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202화 (202/285)

제202화. 천마, 옷을 사러 가다 (2)

일요일 오전.

회색빛 구름이 뒤덮인 하늘은 금세라도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다.

푸르릇.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검은빛과 짙은 남색 빛이 뒤섞인 고급스런 괘자가 흩날렸다.

등에는 던전 재료 수집용인 커다란 포대를 맨 천마가 우리옷을 입은 채, 도심과 한참 떨어진 외곽의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직 멀었나.”

[이제 다 왔습니다. 저쪽입니다.]

무명이 가리킨 곳은 좁은 골목길에 빽빽이 들어선 시장 거리였다.

[바로 저곳이 각성자 용품 도매시장입니다.]

각성자 용품 도매시장.

각성자에게 필요한 장비나 무기부터, 던전에서 나오는 유물과 식재료까지.

던전에 들어가는 각성자에게 필요한 용품을 팔고 사는 상점들이 빽빽이 들어선 곳이다.

다만 도매시장이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대부분의 상점이 중고용품이나 초기 불량품을 수리해서 팔고 있었다.

“왜 상점들이 저런 외곽의 골목에 늘어져 있는 거냐.”

천마의 물음에 무명이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백화점과 재래시장의 차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 그러니까 도심에 있는 각성자 상점은 대부분 고가의 제품들만 구비해 놓는 데다, 용품도 다양하지 않거든요.]

어깨에 올라탄 무명이 팔을 쭉 늘려 상점 골목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 각성자 용품 도매시장은 저렴한 물건들도 많고, 다양한 상점들이 입점되어 있어 한꺼번에 여러 물품들을 구매할 수가 있죠.]

무명은 천마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때때로 은밀한 밀수품이나 암시장에서 나온 물건을 거래하기도 하죠.]

무림으로 따지면 하오문의 문도들이 뒷골목에 암시장을 연 것과 비슷하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천마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점주는 어디 있나.”

[아, 장채원 님은 잠시 일이 있으시다고 조금 늦는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구경을 하면 되겠습니다.]

천마가 골목에 들어서자 좌우로 늘어진 상점이나 매대 주변으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관절이나 어깨 등에 보호구를 착용한 나노슈트나 나노봇을 어깨에 매달고 다니는 각성자들도 많았다.

[천마 님. 우선 이곳에서 옷을 한번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명이 가리키는 곳은 늘어진 상점 중에서 가장 크고 번듯하게 지어진 나노슈트 상점이었다.

천마는 상점 밖에 진열된 몸에 착 달라붙은 나노슈트를 입은 마네킹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본좌더러 저런 옷을 입으라는 건가?”

[나노슈트라는 게 반드시 쫄쫄이 옷만 있는 게 아닙니다. 평상복으로 개조한 옷도 있지요.]

무명은 상점 유리 너머 보이는 나노슈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각성자용 전투복인 나노슈트는 상당히 고가인 데다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 대신 중고도 많죠.이 상점은 각성자 슈트를 중고로 파는 매장 중에 가장 큰 곳입니다. 우선 들어가 보시죠.]

천마는 마지못한 얼굴로 나노슈트 상점에 들어갔다.

안쪽은 매우 넓었으며 다양한 나노슈트들이 커다란 행거에 종류별로 걸려 있었다.

내부엔 각성자들이 저마다 마음에 드는 슈트를 골라 안쪽 탈의실에서 입고 있었다.

“흠.”

천마는 ‘근력증강 스킬 각성자 전용’이라는 팻말 아래에 있는 커다란 나노슈트 상의를 바라보았다.

행거 측면엔 홀로그램으로 다양한 모델들이 입은 나노슈트가 보였는데, 천마보다 더 큰 거구의 사내도 있었다.

“머리도 안 들어가겠군.”

하지만 꽤나 큰 사이즈로 나왔음에도 머리를 집어넣기도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본 무명이 홀로그램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렇게 손으로 잡아 늘린 후에 입으시면 됩니다.]

천마는 화면에 나온 대로 나노슈트의 머리 부분을 벌렸다.

그러자 딱딱한 재질의 나노슈트가 탱글탱글한 고무처럼 쭈욱 늘어났다.

“신기하군.”

손에 들린 나노슈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무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 기왕 오신 김에 전투용 나노슈트도 한번 입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걸 말인가?”

[평범한 나노슈트를 입고 얼굴만 가리신다면, 일반 근력증강 각성자와 잘 구별이 가지 않을 겁니다.]

무명은 은근한 목소리로 천마에게 속삭였다.

[어차피 오늘 살 물건들은 장채원 님께서 모두 지원하시는 거고요.]

나노슈트를 집어 든 천마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괘자를 벗은 후 잔뜩 늘어난 나노슈트 상의를 몸에 걸쳤다.

슈욱.

피부에 닿자 고무줄처럼 늘어나 있던 나노슈트가 다시 몸에 착 달라붙었다. 가히 엄청난 신축성이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나노슈트를 입은 천마를 바라보던 무명이 탄성을 내었다.

근력증강 스킬 각성자용 슈트답게, 우람한 근육을 가진 천마의 움직임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근육 굴곡을 한층 더 멋지게 드러내 주는 검은빛의 나노슈트를 천마가 입자, 상당한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흠.”

하지만 거울을 바라보는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편없군.”

[네?]

“이런 건 그냥 흔한 살수복이 아니냐.”

[놔두면 쓸모가 있을지 모릅니다. 우선, 결재 후 포대에 담아두겠습니다.]

천마의 불만스러운 표정에도 무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광마혈투의를 벗길 순 없지만, 최소한 천마에게 맞는 다양한 옷들을 구매하리라 다짐했기 때문이다.

[이쪽은 평상복 스타일의 나노슈트입니다. 한번 구경해 보세요.]

천마가 벗은 나노슈트를 장바구니에 넣은 무명은 이번엔 반대편 진열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초고가형 나노슈트를 평상복 버전으로 커스텀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천마 님이 한번 골라보시는 게 어떨까요?]

고개를 끄덕인 천마가 행거에 걸린 옷들을 무작위로 집어 들었다.

달칵.

탈의실에서 나온 천마는 품이 엄청나게 넓은 청바지에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풉.

-머여, 저 힙합 각설이는.

지나가던 사람들의 중얼거림을 알아듣지 못한 천마는 거울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괜찮군.”

[네?]

“이 세계에서 입었던 옷 중에서 가장 몸에 달라붙지 않는다. 재질도 아까의 것과 비슷해서 잘 찢어지지 않을 것 같군.”

그저 광마혈투의를 입지 않는다면 무명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용자인 천마가 다른 이들의 놀림을 당하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아, 아무래도 그것까지 사면 예산초과일 것 같군요.]

“그럼 저 시꺼먼 나노슈트를 버리고 이걸 사도록 하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마를 힙합 각설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명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단 나노슈트 말고, 다른 상점에서 옷을 구매하도록 하죠.]

무명이 다시 천마를 이끈 곳 역시 옷가게였다.

다만 이곳은 나노슈트가 아닌, 몬스터 가죽을 가공해 파는 업체였다.

엄청나게 질긴 몬스터 외피로 옷을 만들면, 어지간한 슈트보다 훨씬 튼튼하다. 대신 가공하는 비용이 상당한 탓에 가격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오호, 근력증강 각성자신가 보오? 근육이 장난 아니시구먼.”

상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천마의 몸을 살펴보더니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때마침 좋은 옷이 있는데 한번 입어보시겠수?”

달칵.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천마가 밖으로 나오자 무명의 눈 센서는 물결처럼 흔들렸다.

“호피 무늬?”

천마가 입은 옷은 하의와 상의가 모두 호피 무늬로 되어 있었다.

“아아, 블러드 타이거의 외피로 만든 곳이거든.”

중년 남성은 거울을 보고 있는 천마에게 던전에서 사용하는 대형 단분자 커터 모형을 쥐여주었다.

“자, 어때? 상당히 위압감이 있지?”

대형 거울에는 산채에서 방금 내려온 산적 두목이 서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반드시 통행료를 줘야 할 것만 같다.

“그렇군.”

천마는 방실방실 웃고 있는 중년 남성을 향해 옷을 집어 던졌다.

“이런 건 네놈이나 입어라.”

이후로도 천마는 무명과 함께 상점 골목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하지만 대부분 나노슈트 아니면 몬스터 외피로 만든 산도적 옷들뿐이었다. 더러 괜찮은 옷이 있었지만, 그런 건 가격이 매우 비쌌다.

[역시 천마 님에게 맞는 옷은 없을까요.]

무명이 한탄하며 고개를 떨구는데, 천마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긴 뭐냐.”

천마가 가리킨 곳은 골목 안쪽에 하나둘씩 열려 있는 낡은 상점들이었다.

[무허가 상점입니다. 빈 건물에 들어가 대충 장사하고 다시 문을 닫는 걸 반복하는 것이죠.]

“아까 말한 암시장 물건을 말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저런 블랙 마켓에는 범죄자들이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일반 각성자들은 아예 가지 않습니다. 실제로 강도 사건도 빈번히 벌어지…….]

무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마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둘러보실 생각이십니까?]

“원래 괜찮은 물건들은 하오문도들이 잘 훔쳐다 팔지.”

천마는 주저 없이 낡은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 하나 설치된 곳이 없는 상점 안에는 던전 재료인 ‘불꽃돌’이 곳곳에 올려져 있었다.

[어라? 이곳에선 옷을 파는군요.]

놀랍게도 상점 내부의 매대에는 수많은 나노슈트와 커스텀 옷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매대를 살펴보던 무명의 눈 센서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천마 님. 이 옷들은…….]

자세히 보니 매대에 올려 있는 옷들은 피가 묻어 있거나 찢기고 파손된 것들이 많았다.

천마가 옷에 손을 갖다 대려 하는데 끼이익 소리와 함께 안쪽의 쇠문이 열렸다.

동시에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 꺼요?”

“봐서.”

천마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대답하자,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매장은 옷을 한 벌 단위로 파는 게 아니라, 무게로 파는 곳이요. 쓸 만한 것만 골라가면 장사를 못 하지.”

[천마 님. 이 상점은 부상자의 것, 혹은 폐기되는 중고 옷을 모아 파는 곳 같습니다.]

“와, 뭐야. 굉장히 비싼 나노봇을 가지고 다니시네?”

무명이 유창하게 말을 하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쓰윽 다가왔다.

까만 피부에 짙은 눈썹, 오뚝한 콧날을 가진 혼혈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렇게 비싼 나노봇을 가진 각성자가 왜 이런 곳까지 왔을까.”

빙글거리며 중얼거리는 남성을 보자, 천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쭙잖은 호기심은 화를 부르지.”

“뭔 소리여, 그게.”

“무림이나 이곳이나 별 다를 바가 없군.”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은 천마는 상점 안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돈 몇 푼 벌자고 강도짓을 하다 맞아 죽는 버러지들이 있는 게 말야.”

순간 천마의 몸에선 아지랑이 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워워. 진정하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아.”

단숨에 천마가 엄청난 힘을 가진 실력자라는 걸 깨달은 중년 남성이 놀라며 두 손을 저었다.

“보아하니, 이런 곳을 한두 번 다녀본 양반이 아니구만. 실력도 있고 말이야.”

천마의 우람한 몸집을 슬쩍 본 중년 남성은 어두운 쪽을 바라보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단분자 커터를 들고 있던 남성의 동료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무기를 내렸다.

“상점이 아니라 강도짓을 하려고 한 건가?”

“하하, 매번 그러는 건 아니고… 가끔 들어오는 뜨내기 각성자들이나 당신처럼 비싼 걸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나 슬쩍 겁을 줘보는 거지, 뭐.”

입맛을 다신 중년 남성은 천마를 보며 말했다.

“뭐, 낡은 옷이나 사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뭣 땜에 온 거요? 경찰은 아닌 거 같은데.”

“옷을 구경하러 온 거다.”

“정말 옷을 사겠다고?”

천마는 대답 대신 매대에 쌓인 옷들을 유심히 살폈다.

대부분 고가의 나노슈트나 커스텀 평상복이었으나, 알짜배기라고 할 수 있는 보호기능이나 위장기능이 전부 빠져 있다.

하지만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옷을 퍼담았다.

“여기 옷들이라면 좀 입을 수 있겠군.”

천마의 포대는 갈수록 불룩하게 부풀었다.

매대에 올려져 있던 나노슈트와 나노슈트 재질로 만든 작업복, 평상복 츄리닝, 청바지, 캐주얼 옷 등등… 쓸 만한 옷을 모두 쓸어 담은 것이다.

“이, 이봐.”

천마가 매대를 쓸어버리자 중년 남성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쓸모있는 걸 다 쓸어가면… 최소 천만 원은 줘야 해.”

“어차피 밑천 없이 받아온 물건이 아니냐.”

“뭐?”

천마는 나노슈트에 박힌 둥그런 마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미처 제거하지 못한 각성자협회의 마크였다.

“뒷거래하는 놈들이 관부의 옷을 가져올 리가 있겠나.”

이제 보니 이 옷들은 모두 밑천 없이 받아온 물건. 즉, 훔친 것들이었다.

“훔, 훔친 건 몇 개 없수다. 나머지 건 덤핑으로 갖고 온 제품이라고.”

“웃기는군. 전부 장물이라는 거에 본좌는 이 무명을 걸지.”

어깨에 매달려 있는 나노봇을 가리킨 천마는 피식 웃으며 눈을 번뜩였다.

“네놈은 무얼 걸 것이냐.”

침을 꿀꺽 삼킨 중년 남성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 잠깐. 그래도 이거 너무 하신 거 아뇨.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물건들을 다 집어가면 우린 어떡하라고?”

“본좌가 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라.”

“젠장, 아주 오늘은 된통 걸렸네…….”

자포자기한 중년 남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수다. 대신 어느 정도 돈은 좀 쳐주슈.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뇨.”

“그러지.”

피식 웃은 천마가 무명을 바라보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결재하라, 무명.”

[얼마를 계산할까요?]

무명의 말에 천마가 인상을 쓰며 다시 손가락 하나를 폈다.

[천만 원이요?]

천마는 인상을 쓰며 다시 손가락 하나를 폈다.

[아, 백만 원을…….]

이맛살을 찌푸린 천마는 다시 한번 근엄하게 손가락 하나를 폈다.

-띵동. 10만 원, 결재되었습니다.

…그렇게 천마는 그곳에 있는 쓸 만한 옷들을 전부 싸 들고 나왔다.

남의 것을 훔쳐다가 파는 장물 상점 하나를 박살 내고 나온 것이다.

“저긴 뭐냐.”

다시 포대를 든 채 어두운 뒷골목 상점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던 천마.

문득 골목 모퉁이 상점에서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각성자들이 활발하게 몰려 있는 걸 발견했다.

뒷골목 상점답지 않게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안쪽에서도 쉼 없이 흥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기상점입니다. 뒷거래 상점 중에선 단연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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