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94화 (194/285)

제194화. 일일일선, 신도(信徒)를 얻다 (2)

회상을 마친 백철식이 다시 한번 일선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령님이 주신 산삼을 먹고 저는 힘이 세어지고, 스킬도 얻게 되었지요.”

팔을 둥둥 걷어붙인 그는 팔을 구부려 우람한 이두박근을 내보였다.

“그날 이후 저는 던전서 짐꾼 노릇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일선이 조용히 웃자 백철식은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활짝 웃었다.

“육체각성도가 19퍼센트가 된다나요? 이렇게 칠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탱탱한 근육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깨는 왜 크게 다쳤나요?”

“아아. 별거 아닙니다. 짐꾼 일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전투에 휘말리기도 해서요.”

쑥스럽게 웃은 백철식이 일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신령님께선 어쩐 일로 던전에…….”

“던전에서 매일 부상자가 나온다는 걸 들었어요. 그래서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치료해 주러 다니고 있죠.”

“신령님께서 정말 약사가면이란 말입니까?”

“약사가면? 그게 뭐죠?”

머리를 긁적인 백철식이 입을 열었다.

“그, 던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고문한다는… 있잖습니까? 뉴스에도 나왔던.”

“고문요?”

“아, 그게 말입니다…….”

말을 이어가려던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신령님의 치료는 신통방통하지만 엄청나게 아프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신령님이 사람을 잡아다 고문한다는 소문을 내었구나.’

사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처는 나았지만, 아직도 어깨는 지옥불에 활활 타는 것처럼 아팠다.

아니, 치료하기 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차라리 어깻죽지를 떼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근, 근데 말입니다. 어깨 통증이 좀 심한데… 언제 통증이 없어질까요?”

“통증이요?”

“치료해 주신 이 부위 말입니다.”

태양가면의 머리 부분을 긁적이던 일선이 해맑게 말했다.

“통증은 당연한 거예요. 치료라는 건 통증을 동반해야 완벽해지니까요.”

“그게 무슨.”

“저는 오랫동안 의술을 공부했고 마침내 완벽한 치료법을 발견했죠.”

“완벽한 치료법이요?”

“네. 모두 몸에 내재된 회복력을 극대화시켜 상처를 아물게 하는 거죠.”

일선은 손에 들린 약을 가리키며 말했다.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회복력을 격발시키기 위해선, 당연히 고통이 필요하고요.”

“그러니까, 치료를 위해선 원래 그렇게 아파야 한단 말입니까?”

“맞아요. 통증이라는 건 신경의 아픔이에요. 그리고 그 신경의 고통이 극대화되는 것이 회복력을 끌어올리니까요.”

백철식은 입을 벌렸다.

신령님은 놀랍게도 모든 상처를 회복시킬, 놀라운 약을 개발했다.

문제는 ‘아파서 진짜로 뒤질 수 있음’이라는 부작용이 있다는 점이었다.

“절 치료해 줬을 땐 그렇게까진 안 아팠잖습니까.”

“그땐 이 완벽한 치료법을 몰랐죠.”

일선이 우울한 표정으로 백철식에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다리를 절게 되었고요.”

‘그런 거였나.’

어쩌면 신령님은 자신의 다리를 완벽히 고쳐주지 못해, 더욱 의술에 매달렸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원망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말입니다, 신령님.”

잠시 고민하던 백철식이 다시 말했다.

“마취제 같은 걸 같이 넣어서 회복력을 높일 순 없는 겁니까.”

“안 돼요. 통각에 작용되는 약재를 넣는 순간, 치료 효과는 떨어질 테니까요.”

하긴 신은 고통이라는 걸 모를 테니, 인간이 아픔 따윈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괴상한 치료약을 쓰는 걸로 보아, 뉴스에 몇 번이나 등장했던 약사가면이 눈앞의 신령님이 분명했다.

“그렇군요.”

통증을 꾹 참은 백철식이 화제를 돌리려 하는데, 일선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몸조심 하세요. 저는 종종 던전에 나오니, 아프면 언제든 찾아오시고요.”

“저어, 신령님. 근데 말입니다.”

“네?”

약사가면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전하려던 백철식은 입을 다물었다.

‘신령님은 그저 사람들을 도우시려는 것뿐이다.’

입술을 깨문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인간들을 도와주시려는 신령님에게 굳이 속상할 이야기를 전달할 필욘 없지.’

생각을 마친 백철식은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저는 지금까지 줄곧 신령님이 계시다는 걸 의심했었습니다. 혹시나 제가 꿈을 꾼 건 아닌가? 아니면 기억이 잘못되었나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고개를 든 그는 태양가면을 쓴 일선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젠 믿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신령님을 위해 밤낮으로 물을 떠놓고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린 백철식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같은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많이많이 도와주세요.”

순간, 일선의 몸에선 신비하고도 영롱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믿음.

신들에게는 크나큰 보람일 뿐만 아니라, 더 큰 신력을 얻게 해주는 힘의 원천과도 같았다.

마침내 일선은 자신을 섬기는 한 명의 인간을 얻게 되었고, 한층 더 성장한 대지유신이 된 것이다.

“고마워요.”

어느샌가 일선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변조 음성이 아닌, 자애롭고 따스한 음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를 믿어줘서요.”

햇살 같은 미소가 담긴 듯한 목소리로 말한 일선은 다시 진료 가방을 들고 몸을 돌렸다.

백철식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 * *

“라랄라. 라랄라라.”

던전에서 다시 판잣집으로 돌아간 일선은 진료 가방을 내려놓고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자신을 섬기는 인간 앞이라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펄쩍 뛸 만큼 기뻤다.

아주 미약하지만 신력도 상승했다.

“앞으론 더 자주 던전에 가야지.”

세이프던전엔 백철식이 있다.

그녀는 자신을 믿어주는 백철식을 틈틈이 보살피고, 다치면 열심히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랄랄라. 라라라.”

콧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또다시 열심히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일일선은 열심히 던전에서 의료활동을 펼쳤다.

물론 치료를 받은 대다수의 각성자들은 비명과 욕설,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저주했다.

하지만 일선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더라도, 인간들을 아끼고 치료할 수 있었다.

정오 무렵. 복복 인테리어 내부.

모처럼 매장 일이 바쁜 탓에 직원 모두가 모여 있다.

김찬원은 천마를 데리고 오전에 철거와 타일 시공을 하고 돌아왔고, 고은진은 그동안 밀렸던 던전 관리팀에 보낼 서류를 정리했다.

장채원은 산더미처럼 밀려 있던 견적서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점심 먹어야겠다.”

문득 벽시계를 바라보던 장채원의 말에 천마가 말했다.

“본좌는 건작장면(간짜장)이다.”

“응? 응.”

고개를 끄덕인 장채원이 수화기를 들려고 하자, 고은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 진짜. 며칠째 중국요리만 먹었지 말입니다.”

“어?”

“중화루에 지분 넣으신 것 아니면 다른 것 좀 먹으면 안 됩니까.”

고은진의 말에 장채원은 고개를 돌려 테이블 한켠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중화루 쿠폰이 63빌딩 모양으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별로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장채원은 줄곧 천마가 좋아하는 중식에 맞춰 점심을 먹은 터였다.

“그렇구나. 오늘은 밖에 나가서 먹자.”

“귀찮다. 배달이 낫지 않나.”

천마의 말에 장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귀찮긴. 때론 새로운 음식도 먹어봐야지.”

“점심엔 면이 좋다.”

“알았어. 면 있는 곳으로 갈게.”

장채원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김찬원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장 사장. 나는 밥이 좋은디.”

“아, 거기 밥도 있어요.”

“그려? 어디 가려고?”

김찬원이 눈을 껌뻑이자, 장채원이 씩 웃었다.

“저 사거리 앞에 베트남 음식점 새로 생겼더라고요.”

베트남 음식점 포포포.

시내 번화가의 어느 상가 구석에 있는 베트남 요릿집이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맛집으로 소문난 탓에 사람들이 꽤나 북적이고 있었다.

“후루루룩.”

“쩝쩝쩝.”

복층 구석 테이블엔 복복 인테리어 직원들이 둘러앉은 채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천마는 소고기 고명에 채소가 듬뿍 들어간 쌀국수를, 장채원은 돼지고기와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파인애플 볶음밥을.

김찬원은 매콤한 바질이 들어간 닭고기 볶음밥을 선택했고, 고은진은 태국식 간장과 계란이 들어간 볶음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천마와 베트남 요리점을 온 건 처음이네.”

열심히 쌀국수를 먹고 있는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먹을 만해?”

천마는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장채원에게 덤덤히 말했다.

“상당한 맛이군.”

“그렇지!”

장채원은 콧김을 내뿜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말은 천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호평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던전에 가시는 각성자 분들께선 주의하셔야겠습니다. 괴상한 약으로 각성자들을 고문하는 속칭, 약사가면이라 불리는 범죄자가 최근 던전에 수시로 출몰하여 각성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그때 매장 내부에 설치된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각성자협회에서는 약사가면을 잡기 위해 현상금을 걸고 일정 지역에 나노드론을 보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나…….

TV를 바라보던 고은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던전 지역에는 CCTV도 없고, 나노드론도 띄울 수 없으니. 범죄자를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말입니다.”

던전 지역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때때로 등장한 히든몬스터가 부술 수도 있고, 각성자들이 프라이버시, 혹은 스킬 노출 등의 이유로 극구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노드론을 때때로 띄우기도 하지만 그 역시 각성자들의 반대가 심해, 중대한 사건이나 방송 송출 목적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잡히면 곤란하겠지. 잡힐 일도 없겠지만…….”

장채원이 이마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자, 옆에 앉아 있던 고은진이 물었다.

“잡힐 일이 없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게…….”

장채원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김찬원이 낮게 속삭였다.

“은진 씨는 모르는 거여?”

“뭐가 말임까?”

“저 약사가면이라 불리는 분이 말이여, 사실은 요신 님이시구먼.”

“잘 못 들었습니다?”

고은진이 눈을 껌뻑였다.

“저 약사가면이 진짜 요신 님이란 말임까?”

“그려. 일일일선 님이라고, 신계에선 아주 유명한 분이여.”

“말도 안 됩니다. 요신 님이 왜 저런 범죄를 저지른단 말입니까?”

TV를 바라보던 김찬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범죄가 아녀. 사실은 인간들을 치료하는 선행을 베푸시는 거지.”

“선행요? 매번 부상당한 각성자들을 잡아다 죽도록 고문한다는데 말입니다.”

“그 치료가 죽도록 아프기 때문에 고문이란 소문이 나는 겨.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데, 차라리 부상당했을 때로 되돌아가는 게 나을 정도로 말이지.”

고은진은 입을 벌렸다.

“아니, 뭐 그런…….”

“그러니까 은진 씨도 조심혀.”

김찬원은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라도 부상을 당한 상태인데, 던전에서 괴상한 가면을 쓰는 사람과 마주쳤다? 그럼 무조건 도망가야 혀. 알겄지?”

“알, 알겠습니다.”

고은진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세이프던전 지역과 인접한 어느 깊은 숲속. 일일일선의 판잣집.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을 할까나… 라랄라.”

콧노래를 부르던 일선은 방 한편에 설치된 커다란 진열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다양한 동물 가면과 해, 달, 나무, 돌 등등. 자연을 형상화한 가면들이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빽빽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이게 좋겠다.”

곰 가면을 벗은 일선은 길쭉한 얼룩말 가면을 다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왕진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부상자들이 많을라나.”

TV를 보지 않는 그녀는, 자신이 매우 성스럽고 고귀한 선행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각성자들의 입장에선 던전 지역을 공포로 물들일 연쇄 고문마, 약사가면이 다시 출격을 준비하는 모습일 뿐이었다.

세이프던전 지역 남동쪽 10.6킬로 지점. A급 지하 던전, ‘냉동창고.’

지하 10층으로 되어 있는 이 던전은 내부의 평균온도가 섭씨 –20도 정도가 넘는다.

또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마다 위험도가 높은 빙(氷)속성 몬스터들이 출현한다는 특징이 있다.

던전 내부에 재료들이 다양한 데다, 고가의 유물이 잘 나오는 냉동창고 던전.

때문에 실력 있는 각성자 팀과 길드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다.

냉동창고 던전, 지하 3층의 중심부.

“끄으으.”

그곳에는 화상을 입은 여덟 명의 각성자들이 신음성을 내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중심부 한가운데엔, 몸길이가 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물고기 모양의 몬스터 다섯 마리가 쓰러져 있다.

바로 3층의 보스 몬스터인 빙검치였다.

“으으.”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던, 짐꾼 백철식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이곳을 공략하기 위해 모인 팀, ‘알찬마루’에 고용되어 이 냉동창고 던전에 왔었다.

“맙소사.”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폭발로 인해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화상을 입은 채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미친놈이 팀장일 줄이야.”

백철식은 폭발이 일어나기 전 상황을 천천히 떠올렸다.

6급 각성자 여덟 명으로 이뤄진 팀 ‘알찬마루’는 뜻밖의 상황에 조우했다.

문제는 한 마리만 있어야 할 3층의 보스 몬스터, 빙검치가 무려 3마리나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고가의 유물이 들어 있다는 ‘청색’ 빙검치가 말이다.

하지만 알찬마루의 팀원들 실력으로는 3마리의 빙검치를 잡는다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팀장인 최경식이 사냥을 감행한 것이다.

“역시 안 되겠어. 경식이 형! 이건 도저히 무리야!”

탱커인 박태남이 소리치자 최경식이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얘들아, 조금만 버텨줘! 1분이면 돼!”

그리고 후방에 서 있는 백철식에게 손을 내뻗었다.

“영감! 아까 내가 맡긴 가방을 던져!”

“여, 여깄수다.”

백철식은 산처럼 쌓아놓고 있던 짐 중에 검은 광택이 흐르는 금속 가방을 꺼내 최경식에게 내밀었다.

“얘들아, 조금만 참아!”

금속 가방을 다급히 연 최경식은 그 안에서 뭉툭한 돌을 하나 꺼내 들었다.

“하압.”

최경식이 스킬을 발휘하자 손끝에서 불꽃이 타오름과 동시에 뭉툭한 돌에서 하얀 연기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받아라!”

피어오르는 돌을 빙검치에게 던지자, 콰앙 하는 폭음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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