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천마와 대장간 소년 (1)
“인기가 많다니.”
[스킬이 딸리는 각성자들은 무기로 그 차이를 메꿔야 하니까요. 하지만 던전용 병기는 나노슈트에 비할 수 없이 비싸거든요.]
모처럼 호기심의 눈빛을 반짝인 천마가 무기상점으로 향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무림에서 흔히 보이는 병기들 대신 이상한 돌멩이나 혹은 막대기가 있었다.
던전 재료들로 만든 마도구, 접이식 단분자 커터, 혹은 초고열의 플라즈마 빔을 사출하는 플라즈마 블레이드까지.
“가격이 미쳤군.”
무기들 옆에 표시된 홀로그램 가격표를 응시하던 천마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검형 단분자 커터가 3백만 원. 장검형 단분자 커터나 플라즈마 블레이드는 천만 원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억대가 가까운 가격이 적혀진 무기도 있었다.
[그나마 장물이라서 50% 이상 저렴한 가격인 겁니다. 대신 상태는 보증할 수 없지요.]
천마는 매의 눈으로 병기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딱히 눈이 가는 물건도, 마음에 드는 것도 없었다. 천마에게 병기라는 건 뜻대로 움직여야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울림이 느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으음.”
천마는 손끝으로 단분자 커터 손잡이에 손가락을 살짝 대보았다.
우웅.
단분자 커터 특유의 진동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영혼의 울림은 아니었다.
다시 매대를 살펴보던 천마는 이번엔 매대 가장 깊숙한 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은 플라즈마 블레이드 앞으로 다가갔다.
[초소형 플라즈마 블레이드입니다. 무게가 가볍고 원하는 모양대로 사출할 수 있는 최신기종이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싸죠.]
무명의 설명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격표에는 ‘가격 상담’이라고 적혀 있었다.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라.”
그건 무인들이 꿈에도 바라는 무기일 것이다.
게다가 블레이드 손잡이 형태가 문양이 매우 독특한 탓에 천마는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
‘내공을 주입해 볼까.’
무림에서 병기에 내공을 주입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진기를 끌어올린 천마는 손끝을 이용해 플라즈마 블레이드에 주입시켰다.
지지지직. 피융.
갑자기 강렬한 전기가 뿜어나오더니 블레이드 손잡이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플라즈마 병기 내부의 핵심 부품이라 할 수 있는 액화수소 셀과 플라즈마 배터리가 파괴된 것이다.
“어? 웬 연기가…….”
놀란 상점 주인이 달려와 천마 앞에 있는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살펴보았다.
“으어, 3억짜리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매캐한 연기를 피워내는 블레이드를 집어 든 주인이 천마를 보며 펄쩍 뛰었다.
“이 블레이드가 왜 이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본좌는 손끝만 살짝 대어 봤을 뿐이다.”
“웃기지 마. 그냥 살펴봤는데 이 튼튼한 블레이드가 왜 망가져!”
“그걸 왜 본좌에게 묻나.”
씩씩거린 상점 주인은 내부에 있는 CCTV를 가리켰다.
“흥, 이 비싼 걸, 아무렇게나 전시해 둔 줄 알아?”
기세등등하게 소리친 주인은 재빨리 휴대폰에 연결된 내부 CCTV를 돌려보았다.
“어, 어라…….”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상점 주인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었다.
화면 속의 천마는 말 그대로, 손끝으로 블레이드 손잡이 부분을 살짝 매만진 것뿐이다.
실제로는 일 갑자에 달하는 강력한 반극진기를 정밀한 구조의 플라즈마 블레이드에 모조리 쏟아부은 것이지만.
“이, 이게 대체…….”
화면을 바라보던 주인은 당혹감에 얼굴을 붉혔다.
이 튼튼한 플라즈마 병기가 왜 갑자기 고장 난 거지?
“확인됐으니 본좌는 가도 되겠나.”
천마가 몸을 돌리자 주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여기 물건들은 상태가 안 좋네.
-역시 이런 곳은 복불복이라니까.
-뒷거래 상점은 싼 맛에 오는 거야.
천마가 나가자 갑자기 구경하던 손님들이 우르르 빠졌다.
블레이드를 매만지던 상점 주인은 당황하며 입을 뻥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 전 재산을 털어 플라즈마 병기들을 산 건데!”
텅 빈 상점에 앉아 블레이드를 매만지던 상점 주인이 두 손으로 머리칼을 잡았다.
그렇게 천마는 뒷거래 상점 하나를 더 폐업시켜 버렸다.
“점주는 대체 언제 오는 거냐.”
골목을 어슬렁 둘러보던 천마의 말에 무명이 눈 센서를 반짝였다.
[안 그래도 장채원 님에게 방금 연락이 왔었습니다.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하니,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점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소리를 보니, 아무래도 공사 현장인 것 같습니다.]
“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천마가 골목 주위를 둘러보자, 그 모습을 지켜본 무명이 말했다.
[일단 요기라도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시장 입구 북서쪽엔 다양한 음식들을 파는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먹자골목?”
[그렇습니다. 이 각성자 용품 도매시장엔 전국적으로 유명한 맛집도 하나 있고요.]
단원 메밀국수.
무명의 안내에 따라온 국수집이다.
각성자 용품 도매시장의 먹자골목 가장 구석 자리에 위치해 있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온면과 냉면 곱빼기입니다.”
주문을 한 지 5분 정도가 지나자, 테이블에 놋그릇 두 개가 올려졌다.
천마가 팔짱을 낀 채 그릇을 내려다보자 무명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와 말했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단원 메밀국수입니다. 일전 면 요리 투어에선 먹지 못했던 아쉬운 음식이죠.]
무명은 힘이 모락모락 나는 온면과 냉면을 번갈아 가리켰다.
[이쪽은 멸치와 각종 채소를 넣어 진하게 끓인 육수로 만든 메밀 온면입니다. 가격은 흔히 파는 메밀국수와 비슷한데 오이채, 김치, 달걀지단, 고기, 배가 푸짐하게 고명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렇군.”
[그리고 냉면은 사골국물에 동치미와 과일을 섞어서 갈아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식초와 겨자 없이도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게 특징입니다. 온면과 냉면 둘 다 국물맛이 좋아서 사람들이 숙취에 즐겨 찾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설명은 끝인가?”
일전 면 요리 투어 탓이었을까?
맛집을 방문하는 경우, 천마는 무명의 설명을 모두 들은 후 식사를 시작했다.
[아, 아직 한 가지 남았습니다. 단원 메밀국수의 특이한 점은 쇠고기 장조림을 쓴다는 것입니다. 양념한 간장에 5시간 이상 조려 만든 장조림을 찢어 만든 겁니다. 그 차이를 한번 느껴보시면서 드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명의 말을 들은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후르르륵.
호쾌한 젓가락질로 시원한 냉면 메밀국수와 고명을 가득 입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던 천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상당한 맛이군.”
천마의 화법에 의하면 상당한 맛이라는 건 10점 만점에 9점 이상. 사실상 최고의 맛 평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면도 드셔보십시오. 먼저 국물을 따로 즐기신 후 면을 드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꿀꺽꿀꺽.
대접을 들어 온면의 국물을 들이켠 천마는 이내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후르륵. 후르르륵.
천마의 면치기 소리가 시끌벅적한 국수집 내부에 울려 퍼졌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지나가던 사람들도 천마가 국수를 먹는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키며 국수집 안으로 들어올 정도였다.
“과연 맛집이라 불릴 만하군.”
메밀국수를 모두 먹고 밖으로 나온 천마의 입가엔 흡족한 미소가 살짝 떠올라 있었다.
[맛있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무명의 목소리엔 흐뭇함이 가득 담아져 있었다.
어느새 천마는 대한민국에 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두루 맛보며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무명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기도 했다.
“어?”
먹자골목을 빠져나올 무렵,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성이 천마를 마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까무잡잡한 피부, 짙은 회색빛 눈동자. 바로 고은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하심까?”
“볼 일이 있어 왔다.”
천마의 성의 없는 대답에 고은진이 힘 빠진 얼굴을 보였다.
“고생하지 말입니다.”
휙휙 손을 내저은 그녀는 시장 안쪽 골목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고은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무명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낡은 냉장고 가방을 새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걸까요?]
“알 게 뭐냐.”
관심 없는 표정으로 대답한 천마는 고은진과 반대 방향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도 채웠으니 다시 시장 구경을 해보도록 하지.”
천마는 내키는 대로 시장 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고, 어느새 거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흠.”
사람들이 쏟아지는 거리를 바라보던 천마는 눈썹을 찌푸렸다.
번잡한 것은 딱 질색이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천마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방향을 쑥 틀었다.
구불텅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걷던 천마의 눈앞엔, 장물을 팔던 상점 골목과 비슷한 허름한 상점 하나가 보였다.
-대장간.
까맣게 물든 상점의 겉면엔 금속을 칼로 판 듯한 글자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대장간이라…. 여기도 장물아비들이 들어선 곳인가?”
천마의 물음에 무명이 키리릭 소리와 함께 상점의 간판을 조사했다.
[확인을 해보니 정식 허가를 받은 대장간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만 있을 뿐 간판도 없다.
마치 거무튀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 까맣게 채색된 상점의 외관에선 음침하고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리 월세가 저렴하다고 해도… 이렇게 외진 곳에 상점을 차려놓으면 아무도 찾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의도한 거다.”
[네?]
입꼬리를 올린 천마는 음침하고 어둡게 칠해진 상점을 가리켰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에, 칙칙하고 음산하게 외관을 꾸며놓지 않았더냐. 무림의 살문(殺門:살수 문파)에서 흔히 하는 짓이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도록, 고의적으로 저렇게 꾸며놓았다는 말이다. 아마도 저곳은 대장간이 아닐 것이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굳이 이런 시장통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아예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에 차리면 될 텐데요.]
“확인해 보면 이유를 알겠지.”
그리고 망설임 없이 시꺼먼 상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시꺼먼 대장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천마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 시장 골목은 천마의 흥미를 당길만한 요소들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끼익.
상점의 문을 열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끝에 닿는 묵직한 감각으로 보아 정말로 쇳덩이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천마의 눈동자에선 묘한 광채가 번뜩였다.
생각보다 내부는 넓었다.
천장엔 낡은 호박색 등이 붙어 있고, 곳곳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매대에 다양한 물건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어라? 생활용품을 만드는… 대장간이었군요.]
천마의 어깨 위에 올라 매장을 둘러보던 무명이 낮게 중얼거렸다.
매대에 진열된 것은 호미나 낫 같은 농기구와 고기 집게나 냄비 같은 주방용품들이었다. 작은 진열대에는 손톱깎이나 쟁반 등, 일상 용품도 있었다.
“전부 수제작으로 만든 것들이군. 정말 대장간이었나.”
진열대 위에 올려진 냄비를 살짝 들어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솜씨가… 상당히 훌륭하군.”
순간 무명은 자신의 청각 센서를 의심했다.
야박하리만큼 칭찬에 인색한 천마가 ‘훌륭하다’라고 말하다니?
[그 냄비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무명의 질문에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금속을 두드려 만들었음에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다. 이렇게 냄비 하나에 완벽에 가까운 안정감을 표현하고 있지 않느냐.”
매대에 진열된 제품들은 언뜻 보기엔 모조리 투박하고 거칠어 보였다.
하지만 절세무공을 지닌 천마는 단숨에 이 물건들이 놀랄 만큼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졌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무공에는 소양이 없는 무명은 그저 잘 만든 냄비로 보일 뿐이었다.
끼익.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있는 그림자가 들어왔다.
“어?”
문을 열고 상점으로 들어온 그림자는 다름 아닌 고은진이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근육몬?”
천마를 발견한 고은진이 입을 벌리자 무명이 말했다.
[여기저기 구경하다 들어온 곳입니다. 고은진 님께선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주방용품 사러 왔지. 나 여기 단골이야.”
[단골이요?]
고은진은 매대에 올려진 주방용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제품들… 가격은 엄청 저렴한데다 어지간한 명품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만들었거든.”
그녀는 매대에 꽂혀 있는 쇠집게를 하나 뽑아 들었다.
“이런 쇠집게로도 장어가시를 뽑을 수 있을 정도라니까.”
고은진의 평가 역시 천마와 비슷했다.
그러자 무명은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 물건을 파는 곳이… 왜 이렇게 외진 곳에 있을까요?]
“아아.”
고은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는 사고 싶다고 해서 물건을 살 수가 없어. 손님이 오든 말든 별로 신경도 안 쓰는 편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독특한 방침으로 운영하고 있어. 아무리 돈을 줘도 한 달에 물건을 하나밖에 살 수 없다고.”
덜컥.
그때 상점 안쪽의 문이 열리며 어두운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