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일일일선, 신도(信徒)를 얻다 (1)
도심 외곽, 세이프던전 지역과 매우 가까운 어느 깊은 산속.
넓고 호젓한 산 중턱엔 아주 작은 판잣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 보이엔 집이라기보다 작업실 같은 느낌이었고, 실제로도 방 하나를 제외하곤 대부분에 실험 도구와 약초가 잔뜩 쌓여 있었다.
달그락. 썩썩썩.
그곳엔 둥그런 태양가면을 쓴 채 약초를 썰어 비커에 끓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하루에 꼭 반드시 착한 일을 한번 실행하는 대지유신, 일일일선. 속칭 일선이었다.
“흐응. 흐응.”
가면 속에 부착된 스피커에선 음성 변조된 여성의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신 약초를 끓이거나 삶고, 각종 실험 도구로 여러 액체를 담아내던 일선이 마침내 소리쳤다.
“다 됐다!”
한 손에 든 유리 시험관에는 진득한 검은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가만히 놓여 있음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액체에선 코끝만 스쳐도 기절할 것만 같은 악취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일선은 매우 만족한 목소리로 콧노래를 불렀다.
“이 약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만들어둔 약재를 가방에 주섬주섬 챙긴 일선은 콧노래를 부르며 판잣집을 나섰다.
세이프던전 지역 북서쪽 3킬로 지점, C급 대규모 던전 ‘환상숲.’
이 던전의 외관은 도톰한 토마토처럼 생겼지만,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판타지 세계를 연상케 하는 광활한 숲속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 숲속엔 다양하고 진귀한 던전 재료가 많이 있을 뿐 아니라 유물이 나오는 몬스터들이 많다.
그 때문에 언제나 많은 각성자들과 길드, 소규모 팀들이 이곳을 찾는다.
“자자, 먼저 들어갑시다!”
그때 젊은 남녀로 구성된 한 팀이 인파를 헤치고 던전 입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숙박 장비와 각종 짐을 잔뜩 메고 있는 짐꾼들도 그 뒤를 따랐다.
던전이 워낙에 넓고 자원이 풍족한 탓에, 대부분의 팀들이 장기간 머물고 나오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팀 ‘싹쓸이’의 팀장 장윤호는 환상숲 던전 앞에서 짐꾼으로 고용된 노인, 백철식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어제까지 일한 일당입니다.”
봉투에는 고작 100만 원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짐을 들고 다닌 가격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번 일로 어깨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가 아닌가?
“저어… 돈이 너무 부족한데.”
백철식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장윤호가 도끼눈을 떴다.
“아저씨 구하려고 쓴 유물과 회복약이 얼마치인 줄 아세요? 돈을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셔야지.”
어젯밤 야영을 하던 중, 백철식은 소변이 마려워 잠시 야영지를 떠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고블린 무리가 백철식을 공격했고, 싹쓸이 팀에선 간신히 고블린을 물리쳤다.
하지만 부상당한 그에게 해준 거라곤 피부를 빠르게 재생시키는 회복약을 발라준 것뿐이다.
“아니, 원래 짐꾼은 팀에서 보호를 해주셔야 하잖습니까. 그리고 유물 같은 건 쓰지 않으셨…….”
장윤호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백철식의 말을 딱 잘랐다.
“아저씨. 제가 분명히 야영지에 쳐놓은 에너지 필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죠?”
“하지만, 냄새가 난다고 소변은 숲 안쪽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이 썅, 좀 적당히 하셔야지!”
장윤호는 오히려 큰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아니, 그럼 소변 보러 갈 때도 우리가 호위를 해야 해요? 거, 억지가 너무 심하시네!”
억지를 부르는 건 장윤호였다. 하지만 백철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젊고 튼튼한 짐꾼들은 넘쳐난다.
다 늙고 힘없는 짐꾼을 써주는 곳은 별로 없기에, 백철식은 억울함을 꾹 참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럼… 치료 후에 한 번 연락드리겠습니다.”
“에이, 싼 맛에 늙은 짐꾼을 썼더니만…….”
짜증을 확 낸 장윤호는 몸을 돌려 던전 입구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오만 각성자들이 북적거리는 던전 입구 앞. 백철식은 아직도 핏물이 흘러나오는 어깨 근육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치료비로도 부족하겠군.”
각성자 병원은 보험이 안 돼 치료비가 비싸다.
싹쓸이 팀에선 고블린에 둘러싸인 백철식을 구해주긴 했지만, 근육 손상을 단숨에 회복해 주는 회복약은 주지 않고 싸구려 외상약을 발라주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지.”
한 손으로 다친 어깨를 붙잡고 있던 백철식은 쓸쓸히 몸을 돌렸다.
세이프던전 입구로 힘없이 걸어가던 백철식.
폐건물이 보이는 황량한 길을 쩔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다리를 저는 건 이번에 입은 부상 때문이 아니라, 오래전에 다친 상처 때문이었다.
“어라?
그런데 맞은편에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 탄성을 질렀다.
“다치셨군요?”
커다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웃는 얼굴이 그려진 태양가면을 쓰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백철식은 괴상한 가면에 한복을 입은 그녀를 보자, 얼마 전에 보았던 뉴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괴상한 가면을 쓴 채 독약을 나눠주던 일명 ‘약사가면’을 기억하십니까?
-사람을 치료해 주되, 각종 고문을 일삼는다는 그 약사가면이 최근 던전에 또 나타나 각성자들을 괴롭힌다는 소식입니다.
‘떴구나!’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백철식이 어깨를 부여잡은 채 뒷걸음질 쳤다.
“살, 살려주십쇼!”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다.
던전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선 수류탄이 터진다고 해도 뛰어나올 사람은 없다.
“물론이에요. 당연히 살려드리죠.”
약사가면은 백철식을 바라보며 흔쾌히 대답했다.
“사실 그 정도 상처로 죽진 않아요.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치료요?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 정도 상처는 금방 나을 테니까요.”
백철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육체각성도는 19퍼센트, 스킬은 고작 시력을 5.0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F급 스킬 ‘매의 눈’뿐.
‘도망가야 해!’
두 다리에 힘을 준 백철식이 이를 꽉 깨물 무렵,
“여기에 앉으세요.”
약사가면의 목소리에 그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쪼르르 그곳에 앉았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앉아 있는 백철식을 보며 약사가면이 진료 가방을 열었다.
“자,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발라드릴게요.”
가방엔 기괴한 색깔들이 담긴 연고나 액체들이 담겨져 있었는데, 약사가면은 그중에 시꺼먼 액체가 든 약병을 꺼내었다.
“조금 아플 거예요.”
까만 액체를 푹 찍은 손가락이 어깨 상처에 닿자, 순간 백철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거지?’
분명 그는 발이 땀나도록 도망가려 했다.
그런데 저 가면 속 스피커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그 앞에 앉았던 것이다.
‘이래서 1급 각성자들도 곡소리를 내며 도망을 못 간 거구나.’
약사가면의 만행은 각성자들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 전엔 상위 랭커 중 한 명인 청룡 연합의 각성자가 약사가면에 걸려 죽도록 고문당하고 은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억.”
까만 액체가 어깨 상처에 닿자 백철식은 눈동자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
상처 부위를 라이터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다. 점차 두개골이 어긋나는 듯한 느낌과 함께 그는 벌러덩 뒤로 자빠졌다.
“괜찮아요?”
약사가면은 쓰러진 백철식을 재빨리 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많이 아프죠?”
비록 음성이 변조되어 있으나, 목소리에선 염려와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순간 백철식은 결코 약사가면이 소문과 같은 악인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왜 나를 고문하시는 겁니까.”
“고문이라뇨”
“어깨가… 녹아내릴 것처럼 아픈데요.”
“찢어진 근육이 빨리 아물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일 거예요. 각성자들은 대부분 성격이 급해서, 빨리 낫는 약으로 만들었거든요.”
“상처가 아물다니. 고문도 이런 고문이…….”
이를 꽉 깨문 채 고통을 참고 있던 백철식이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어라?”
갑자기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어깨 부위에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옷을 들어 어깨를 내려다보니, 너덜거리던 근육과 상처가 순식간에 깨끗이 아물어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이게 어떻게.”
백철식이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자, 약사가면, 아니, 일일일선이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상처가 급히 아무는 탓에 조금 아플 거라고요.”
“정말 상처를 치료해 주셨단 말입니까?”
“그럼요.”
“왜요?”
백철식의 물음에 일선이 웃으며 말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비록 변조된 음성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것이지만, 그 말에는 헤아릴 수 없는 자상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
구십 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백철식은 문득, 일선이 신고 있는 낡은 꽃신을 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 당신은…….”
떨리는 음성으로 고개를 든 백철식은 갑자기 일선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신령님!”
“네?”
“비록 비루하게 살아온 인간이지만, 어찌 두 번이나 은혜를 베풀어준 신령님을 못 알아보겠습니까?”
“그게 무슨…….”
백철식은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과거 오십 년 전, 용두산 근처 도로에서 저를 구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십 년 전, 용두산… 아.”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던 일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철식이 반색했다.
“기,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그 작은 소년이 벌써 이렇게 자랐군요.”
일선은 자애롭게 웃으며 백철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쳤던 다리는 괜찮은가요? 그때는 제가 잘 치료를 못 해주었는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고개를 조아린 백철식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령님 덕택에 목숨도 구하고 힘이 세져서 각성자 노릇도 하고 있습니다.”
천애 고아로 태어난 백철식.
보육원에서 자랐어야 할 그였지만, 하필 버려진 곳이 아이들을 데려다 구걸을 시키던 조직의 대문 앞이었다.
결국 어린 나이부터 앵벌이를 하며 지내던 그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조직에서 도망쳤다.
사회 물정도 모르고 갈 곳도 없던 백철식은 결국 전국을 떠돌며 문전걸식을 하였다. 그러다 용두산 근처의 도롯가에서 뺑소니 차량에 치여 버렸다.
“으으으.”
목숨은 구했지만 두 다리가 완전히 꺾여 있었고, 뼛조각이 살을 뚫고 나왔다.
박살 난 다리를 내려다보던 백철식은 고통과 당혹감을 참지 못한 채 이를 깨물었다.
“흐흐으. 으으으윽.”
그런데 그때, 한 여성의 그림자가 백철식 앞에 나타났다.
“괜찮나요?”
“누구…세요.”
고개를 들자 여성의 실루엣이 보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얼굴 부분이 햇살처럼 반짝이는 탓에 어떻게 생겼는지 용모를 볼 수 없었다.
“저런, 많이 다쳤군요.”
다만 목소리는 매우 맑았고 발에는 아름다운 꽃신을 신고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치료해 줄 테니까요.”
하얀 손을 내뻗은 여성이 백철식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허리 아래가 잘린 것 같은 고통이 확 줄어들었다.
백철식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러지…….”
“조금 눈 붙이고 있어요.”
여성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녹아들자 백철식은 스르르 깊은 잠에 빠졌다.
“어?”
다시 눈을 뜬 소년, 백철식은 눈을 껌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풀잎을 이어 만든 듯한 엉성한 집이었다.
내부엔 집기라곤 나무 탁자와 침상뿐이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많은 창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어났나요?”
그때 얼굴이 반짝이는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가 있었다. 접시 안을 들여다보니 시꺼먼 잿물 같은 액체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마셔요. 훨씬 거뜬해질 거예요.”
이상하게도 여성의 목소리엔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백철식은 자신도 모르게 접시에 담긴 액체를 꿀꺽 삼켰다.
“끄어!”
액체가 목구멍에 넘어가자마자 식도와 배 속이 찢어지고 불에 타는 듯했다.
‘거뜬해질 거예요’라는 말이 ‘거뜬하게 저승 문턱을 넘을 거예요’라는 뜻이었단 말인가?
“원래 좋은 약은 몸에 써요. 조금만 참아요.”
사약을 먹여놓고 좋은 약이란다.
목을 부여잡은 백철식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이게 무슨 약이에요! 독약이지!”
집 내부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던 백철식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다리. 차에 치여 박살 났던 다리가 멀쩡하게 잘 붙어 있지 않은가?
“어라? 내 다리가…….”
“간신히 이어 붙였어요. 솜씨가 부족해서… 완벽하진 않지만.”
여성이 미안한 듯 머리에 손을 올렸다.
백철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심지어 앙상했던 다리엔 탱탱한 근육이 붙어 있었다.
“내 다리… 왜 이리 튼튼해요? 어라? 내 팔도?”
앙상했던 팔과 다리엔 근육이 붙어 있다.
늘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탓에 말라붙었던 뱃가죽에서도 윤기가 흘렀다.
“몸이 너무 약해서 좋은 약을 좀 많이 달여 먹였어요. 여기 용두산에는 좋은 산삼이 많이 나거든요.”
“산삼이요?”
“몸을 튼튼하게 해주고 힘도 세지게 해주는 약이에요.”
“산삼, 산삼…….”
백철식은 아주 어릴 적 누군가가 읽어주었던 동화책 하나가 떠올랐다.
그 책엔 마음씨 좋은 산신령이 가난하고 힘든 나무꾼들을 위해 신령스러운 약인 ‘산삼’을 내려준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산신령님이셨군요!”
두 팔을 벌린 어린 백철식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