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05화 (205/285)

제205화. 천마와 대장간 소년 (3)

[지호 님.]

다시 망치질을 하고 있는 지호를 바라보며 이번엔 무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 한국에 오신 겁니까?]

땅땅땅.

하지만 지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망치질을 할 뿐이었다.

툭.

대답 대신 쥐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은 지호는 다시 뒤집개를 천마에게 내밀었다.

이번에 내민 뒤집개는 날 끝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버려져 있었다. 생선 머리가 아니라 돌도 잘라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 되었습니다.”

“흠.”

뒤집개를 유심히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날카롭군.”

“뭐라고요?”

“이래 가지곤 도마도 썰리겠다.”

“방금 전까진 날이 너무 무디다고 했을 텐데요?”

“본좌는 생선 머리를 자를 조리도구를 원했지, 날이 선 칼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

천마는 들고 있던 뒤집개를 다시 내밀었다.

“마음에 안 든다. 다시.”

부글부글.

지호의 눈동자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결국 인내심이 폭발한 듯 지호가 뒤집개를 바닥에 내던졌다.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나가세요.”

“환불?”

천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웃었다.

“물건에 자신이 없으니 돈으로 무마하겠다는 건가.”

“물건에 자신이 없다고요?”

지호는 잇몸을 드러내며 외쳤다.

“계속 억지를 부리고 있잖아요! 뒤집개 모양이 맘에 안 든다는 둥, 이걸로 생선을 썰어야 한다는 둥! 뒤집개는 뒤집개일 뿐인데!”

“뒤집개는 뒤집개일 뿐이라…….”

천마는 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자가 어째서 지금까지 억지를 부리고 있나.”

“무슨 소리죠.”

“점주와 무명을 외면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위로해 주길 바라고 있잖나.”

지호를 내려다보는 천마의 입가엔 비웃음이 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아닌가?”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시죠.”

보다 못한 장채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마, 그만해. 이제 됐어.”

“아니라고 말하고 싶나? 걱정하는 걸 원치 않나? 그렇다면 아무렇지 않은 척, 아는 척을 하고 대충 둘러대면 끝날 일이었다.”

지호는 움찔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충 둘러대면 끝날 일이었다.

사실이다.

만약 관심조차 받길 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사연 있는 척, 차갑게 외면할 필요가 없었다.

천마는 엄숙한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네놈은 오히려 온갖 사연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대화를 외면했지. 그건 남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사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신랄한 천마의 말에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 지호야.”

장채원은 지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걱정되었을 뿐이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별일은 없어요.”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역시나 무언가 사연이 녹아 있는 듯하다.

장채원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할 순 없다.

“알았어. 미안해. 그럼 갈게.”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장채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알겠지?”

진심이 통한 것일까?

상냥함이 머물러 있는 장채원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지호 역시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별일 없어요.”

“그래. 미안.”

메마른 미소를 머금은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일 무렵, 무언가를 살펴보던 천마가 턱을 쓰다듬었다.

“역시 그런 거였나.”

“무슨 말이야?”

장채원의 말에 천마가 픽 웃으며 대장간을 가리켰다.

“이 앞머리 소년 말이다.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화로를 쓰지 않더군.”

“뭐?”

“이 뒤집개도 쇳덩이를 때려 모양을 잡아 만든 것이지. 봐라, 어디에도 화로가 없지 않나.”

대장간을 유심히 바라보던 장채원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천마의 말대로 대장간에는 화로 자체가 없던 것이다.

“어? 그러고 보니 왜 신로(神爐)가 없지?”

헤파이토스는 제자들에게 모든 금속을 자유자재로 녹일 수 있는 신로를 각각 만들어주었다.

특히 자신의 진전을 이어받을 만한 자질을 가진 지호에게는 특별히 흑로(黑爐)라 불리는 신묘한 화로를 선물해 준 터였다.

“본좌가 정곡을 찔렀나 보군.”

지호가 놀란 표정을 짓자, 팔짱을 낀 천마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않나, 앞머리 소년?”

“설마, 잃어버린 거야? 그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이쯤 되자 지호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몸을 돌려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세워진 막대기 하나를 제꼈다.

달칵. 기이이잉.

그러자 한쪽 벽이 열리며 불을 피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검은빛 광택이 흐르는 작은 화로대가 보였다. 지호의 전용 신로인, 흑로였다.

“저는 앞으로 평생 동안 담금질을 못 하게 되었어요.”

“뭐?”

“저걸 보세요.”

지호는 흑로 위에 놓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장채원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흑로와 색깔이 거의 비슷한 작은 손망치였다.

“손망치?”

“스승님께서 죽어가는 별의 심장으로 직접 만드신 망치예요.”

‘죽어가는 별의 심장으로 만든 망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은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손망치를 볼 때마디 왠지 근육질을 가진 금발 남성이 떠오른다.

“헤파이토스 님이 만든 망치라고? 근데 그런 걸 왜 흑로에 올려둔 건데?”

장채원의 질문에 지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병기를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건…….”

잠시 망설이던 지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대청마루에 서 있던 무명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나가 있을까요?]

눈치를 보던 무명이 앞으로 나서자 지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괜찮아.”

[지호 님. 곤란하신 이야기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명은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며 힘 있게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든 저희는 지호 님 편이니까요.]

-무슨 사정이 있든 너의 편이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위로를 받을 것이다.

무명의 말을 들은 지호 역시 큰 감동을 받았으니까.

“여전하구나, 너는.”

지호는 툭 하고 웃음을 던졌다.

저 수다스럽고 말 잘하는 나노봇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를 가진 장채원도.

늘 그랬듯이 관심과 염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심호흡을 한 지호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그동안 스승님의 명을 받고 전 세계를 돌며 작은 대장간을 열었죠.”

흐릿한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을 응시하던 지호의 눈엔 고통스런 빛이 흘렀다.

“그리고 일본에 있을 때였어요.”

1년 전.

헤파이토스는 어린 제자, 지호에게 전 세계를 떠돌며 각지의 금속을 다루도록 지시했다.

대장장이로서의 지호의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탓에, 여러 가지 기술을 빨리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헤파이토스는 가끔씩 방문해 지호가 만든 물건들을 평가해 주거나 기술을 전수했다.

일본, 어느 작은 현의 대장간.

도심과 약간 멀리 떨어진 이 대장간에서 지호는 다양한 주방용품을 만들었다. 밤에는 스승님이 가르쳐준 기술을 연구하였다.

그런데 화창한 어느 날 오후, 누군가가 대장간으로 찾아왔다.

“혹시 카타나(刀:일본도)도 연마가 가능할까요?”

“카타나요?”

지호가 고개를 들자, 일본도를 들고 있는 한 소녀를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열네다섯쯤 되었을까?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시기의 앳된 소녀가, 너덜너덜한 나노슈트를 입은 채 힘겹게 서 있다.

“단분자 커터를 사기엔 돈이 없어서요.”

지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소녀는 일본도를 바라보며 민망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반 병기로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날이 많이 손상되어서… 벨 수가 없네요.”

“그러셨군요.”

일본은 각성자라면 나이 제한이 없이 누구나 던전에 출입한다.

심지어 유치원생이라도 각성만 발현되었다면 던전에 출입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세계 각성자협회에선 일본을 맹비난하며 법 개정을 권유한 적도 있었다.

“비용은 드릴게요. 부탁드려요.”

잠시 고민하던 지호의 귓가에 인자한 스승님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병기에 손을 대선 안 된다.

스승, 헤파이토스가 지호에게 버릇처럼 한 말이다.

병기를 만들고 다루기 위해서는 기술뿐만 아니라 높은 안목과 지혜, 그리고 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

지호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엄하신 스승님의 당부였기에 병기엔 절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지금 스승님께선 자리에 안 계시는데…….”

완곡한 거절의 말이다. 그러자 소녀가 간곡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괜찮아요. 대충 갈아주시기만 해도 돼요.”

“제, 제가 만지다 날이 손상될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모든 건 제가 책임질 테니… 안 될까요?”

소녀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고, 착용한 나노슈트의 보호대 부분은 거의 망가져 있었다.

한창 웃고 즐길 나이에 목숨을 걸고 던전에 나가는 소녀의 모습을 보자 지호는 마음이 약해졌다.

‘뭐,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날만 갈아주는 건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지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날만 갈아 드릴게요.”

며칠 후.

일전에 일본도 연마를 부탁했던 각성자 소녀가 다시 대장간을 찾아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방긋 웃은 소녀가 내민 바구니에는 유명 파티시에가 만든 과자와 케이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칼을 갈아주신 이후로, 엄청나게 몬스터를 잡기 편해졌어요!”

“그러셨나요?”

“네에. 왠지 가벼워진 것 같고 더 잘 베어지더라고요!”

지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실 그는 단순히 연마만 해준 것이 아니라 무너진 칼의 균형과 무게중심을 다시 맞춰준 터였다.

“혼자 던전으로 가시는 건가요?”

“네. 솔로라서요.”

지호는 지쳐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을 꾸려서 다니시면, 조금 더 안전하고 편하게 던전을 다닐 수 있으시지 않을까요.”

“고아인데다 장애인 각성자를 누가 써줄까요. 그저 짐만 될 텐데.”

“네?”

“사실 염동력 스킬로 움직이는 거예요. 이 다리.”

자신의 왼쪽 다리를 가리킨 소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전에 몬스터와 싸우다가 다쳐서 인대와 신경이 많이 손상됐거든요. 다행히 제 스킬이 염동력이라…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어요. 허접한 F급 스킬이긴 하지만요.”

티 없이 웃는 소녀를 보자 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이 소녀는,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굳이 던전에 들어가는 걸까?

왜 부상을 당하고도 다시 칼을 들고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걸까?

“각성이 발현되면, 혜택과 지원이 끊겨요. 자립금도 못 받고 보육원에서도 나가야 하죠.”

소녀는 지호의 마음을 간파한 듯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한마디로 각성이 발현된 이상, 던전으로 즉시 가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다는 거죠.”

일본은 각성자에겐 복지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게다가 일본에 발생된 던전들은 척박하고 던전 재료들은 거의 없다.

돈이 되는 건 몬스터 유물밖에 없는 탓에, 각성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기를 들고 던전을 공략해야만 했다.

“그랬군요.”

지호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닌걸요.”

소녀는 씩씩하게 웃으며 허리에 착용한 일본도를 가리켰다.

“아직 혼자서도 쏠쏠하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는 많으니까요.”

소녀의 환한 모습에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미소를 지었다.

한 달 후.

일찍 대장간의 문을 닫은 지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시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함. 오랜만에 목욕탕에 가서 뜨끈하게 지져야겠다.”

일본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대중목욕탕이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비록 신의 제자가 되어 나이를 먹지 않은 상태로 세계를 돌아다니지만, 지호는 뼛속까지 한국인.

스트레스를 받으면 얼큰한 음식을 먹고, 피곤하면 뜨끈한 곳에 몸을 지졌다.

“어?”

고갯길을 지나던 지호는 눈을 깜빡였다.

저 멀리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일본도를 허리에 매고 있는 소녀였다.

“어쩐 일로 이 시간에…….”

반갑게 웃던 지호는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보자 미소가 얼어붙었다.

온전해야 할 팔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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