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천마, 옷을 사러 가다 (1)
통닥통닥통닥.
일정하게 돌을 두들기는 다듬이질 소리가 밤하늘 사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상에 앉아 묵묵히 다듬이질을 하던 천마가 들고 있던 우리옷을 쫙 펼쳤다.
“괜찮군.”
깔끔하게 펴진 우리옷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천마는 방으로 들어가 장롱에 넣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광마혈투의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아.
샤워기를 틀자 수십 가닥의 물줄기가 천마의 안면으로 쏟아진다.
샤워를 마친 천마는 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닦은 후 다시 벗어두었던 광마혈투의를 집어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무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천마 님.]
“뭐냐.”
[기왕 씻으셨으니, 다른 옷을 입는 게 어떠십니까?]
“다른 옷?”
천마의 물음에 무명은 광마혈투의를 가리키며 힘없이 말했다.
[저 옷은 지금까지 한 번도 세탁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본좌가 말하지 않았나.”
순간 천마는 매우 자랑스런 표정으로 광마혈투의를 가리켰다.
“이 광마혈투의는 수화불침, 도검불침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해 준다. 오물을 스스로 배출해 내고, 유해한 물질의 확산을 억제하는 기능도 있지.”
무명은 대답 대신 눈 센서를 확장시켰다.
천마의 옷에 있는 더러운 오물을 찾으려는 것이다.
위이잉.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놀랍게도, 세균이나 오염물질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천마가 늘 자랑했던 광마혈투의의 공능은 허풍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없군요.]
“후후후. 당연한 말을.”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쉰내가 납니다.]
“쉰내? 무슨 쉰내가 난다는 거냐.”
[정말입니다. 지금도 나고 있는걸요.]
천마는 양팔을 벌려 킁킁대 보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
[그럴 리가요.]
천마의 몸에 바싹 다가간 무명이 둥그런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제 센서에 의하면 지금도 천마 님에 옷에선 삭힌 식초 냄새에 근접한 악취가 측정되고 있습니다.]
“허튼소리.”
천마가 무명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놈의 머리통이 고장이 났나 보군.”
[그렇다면 제가 천마 님의 옷에서 풍기는 악취의 원인을 찾아 분석해 봐도 되겠습니까?]
“맘대로 하라.”
천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무명은 기다렸다는 듯, 철커덕 소리와 함께 온갖 센서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천마의 옷에 붙은 물질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방산과 암모니아… 역시 식초 냄새는 피부에서 흘러나온 땀과 세균이 반응해 나오는 냄새군요. 아, 그런데… 이 묘한 쇠 냄새는….]
광마혈투의에 붙어 있는 성분들을 조사하는 무명의 눈 센서 빛이 급격히 잦아들었다.
너무나 예상외의 성분이 잔뜩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피부조직의 기름 성분과 헤모글로빈…….]
“그게 뭐냐.”
무명은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헤모글로빈은 혈액 속에 들어 있는 색소단백질이다. 즉 광마혈투의에 땀 냄새와 뒤섞여 있던 묘한 악취는 다름 아닌 피비린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피에서 나는 악취라고나 할까요.]
“후후… 역시 그런 거였군.”
[네?]
천마는 감회 가득한 표정으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림에 있을 땐 이 주먹과 옷이 하루라도 피에 젖지 않은 날이 없었지. 물론 본좌의 것이 아니라 다른 놈들의 것이었지만.”
[…….]
너무나도 섬찟한 독백에 무명은 바싹 얼어붙었다.
“정파 놈들뿐만 아니라 마도의 고수들도 본좌의 뒤를 노렸다. 사실상 본좌는 단신으로 전 무림을 상대한 것과 다름없었지.”
과거를 회상하는 천마의 눈은 그리움으로 젖어 있었다.
땀과 피가 뒤섞인 채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던 시절.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혈로를 걸으며, 죽음과 맞닿아 있는 싸움 속에서 무공을 발전시켰다.
승부, 싸움, 혈투, 그리고 생존…….
천마는 때때로 무아지경 속에서 싸웠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매일매일 싸우셨단 말입니까?]
“그렇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천마가 삭막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이나 굴복을 요구할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싸우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마의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유? 무림인들이 싸우는데 이유가 어딨나.”
[그럼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들과 싸우셨단 말입니까?]
“흥, 싸웠다고 할 수도 없지. 그저 주제도 모르고 덤벼드는 놈들을 흠씬 패주었을 뿐.”
코웃음을 친 천마가 말했다.
“본좌가 한 일이라곤,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마도십전의 전주들을 때려잡고 흩어져 있던 마도의 힘을 통합했을 뿐이다. 그랬더니 이번엔 정파 놈들이 힘을 합세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더군.”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듯 천마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처음엔 그저 마도제일인이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정파 놈들은 늘 그러하니까.”
[…그러셨군요.]
“하지만 정파 놈들을 다 때려잡아 놓으니, 이번엔 마도의 일성이궁팔문(一城二宮八門)의 고수들이 본좌의 뒤를 치더군.”
[…네에.]
“그놈들을 다 때려잡았더니, 이번엔 정파무학의 모든 정화를 이어받은 절세기재, 정천을 맹주로 내세워 무림맹을 만들어 본좌에게 대항하더군.”
‘~더군.’으로 끝맺는 천마의 무용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천, 그놈마저 흠씬 두들겨 주자, 이번엔 무림의 절대성지라 불리는 무원정종까지 조직적으로…….”
이후로도 무명은 양대무림의 전대 고수, 전전대 고수들과 새롭게 등장한 정사의 신진고수 삼십인. 그리고 동영, 천축, 서장, 남만 등의 변황무림의 세력과 그곳의 절대고수들의 이름을 끝없이 들어야 했다.
[그, 그러니까 천마 님은 그 세계에 있는 모든 강자들과 싸웠다는 말씀이군요.]
무명이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천마의 말을 정리했다.
한마디로 말해 무림세계의 모든 고수들과 강자들이 덤벼들었고, 천마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준 것뿐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
벌 받는 아이처럼 얌전히 앉아 있던 무명이 흘리지도 않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천마 님의 그 옷엔 그 강자들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이고요.]
“그렇겠지.”
무명의 눈 센서 모양이 기괴해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수를 물리친 옷을 한 번도 빨아 입지 않은 천마.
그리고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은 광마혈투의를 보자 무명은 기계임에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래선 안 됩니다!’
무명은 마음속으로 한 가지를 결심했다.
반드시 천마를 설득해 저 흉측한 사연이 있는 광마혈투의를 다신 입지 않도록 말이다.
[천마 님의 무용담, 이 무명은 매우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천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무명은 두 손바닥을 비벼가며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천마 님이 아니었다면 ‘마도’라는 곳은 무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천마 님께서 발휘하신 결단은, 그쪽 ‘무림인’들과 세계의 운명을 구원해 주신 절세의 구원자십니다.]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기계생명체인 무명은 화술과 아부 실력 역시 인간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거룩하신 천마 님께서 무림에 남기신 업적은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겁니다.]
“그렇겠지.”
[뿐만 아니라 무림에 출도하시자마자 전 무림과 전면대결을 하시고 승리하신 천마 님은 모든 세계가 존경하는 ‘전설 중의 전설’이 될 것입니다.]
“이미 전설이 되었다고나 할까.”
쿵짝이 잘 맞는다.
천마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걸 발견한 무명이 더욱 힘을 내어 주둥이를 털기 시작했다.
[천마 님께선 국가적 도움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가혹한 조건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강적들을 단신으로 타승(打勝:쳐서 이김)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운명과 한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걸출한 영웅이시며,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당연한 말이군. 본좌는 오래전에 인간은 초월했으니.”
[바로 그렇습니다. 천마 님의 발자취는 역사이며 기적입니다. 아니, 신화 그 자체. 모든 생명체가 바라는 운명이며, 미래이십니다.]
‘천마’라는 단어 대신 ‘위대하신 수령 동무’라는 말을 붙이면 딱 맞을 법한 찬양을 하고 있다.
쉼 없는 무명의 말에 천마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됐구나!’
내심 쾌재를 부른 무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무명, 감히 천마 님께 간곡히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두 손바닥을 비빈 무명의 눈 센서가 희미해졌고, 머릿속에선 키리리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간 후.
천마는 단정히 앉아 운공을 하고 있었고, 무명은 팔다리를 뽑은 채 방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다.
‘안 먹히다니…….’
무명은 자신의 화술과 아부 실력이라면, 반드시 천마를 설득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결과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시끄럽다.
천마는 광마혈투의를 세탁하라는 무명의 간곡하면서도 간단한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천마 님.]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어두운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무명이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너무해요…….]
* * *
다음 날, 아침.
옥탑방의 문을 열자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출근 준비를 마친 천마가 금성당혜를 신자 무명이 깜짝 놀라 말했다.
[우리옷을 안 입으십니까?]
“오늘은 시공이 많이 잡혀 있다.”
[우, 우리옷도 작업복 형태로 바꿀 수 있는데 굳이…….]
“귀찮다.”
짧은 대답과 함께 천마는 옥탑방을 나섰다.
* * *
“뭐야? 그러고 출근한 거야?”
매장으로 출근한 장채원은 천마를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날씨도 쌀쌀한데 왜 민소매 도복을 입어?”
“오늘은 시공이 많지 않나.”
“우리옷 있잖아. 우리옷.”
“매번 변환시켜야 해서 귀찮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걸레질을 하는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제 그 옷은.”
“무슨 말인가.”
“쌀쌀한데 민소매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널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거라고.”
장채원의 설명에도 천마는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타인의 시선을 왜 신경 쓰나.”
“타인의 시선 중엔 매장 손님도 있거든? 손님들이 네 민소매 차림을 봐야 하잖아.”
장채원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우리옷을 입든가, 아니면 계절에 맞는 옷을…….”
손가락을 위로 들고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하긴, 우리옷 한 벌로 버티는 것도 웃기다. 좀 있으면 겨울이 오는데…….”
“무슨 말이냐.”
“일요일에 시간 비워. 옷 사러 가자.”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딜 가도 맞는 옷이 없잖나.”
“아, 그렇지.”
장채원이 낭패스런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근육질에다 과격한 동작을 일삼는 천마에게 맞는 평상복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럼 어쩌지? 그렇다고 다시 우리옷을 한 벌 맞출 수도 없고.”
과거 천마와의 내기에서 진 탓에, 옷을 두 번이나 빼앗긴 호광.
결국 ‘호광 우리옷’은 폐점했으며, 호광은 ‘천마’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저 무명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응?”
어느새 창고 방에 있던 무명이 매장으로 떼굴떼굴 굴러왔다.
[제가 예전부터 생각해 둔 곳이 있습니다.]
“생각해 둔 곳?”
장채원이 눈을 깜빡이자 푸슉 소리와 함께 팔다리를 뽑아낸 무명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곳이라면 천마 님께서 입을 수 있는 옷이 가득 널려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