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04화 (204/285)

제204화. 천마와 대장간 소년 (2)

청년, 아니 소년이라고 해야 할까?

깡마른 몸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앞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길렀다.

거기다 느릿하게 움직인 탓에 어두운 매장 풍경과 맞물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

고은진은 활짝 웃으며 소년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안녕하십니까?”

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소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친절한 미소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낯빛이다.

그러든 말든 고은진은 밝은 목소리로 두 손을 모았다.

“제가 포차에서 쓸 쟁반이랑 뒤집개가 필요한데… 구매할 수 있습니까?”

“한 달에 한 번, 한 개씩만 구매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해서 말입니다. 두 개 동시에 팔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고은진의 부탁에도 소년은 덤덤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괴상한 상점이로군. 손님이 물건을 산다는데 팔지 않겠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천마가 소년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배가 부른 건가.”

그 말에 소년의 가려진 앞머리에서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는 듯했다.

천마의 중얼거림에 분명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나가시죠. 그쪽에겐 물건 안 팔겠습니다.”

“흠, 목소리는 나쁘지 않군.”

소년의 무례한 말투에도 천마가 피식 웃었다.

“옹알거리는 소리가 본좌의 귀에 또렷이 박히는 걸 보면.”

“나가 주셨음 하는데요.”

“대체로 손재주가 좋은 장인들은 성격이 더럽고 남의 말을 잘 안 듣지.”

“나가주세요.”

문전박대 하는 소년의 태도에도 천마는 팔짱을 낀 채 떠벌떠벌 혼잣말을 시작했다.

“본좌는 솜씨 좋은 장인들을 우대한다. 까탈스럽긴 해도, 손재주가 좋은 장인을 구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말을 이어가던 천마는 오른쪽 어깨에 기묘한 떨림을 감지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명이 손가락을 앞으로 내민 채 살짝 떨고 있었다.

“뭘 하는 거냐.”

이상함을 느낀 천마의 물음에 무명은 눈 센서를 조였다 넓혔다를 반복했다.

[저, 저. 아무래도 낯이 익은데…….]

머릿속에서 끼리릭 소리를 내던 무명이 조심스레 말을 하려는 순간,

달카닥.

또다시 상점의 문이 열리며 헐떡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헉. 대체 왜 이리 구석진 곳까지 들어온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반묶음 머리에 정장을 입고 있는 묘령의 여성이 보였다.

장채원이었다.

“계속 연락이 안 돼서 위치추적으로 한참을 찾았잖아, 무명! 넌 왜 전화 안 받아?”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천마 위에 있는 무명을 툭 치며 말했다.

“뭐 해, 내 말 안 들려? 어? 뭐야, 은진 씨도 있었네요?”

“잠깐 쇼핑 왔지 말입니다.”

고은진의 대답에 방긋 웃던 장채원은 그제서야 맞은편 카운터에 서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 사장님이신가 보다.”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려던 장채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

장채원의 행동은 천마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무명의 모습과 꾹 닮아 있었다.

“뭐냐. 아는 사인가?”

장채원과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던 천마가 눈을 껌뻑일 찰나,

“모두 나가세요!”

갑자기 몸을 홱 돌린 소년이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오늘은 영업 안 합니다.”

“어? 저 아직 물건 안 샀지 말입니다.”

놀란 고은진이 펄쩍 뛰며 뒤집개를 가리키는 순간,

“지호?”

장채원은 재빨리 카운터 안쪽 통로로 돌아가던 소년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 지호가 맞지?”

“…….”

“네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장채원의 물음에 소년은 석상이 된 것처럼 몸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지호 님!]

갑자기 천마의 어깨에 있던 무명이 풀쩍 뛰어올라, 소년의 맞은편에 우뚝 섰다.

[역시 지호 님이 맞으시군요!]

무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자 소년은 살짝 몸을 돌렸다.

그러다 반짝이는 무명의 눈 센서를 발견한 소년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엑스?”

그러자 무명이 양팔을 벌리며 폴짝폴짝 뛰었다.

[맞습니다. 지호 님께서 자주자주 놀아주셨던 엑스예요.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대체 뭘 하는 거냐.”

무명의 태도를 바라보던 천마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와 말했다.

“엑스? 그 개똥 같은 이름은 뭐냐.”

화가 난 천마의 눈빛을 마주한 무명은 그제서야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당시엔 제겐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음성인식이 가장 잘 되는 단어인 엑스(X)로 불리고 있었죠.]

몸을 돌린 무명은 소년에게 자랑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제 이름은 무명입니다. 여기 계신 저의 사용자, 천마 님께서 지어주셨죠.]

“무명?”

멍한 표정으로 무명을 바라보던 소년은,

“지호야.”

장채원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대장장이가 대장간을 연 게 이상한 건가요?”

“뭐어?”

“오늘 영업 끝났습니다.”

카운터 뒤에 설치된 출입문을 가리킨 소년이 차갑게 말했다.

“모두 나가주세요.”

“지호야. 너 정말…….”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하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줄곧 서 있던 고은진이 매대에 놓인 뒤집개를 가리켰다.

“문 닫으시기 전에 이 뒤집개라도 팔아주십쇼. 제발 부탁입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부탁했다.

“내일 포차에서 꼭 써야 하는 거라서 말입니다.”

“그냥 가져가세요.”

소년은 천마 일행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매장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세차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천마에게 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상황은 뭔데?”

“본좌가 묻고 싶은 말이다, 점주.”

천마는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것마냥 안절부절못하는 무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체 저 앞머리 소년의 정체가 뭐냐.”

* * *

도매시장 내부, 어느 건물 커피숍.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장채원이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헤파이토스 님.”

깊은 한숨을 들이쉰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천마와 고은진을 향해 말했다.

“지호는 그분의 제자야.”

그 한마디에 천마는 모든 걸 이해했다.

무명을 창조했다는 상계신 헤파이토스. 그 신의 제자라면 당연히 장채원과 무명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잠, 잠깐만. 헤파이토스 님 말입니까?”

그런데 옆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고은진이 펄쩍 뛰었다.

“상계신님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금속세공의 신, 헤파이토스 님의 제자라고요?”

“맞아요.”

“어쩐지.”

그제서야 고은진은 상점에 팔고 있던 주방용품이 왜 그토록 질이 좋은지를 알 수 있었다.

“헤파이토스 님의 제자분이 왜 저런 허름한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겁니까?”

고은진의 물음에 장채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지호의 차갑게 가라앉는 눈동자를 떠올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웃고 있어서, 속을 알 수 없지만… 저렇게 차가운 아이는 아니었는데.”

[분명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무명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헤파이토스 님에게 직접 연락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헤파이토스 님에게 직접 연락을 한다고?”

커피를 마시려던 고은진이 깜짝 놀라 마른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고은진은 까무러칠 만큼 놀랄 지경이었다.

상계의 신들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존재인 헤파이토스를 배달원 호출하듯 연락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무슨 수로?”

“장채원 님이 연락하시면 금방 답이 오시겠죠.”

고은진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장채원이 상계의 신들과 안면이 퍽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헤파이토스와 같은 거물과 당장 연락을 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슨 수로 상계의 신님에게 연락을 한다는 거야?”

[헤파이토스 님은 오래전부터 지상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 계실지 모르겠지만요.]

“이탈리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저를 그곳에서 만들어주셨으니까요.]

“뭐어?”

고은진이 연신 놀라며 입을 벌리자, 장채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명을 만들어주신 분이 바로 헤파이토스 님이세요.”

고은진은 그동안 머릿속에 품고 있던 또 하나의 의문이 풀렸다.

무명은 일반 기성품 나노봇과 완전히 달랐다. 혼을 쏙 빼는 말재주와 상식을 벗어난 지능과 기능…….

심지어 인간보다도 더 인간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 헤파이토스 님에게 사장님께 직접 나노봇을 판매하신 거예요?”

“아, 아뇨. 제가 워낙 던전을 싫어해서, 제 생일선물로…….”

“생, 생일선물이요?”

“네. 익살스러운 무명과 같이 다니면 던전이 조금 더 즐거워지지 않겠냐고 하시면서요. 물론 거의 안 들어갔지만요.”

터억.

장채원을 바라보는 고은진의 턱은 배꼽까지 늘어질 지경이었다.

소규모 영지인, 복복 인테리어 매장을 운영하며 하루하루 일에 치이며 사는 장채원.

그런 그녀가 상계의 신 헤파이토스가 생일선물로 기계생명체를 창조해서 만들어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천마가 불쑥 나섰다.

“제자의 허물을 스승에게 연락해 직접 물어본다고? 그건 두 사람을 모두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팔짱을 낀 천마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은 제자의 허물을 감쌀 수도, 따끔히 벌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제 간에 벌어진 일을 타인이 캐묻는 건 강호의 도리가 아니다.”

“으음.”

가만히 듣고 있던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맞는 말이긴 하네.”

[그렇다고 지호 님 같은 분이 도매시장 뒷골목 허름한 곳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보실 겁니까.]

무명의 말에 장채원의 눈매가 다시 가늘어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호의 눈동자엔 우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분명 말 못 할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울 일이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돕고 싶었다.

“하지만 너도 봤잖아. 날 피하는 걸. 그렇다고 억지로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고.”

“명분이 없다는 것이군.”

장채원의 말에 천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본좌가 해결해 주겠다.”

“무슨 수로? 설마 상점 문에 대고 어류겐 날리려고?”

“그럴 리가 있나.”

몸을 일으킨 천마는 씩 웃으며 고은진에게 팔을 벌렸다.

“회색 눈깔. 아까 대장간에서 가져왔던 뒤집개를 본좌에게 줘라.”

간판도 없고 건물 외부는 모두 시꺼먼 광택이 흐르는 금속으로 되어 있다.

이 투박한 상점은, 도매시장 상점 골목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문을 열면 쇠로 만든 온갖 제품들이 진열된 매대들이 보인다.

그리고 카운터를 지나 설치된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공구들과 쇠가 쌓여 있는 커다란 대장간이 있다.

그리고 대장간 맞은편에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한옥집이 있었다.

땅땅땅. 지이이잉.

망치질을 하던 지호는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뒤집개를 유리처럼 연마하기 시작했다.

-뒤집개가 불량이다. 너무 무르군.

고은진이 사 온 뒤집개를 휴지처럼 구부린 천마의 말이었다.

대장간 소년, 지호는 말없이 천마를 노려보더니 다시 뒤집개를 녹여 수리를 해주고 있던 것이다.

“지호야.”

장채원은 열심히 뒤집개 모양을 만드는 지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

“다음에요.”

어딘가 모르게 감정이 배제되어 있는 목소리다.

장채원이 말을 잇지 못하자 지호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음.”

완성된 뒤집개를 바라보던 지호는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천마 일행에게 내밀었다.

“다 되었습니다.”

“아, 네.”

자리에서 일어난 고은진이 뒤집개에 손을 뻗으려고 하는 순간,

“잠깐. 본좌가 한번 다시 보지.”

천마가 앞으로 나서 뒤집개를 받아들더니 연신 허공에 비쳐 보았다.

흐린 하늘에 반사된 뒤집개는 매끈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날 끝이 너무 무디군.”

어디 하나 완벽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건만 천마는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이래 가지곤 생선 머리 하나도 자를 수 없겠어.”

“뒤집개로 왜 생선을 썰죠?”

“요리하다 보면 썰 수도 있지. 모든 일이 그렇듯, 융통성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피식 웃은 천마는 다시 뒤집개를 지호에게 내밀었다.

“마음에 안 든다. 다시 손질해라.”

“…….”

“싫은가?”

천마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에 책임도 지지 않는 형편없는 대장장이였군.”

빠직.

지호의 눈빛에 레이저 광선이 쏟아지는 듯했다.

천마를 뜨겁게 노려보던 지호는 이를 악물고 다시 뒤집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계속 진상 작전으로 가는 거냐?’

장채원이 천마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이것이 바로 천마가 지호를 다시 불러낸 ‘명분’이었다.

-대장장이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자신의 물건에 흠이 있는 걸 용납하지 않지.

커피숍에서 고은진에게 뒤집개를 받아든 천마가 뒤집개 손잡이를 찌부러뜨리며 한 말이다.

-모든 장사에는 사후 관리 서비스(AS)가 기본이 아니냐.

천마는 지호와 대화할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AS를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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