치솟았다.
“가변던전 지역의 몬스터가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어째서 세이프던전 지역으로 넘어오지 않는 건가.”
[던전에서 발생한 몬스터는 활동 범위가 던전 반경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천마의 궁금증이 반가운 듯 무명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예를 들어 가변던전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불스아이(bull’s eye) 던전은 던전 반경 100미터 부근까지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몬스터 출현 숫자는 10마리에서 80마리입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킹스블릿(king’s bullet) 던전은 반경 1킬로까지 몬스터가 돌아다니며, 출현 숫자는 30에서 최대 140마리죠.]
“흠.”
턱을 쓰다듬던 천마가 다시 물었다.
“관부에선 왜 이 위험한 던전 지역을 방치하는 거냐.”
[방치하는 게 아니라 손을 못 쓰는 겁니다. 가변던전 하나를 세이프던전으로 바꾸기 위해선 최소 사단급 수준의 각성자 병력이 필요하거든요.]
무명은 눈 센서를 또르르 굴려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가변던전 공략은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입니다. 또한 최소 사단급의 병력이 만들어져야 공략이 가능하죠. 때문에 협회의 협조 아래 전국에 날고 기는 길드와 랭커들을 모집합니다만,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보니 이게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공략이 완성되어도 실드 설치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설명이 길어지려 하자 천마가 손을 저었다.
“그만, 알겠다.”
[아, 아직 중요한 설명이 남아 있는데… 혹시 천마 님께선 가변던전이 어떻게 세이프던전이 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무명의 은근한 말에 손을 내젓던 천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점은 천마도 오래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었으니까.
“가능한 짧게 설명하라.”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명이 신이 나서 말했다.
[예를 들어 킹스블릿 던전을 공략한다고 하면, 1킬로 반경의 쏟아지는 몬스터를 모두 처리합니다. 그리고 간이 실드를 설치한 다음…….]
“본좌는 던전 공략법이 아니라, 가변던전이 어떻게 세이프던전으로 바뀌는지를 물었다.”
천마가 냉큼 말을 자르자 무명은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던전 코어입니다. 가변던전이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건, 던전 코어가 대부분 두 조각, 혹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던전 내의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를 모두 처리한 후, 숨겨진 던전 코어를 찾아 조각을 합치면 가변던전은 즉시 안정화되고 세이프던전으로 바뀝니다.]
“그렇군.”
그제서야 천마는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그리고 가변던전의 공략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이해했다. 일전에 서유리를 구하기 위해 불스아이 던전을 갔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말씀드려서, 가변던전의 명칭은 대부분 영문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의 수다가 계속되려 하자 천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 이제 출발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끼리릭. 위이잉.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무명의 머리에선 연신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한참 동안 우뚝 서 있던 무명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 천마 님의 몸 상태로는 성공 확률이 30퍼센트도 되지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냐.”
[제 몸엔 사용자의 생체 정보를 수집, 분석할 수 있는 광점분사식 건강진단 시스템(L.V.M.S)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순간 천마의 눈동자에서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본좌의 몸 상태를 멋대로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과거 무명은 천마의 명령을 받고 생체 정보 수집을 던전 지역 내로 제한하였다.
그런데 그사이 멋대로 명령을 어겼단 말인가?
[이 무명의 최우선 임무는 ‘사용자의 안전’입니다. 그 사이, 천마 님은 몇 번이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멋대로 본좌의 명령을 여겼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천마 님의 생체 정보를 24시간 모니터링할 것입니다.]
순간 천마의 눈동자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무림에서 천마대제의 말은 하늘의 뜻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가 내린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으니까.
“계속 본좌의 명령을 어기겠단 말이냐.”
엄숙한 천마의 말에도 무명의 목소리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수집한 모든 정보는 안전하게 보관하며, 절대 다른 이에게 발설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생체 정보 수집을 제한하라는 명령은 거두어주세요.]
충심(忠心).
무명은 그 어떤 인간보다 충성스럽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함께하길 원했고, 혼자 살려 하지 않는다.
과거 금강지체가 깨진 천마가 불스아이 던전에서 깔려 죽을 뻔했을 때, 피하지 않고 함께 최후를 맞이하려던 것처럼.
“흠.”
천마는 잠시 고민했다.
예외를 둘 것인가? 아니면 불관용의 원칙을 고수할 것인가?
그러다 문득 저 손바닥 크기의 둥그런 작은 기계의 모습 속에 마기자의 얼굴이 살짝 비쳤다.
‘이상한 건 이 몸이었나.’
이제 기계에게까지 무림의 인간을 투영하다니.
천마는 헛웃음이 터질 만큼 자신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좋다, 그럼 한 가지 묻지.”
천마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이 고얀 기계를 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이번 임무를 말리지 않았나. 실패할 확률도 높고, 본좌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무명은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태라고 해도, 천마 님은 가셨을 테니까요.]
천마는 천성이 무심한 데다 희로애락을 점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무명은 그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은,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풀잎피리를 재취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천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무명은 무명.
그저 이방인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이 세계에서, 천마를 가장 잘 헤아리는 기계생명체였다.
“좋다. 이번은 넘어가도록 하지.”
무명의 착각이었을까?
사막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음성이었으나, 무명의 귀에는 더 없이 자상하고 너그러이 들렸다.
[감사합니다. 이번 임무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 따윈 필요 없다. 삼 할이라면…….”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 천마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괜찮은 확률이 아니더냐.”
이번엔 무명은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마.
다른 세계에서 온 이 사용자는, 생존 확률이 전무한 최악의 전투를 수없이 반복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의 두려움. 죽음의 공포…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왔을 것이다. 삼 할의 확률이 괜찮게 느껴질 만큼.
[천마 님. 지금부터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목적지인 콜로세움 던전까지 은밀하게 갈 예정이므로 천마 님만 들을 수 있게 음량을 최소한으로 하겠습니다.]
무명의 말에 천마가 다시 한번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식을 조절하자 머리가 맑아지고 막혀 있던 기혈도 조금씩 뚫리는 듯하다. 가변던전의 경계지역을 바라보던 천마는 내공을 서서히 끌어 올렸다.
후욱.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천마의 몸이 햇빛마저 통과할 정도로 투명해지고 있었다.
무림 최고의 은신잠영술, 사황은형잠행을 펼친 것이다.
스으으윽.
경신술을 펼쳐 달려가는 천마의 움직임은 고요한 수면에 머리카락을 띄워놓은 듯했다.
다만 사황은형잠행과 야월극속을 동시에 펼쳤기 때문에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꾸후후후후!
-캬르르르르!
-케에에에!
안개가 낀 경계지역을 벗어나자마자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몬스터들을 신경 쓰지 않고 안쪽으로 진입하자 경계지역에 깔린 안개보다 더욱 짙은 안개가 사방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깨에 매달린 채 사방을 둘러보던 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위험도가 높은 몬스터들이 상당 부분 포진된 상태입니다.]
천마 역시 사방에 많은 몬스터들이 포진되어 있음을 느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는 더욱 은밀하게 신법을 펼쳤다.
[삼백 미터 앞, 작은 연못이 보이는 우측에 보이는 것이 목적지인 콜로세움 던전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볼 수 없는 거리였으나, 매의 시력을 갖고 있는 천마는 연못 앞에 서 있는 웅장한 건물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벽돌을 쌓아 만들어놓은 듯한 타원 모양의 고풍스러운 석재 건물이다.
바로 콜로세움 던전이었다.
[몬스터들이 많군요.]
콜로세움 던전 부근엔 엄청난 숫자의 다양한 몬스터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인간 형태를 하고 있는 악어 몬스터가 곤충처럼 생긴 몬스터를 밟아 죽이고 있었고, 공룡처럼 생긴 거대한 몬스터들이 지나가는 짐승 형태의 몬스터를 잡아먹고 있었다.
‘허어.’
어떻게 보면 진귀한 광경이다.
무림에서 온갖 일을 겪어본 천마로서도 이러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천마 님. 이 틈에 어서 던전으로 들어가시죠.]
무명의 말에 천마는 입맛을 다시고는 콜로세움 던전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탁월한 잠행술 덕택에 몬스터와 조우하지 않고 무사히 콜로세움 던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흠.’
마치 거대한 배수관과 같은 통로가 펼쳐져 있는 던전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내부에 있는 몬스터가 모조리 밖으로 나간 듯 보였다.
[다행이군요.]
“뭐가 말이냐.”
주위를 샅샅이 스캔한 무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콜로세움 던전에 대한 정보는 전무합니다. 행여 몬스터들이 득실거릴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이 던전에 있는 재료를 아는데, 어째서 던전에 관한 정보를 모를 수가 있나.”
천마의 물음에 무명이 둥그런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정보들은 풀잎피리가 서식하는 위치와 조합법뿐입니다. 던전에 대한 상세 정보는 없습니다.]
헤파이토스는 장채원을 위해 던전 재료로 다양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을 무명에게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그 재료가 있는 던전에 대한 정보는 넣어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랬나.”
사정을 짐작한 천마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무명이 말했다.
[풀잎피리는 던전 중심부에 있다고 합니다. 내부 구조를 보니 통로를 따라 올라가면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명의 안내에 따라 통로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니, 거대한 기둥과 아치로 뒤덮인 통로들이 보였다.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자 여러 개의 출입구가 보이더니, 마침내 천장이 뻥 뚫려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 보였다.
던전 이름 그대로, 이곳은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을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호.”
천마는 반가운 탄성을 질렀다.
건축양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만마집궁에 설치해 두었던 중앙 연무대와 그 구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싸울 맛이 나겠군.”
경기장 쪽으로 걸어 내려간 천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정도라면 줄잡아 칠팔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경기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하군요. 구조를 보니 중심부라고 할 곳은 이곳밖에 없는데.]
경기장 부근을 샅샅이 살펴보던 무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반듯한 석재로 만들어진 경기장 내부에는 풀잎피리는커녕, 잡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흠.”
주변을 둘러보던 천마는 둥그런 형태의 경기장 중심부에 섰다. 그 순간,
-크르르르르릉.
갑자기 엄청난 진동과 함께 던전 내부가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으로 퍼져 있는 입구가 열리더니,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게 뭐냐.”
마치 군인들처럼 엄숙하게 걸어 나오는 몬스터들의 형태는 흉측하다 못해 기괴해 보였다.
겉모습은 갑옷을 입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팔과 다리가 모두 네 개였다. 얼굴과 눈매는 모두 삼각형 모양이었고 눈동자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거미와 사마귀, 그리고 인간을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몬스터 도감에도, 제 데이터베이스에도 나와 있지 않은 몬스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