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천마와 대장간 소년 (5)
그 순간 장채원의 눈 밑이 어두워졌다.
“그건 이름 붙이지 마.”
“이놈은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나.”
웅웅웅.
천마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망치에선 낮은 진동음이 퍼져나갔다.
정말 괜찮다라고 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망치를 쥔 천마를 바라보는 지호의 표정의 묘해졌다.
어쩌면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흑로를 이용해 물건을 만들고 연구하는 일은 어쩌면 다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다.
정말로 뜬금없이, 스승의 금제(禁制)가 풀려 버린 것이다.
“으음.”
지호는 탁한 침음을 내었다.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큰 죄를 진 것 같은 느낌이다.
‘망치를 힘으로 들어버렸으니, 고귀한 자가 아니라 힘이 센 자에게 용서를 받은 셈인가.’
지호의 마음을 헤아린 장채원이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헤파이토스 님은 내뱉은 말씀은 지키시는 분이니까.”
“하지만 저분은 인족이 아니잖아요.”
“인족 맞아.”
“저분이 인족이라고요?”
“요괸 줄 알았니?
장채원이 미소 짓자 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 누나와 친척 되시는 분인 줄 알았어요.”
“뭐어? 쟤랑 나랑 어디가 닮았다고?”
“아, 아뇨. 생김새가 아니라…….”
지호는 묘한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두 분이 왠지 비슷한 분위기가 흘러서요.”
헤파이토스의 제자였던 지호.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대지유신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장채원이었다.
지호의 눈에는 천마 역시 그녀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이 더 싫어. 저 위험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 나랑 비슷하다는 거잖아.”
장채원이 인상을 팍 쓸 찰나,
“신기하군. 품속에 넣으면 더 작아지다니.”
천마가 강추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신기하게 품속에 넣으면 은밀히 숨길 수 있도록 크기가 작아졌다. 다시 바깥으로 빼거나 허리춤에 채우면 일반적인 망치의 크기가 되었다.
“갖고 다니기 수월하겠군.”
천마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장채원이 다가와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장채원은 황당한 표정으로 천마에게 다가갔다.
“왜 그걸 네가 갖고 다니려 하는 건데?”
“본좌의 것이잖나.”
“그게 왜 네 거야?”
자연스레 손망치를 뒤 허리춤에 갈무리한 천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본좌가 들었으니 본좌 것이지. 심지어 고귀한 자만이 들 수 있다는 제약까지 있었잖나.”
천마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제약을 푼 것 역시 본좌다.”
“하지만 그게 망치를 주겠다는 말은 아니잖아.”
“무림에도 ‘특정 자격이 있는 자만이 이 병기를 뽑을 수 있다’라는 등의 이야기는 많지.”
팔짱을 낀 천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무기를 뽑은 다음 ‘이걸 뽑았으니 만족한다.’라고 말하고 병기를 두고 간 머저리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군.”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전설의 칼, 엑스칼리버를 힘들게 뽑았더니, ‘어? 이게 뽑히네?’라고 도로 꽂아둘 바보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장채원이 입을 뻐금거릴 무렵, 천마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본좌는 병기 따윌 강탈하는 강도가 아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지호에게 다가섰다.
“본좌의 것이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하라. 앞머리 소년.”
천마의 붉은 눈동자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가득했다.
그것은 상계의 신들에게서나 보이는 막강한 권능이었다.
‘결코 이 망치를 헛되이 쓸 사람이 아냐.’
그제야 지호는 스승이 했던 말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혜와 안목. 그리고 쇠의 소리를 듣는 경지.’
그것은 병기를 만드는 제작자에 국한되는 말이 아니었다.
병기를 사용하는 사용자도 포함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가져가세요.”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지호가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망치는 아저씨 거 맞아요.”
“지호야, 무슨 소리야. 저 망치, 헤파이토스 님 거라면서.”
“맞아요. 스승님이 만드셨죠.”
알 듯 말 듯한 묘한 미소를 머금은 지호가 천마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선택받은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약을 걸었고, 아저씨는 그 제약을 풀었어요. 그리고…….”
천마의 허리춤에 매달린 손망치를 바라보던 지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망치 역시 주인으로 인정했고요.”
한층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듯, 지호는 어두웠던 눈빛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손망치를 든 천마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덕택에 제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아저씨가 아니다.”
다시 팔짱을 낀 천마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좌는 천마다.”
“천마 님이시군요.”
지호는 천마에게 ‘님’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그것은 신계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천마에게 언제나 극존칭을 사용하는 동원과 비슷한 태도였다.
“하지만 망치를 아직 사용할 순 없을 겁니다.”
“사용할 수 없다니.”
“그 망치를 사용하기 위해선 한 가지 물건이 더 필요하니까요.”
지잉.
그 순간 낮은 진동과 함께 천마의 손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흠.”
인상을 찌푸린 천마가 강추를 내려다보았다.
지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이 손망치는 헤파이토스 님이 만든 최고의 신기(神器)입니다.”
흑로에 올려진 손망치를 치켜든 천마를 보며 지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신기는 신력이 있는 신들만 사용할 수 있죠. 인간은 결코 만질 수 없는 물건입니다.”
“본좌는 들고 있다.”
“그건 천마 님의 몸에 신력과 배우 비슷한 줄기의 힘이 있기에 그런 것뿐입니다.”
신력과 비슷한 줄기의 힘.
그것은 내공.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음양이기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천마의 반극진기였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
설명을 이어가는 지호의 눈동자는 대지유신과 같은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신기에서 빨아들이는 힘은 날이 갈수록 강해질 겁니다. 그리고 천마 님의 몸에 깃들어 있는 힘마저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겠죠.”
하지만 천마는 지호의 조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비록 내공이 온전하진 않지만, 반극진기는 천하에서 가장 강력하고 질긴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신기라고 해도, 본좌의 공력은 손망치 따위에 고갈될 만큼 얕지…….”
치이이이.
그때 허리에 두른 손망치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산공분(散功粉)에 중독된 것처럼 내공이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흠.”
천마는 재빨리 반극심법을 운공해 내공을 다시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손망치는 끊임없이 천마의 내공을 빨아들였고, 멀리 내려두어도 원거리에서 내공을 흡수했다.
“사실이로군.”
“망치가 천마 님을 주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공이 딸리기 시작하자, 이젠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 본원진기(本元眞氣)까지 흡수하려 하는 것이다.
“참으로 탐욕스러운 녀석이로고.”
주인의 생명력까지 탐하는 무시무시한 병기를 보고도 천마는 오히려 기쁜 듯이 혀를 할짝거렸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군.”
“네?”
“무릇 병기라는 건 집요함과 포악스러운 맛이 있어야 하지.”
내공을 빨아들이든 말든 천마는 다시 손망치를 허리춤에 넣었다.
그리고 지호를 빤히 내려다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원인을 안다면, 해결책도 알고 있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지호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마 님께서 이 망치를 몸에 지니고 계시려면, ‘신보(神寶)’를 얻으셔야 할 겁니다.”
“신보?”
“그렇습니다. 신의 권능이 담긴 보석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인간도 신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죠.”
“간단한 해결 방법이로군.”
천마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짓자, 지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신보는 이제 인세에는 없으니까요.”
“어째서.”
깊은숨을 내쉰 지호가 짧게 대답했다.
“제가 겪었던 것처럼… 인간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그 한마디로 모든 대답이 되었다.
일본에서 겪은 지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천마는 누구보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이 망치는 어차피 본좌의 것이 아니었군.”
“그렇진 않습니다.”
고개를 돌린 지호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장채원을 바라보았다.
“천마 님 곁엔 채원 누나가 계시잖아요?”
“나?”
묵묵히 듣고 있던 장채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보? 그런 걸 왜 구해?”
귀를 후비적거리는 그녀의 이마 위엔 대문짝만하게 ‘귀찮아’라고 쓰여 있었다.
“망치 같은 건 창고에 많잖아. 그냥 도로 돌려주는 게 어때?”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군.”
“그래? 그럼 빨리 돌려주고 가자.”
장채원이 몸을 돌리려 하자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순 없다.”
“왜?”
천마의 시선은 손망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녀석이 본좌의 본원진기, 즉 원정지기를 갉아먹곤 다시 토해내지 않는다.”
“뭐? 그게 뭔데?”
“쉽게 말해 본좌의 힘을 뺏고 다시 돌려주지 않고 있다.”
잠시 대장간 내부엔 정적이 흘렀다.
후우 하며 한숨을 내쉰 장채원이 지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도로 달라고 할 순 없어?”
“네. 천마 님을 주인으로 인식하고, 몸에 내재된 힘을 공유하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으음.”
장채원이 한숨을 쉬자 천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 녀석이 힘을 다시 토해내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본좌가 고생한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토해낸다는 개념이 아니라 공유하는 개념입니다.”
지호는 천마의 허리춤에 꽂힌 손망치를 찬찬히 쓸어보았다.
“만약 천마 님께서 이 신기를 완벽히 지배한다면 숨겨진 힘을 끌어낼 수도 있을 거고요.”
“안 돼, 역시 안 되겠어.”
팔짱을 낀 채 고민하고 있던 장채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힘이 남아도는 스타일이야. 그런데 이런 망치를 가지고 있음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지호는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남용하지 않으실 거예요. 평생 가지고 있어도 사용하는 건 다섯 번도 안 될 테니까요.”
“그 사이 점쟁이가 된 거니?”
“그냥 느낌이 그래요.”
지호의 말에도 장채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안 돼. 난 싫어.”
“거절하겠다는 것이군.”
단도직입적인 천마의 물음에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아무래도 이건 네가 갖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닌 것 같아.”
“알겠다.”
의외로 천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주는 거야?”
천마는 장채원이 아닌 지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네 스승은 어디 있나.”
“헤파이토스 님을? 왜?”
“점주는 빠져라. 이건 본좌의 일이니.”
또다시 장채원이 앞으로 나서자, 천마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다. 손망치를 만들었으니, 손망치로 인해 발생된 문제쯤은 해결할 수 있겠지.”
반론의 여지 없이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장채원은 택도 아닌 소리를 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천마, 네가 무슨 수로 헤파이토스 님을 찾아가게?”
“이곳엔 하루 만에 이역만리 타국에 갈 수 있는 운송 수단이 있잖나.”
“헤파이토스 님이 아무 때나 찾아가도 반겨주는 편의점 직원인 줄 알아? 찾아간다고 만나주실 분이 아니라고.”
장채원의 핀잔을 들은 천마는 오히려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만나주질 않으면 찾아오게 하면 되지.”
“무슨 수로?”
“다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저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은 자는 다름 아닌 천마다. 상계의 신에게 깽판을 치는 일도 가능할 것만 같다.
“좋, 좋아.”
이마를 짚은 장채원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정도 각오라면 어쩔 수 없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던 그녀가 끝내 해결책을 내놓았다.
“알려줄게.”
“무슨 말이냐.”
“똑같진 않지만…….”
창고를 슬쩍 바라본 장채원이 긴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던전 재료를 조합해서 신보를 만들 수 있어.”
* * *
며칠 후.
복복 인테리어 창고 뒤편, 던전으로 가는 비밀통로 앞.
천마는 손망치를 허리춤에 꽂은 채 비밀통로의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장채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다.”
천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채원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요 며칠 동안 천마는 신보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구하러 던전에 연신 출입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구해야 할 재료, ‘풀잎피리’를 얻기 위해 그는 가변던전 지역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것도 위험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는 가변던전, 콜로세움(Colosseum)으로 말이다.
“그쪽은 아직 협회에서도 손조차 못 대는 지역이야.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돌아와. 알겠지?”
“알겠다.”
매장 뒤편, 비밀통로의 문을 연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천마의 그림자는 이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아아, 저 녀석.”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이마에 손을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영 안 좋은 거 같은데.”
평소와 달리 붉게 타오르는 눈빛이 가라앉아 있고, 안색도 창백해 보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녀는 천마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마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 원정지기(元精之氣)를 신기가 가져간 탓이었지만.
“뭐, 괜찮겠지.”
말은 그렇게 해도 왠지 불안한 느낌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느낌은 없었는데…….
“아냐, 아냐.”
애써 고개를 흔든 그녀가 힘있게 말했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천마니까.”
천마. 어느새 장채원도 그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