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천마, 게임을 하다 (2)
띵똥.
굵은 손가락이 비디오폰에 닿자, 벨소리가 울려 퍼지며 렌즈 위에 설치된 조명이 반짝인다.
“천마 님?”
스피커에서 당혹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철컥 소리와 함께 훤칠한 키에 금발머리를 한 청년이 활짝 웃으며 걸어 나왔다. 유은호였다.
“천마 님이 어쩐 일이세요?”
“꼬마는 안에 있나.”
“호조요?”
“그렇다. 불러와라.”
천마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엄숙했다.
마치 교장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한 듯한 느낌이다.
‘호조 녀석. 뭐 사고라고 친 건가? 아까 분명히 친구와 게임하고 돌아온 것 같던데.’
한만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유은호의 등 뒤로 맑은 음성이 들렸다.
“천마 아저씨!”
한호조는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을 구해준 천마.
한호조는 줄곧 천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지만, 천마는 무심하고도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집으로 찾아오다니?
“어쩐 일이세요?”
“꼬마, 시간 있나.”
“네?”
[호조 군. 천마 님은 그러니까…….]
무명에게 눈짓을 준 천마가 짧게 말했다.
“따라와라.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 테니.”
천마를 따라 실드경계지역 초입까지 걸어온 한호조는 입을 벌렸다.
심각한 얼굴로 데려온 곳이 바로 편의점에 설치한 게임기 앞일 줄이야?
“게임을 저랑 같이 하시겠다고요?”
“본좌에겐 방어 전략가가 필요하다. 이 밥통은 실력도 형편없으면서, 5단계까지 밖에 방어를 못 하더군.”
“그러니까 저 보고 디펜더를 맡아달라는 건가요?”
이번엔 무명이 게임화면 속, 하이스코어 기록을 가리켰다.
[맞습니다, 호조 군. 천마 님은 1등. 그러니까 최고 기록을 달성하고 싶으신 겁니다.]
상황을 파악한 한호조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초등학생인 자신도 기록에 목을 매는데, 세상 오만한 천마 아저씨가 저 등수에 만족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천마 아저씨가 게임기에 손을 댄 걸까?’
순간 한호조는 천마의 어깨 위에 올려진 무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무명은 동그란 눈 센서를 한번 찡긋했다.
‘무명이 신경을 써준 거구나.’
일전에 달고나 틀을 갖다준 무명에게 ‘천마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무명은 ‘걱정 마세요. 제가 한번 좋은 기회를 만들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었다.
“소년.”
멍하니 서 있는 한호조를 바라보며 천마가 다시 말했다.
“최고 기록 달성을 위해 본좌를 보좌하라. 할 수 있겠나.”
천마를 올려다보던 한호조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호조는 게임기 앞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준비됐어요.”
“좋다.”
천마는 비장한 표정으로 동전을 넣었다.
띠링 소리와 함께 화면 속의 우주비행선이 우주공간을 워프하기 시작했다.
피잉. 콰앙!
웜홀을 넘어서자마자, 우주의 풍경이 보이며 적의 함대에서 미사일이 쏟아져 나왔다.
타타탁.
동시에 한호조의 손가락이 컨트롤러 위에서 춤을 추었다.
한호조의 디펜스는 매우 정교하였고, 빔과 미사일의 경로를 앞지르고 있었다.
덕택에 비행선은 한 발의 미사일도 맞지 않았고 천마의 조준경도 흔들리지 않았다.
-LEVEL 7.
어느덧 게임은 7단계에 들어섰다.
적의 함대는 더욱 많아졌고 미사일의 공격도 교묘해졌다.
한호조는 열심히 컨트롤러를 움직였으나 변칙적인 공격이 쏟아지자 점차 디펜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 돼!”
-콰쾅!
레벨이 올라갈수록 적의 미사일의 파괴력은 급격히 올라갔다.
결국 미사일 하나가 방어를 뚫어버리자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우주비행선이 파괴되었다.
컨트롤러에서 손을 뗀 한호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아직까지 7레벨은 해보지 못해서요.”
“흠.”
눈썹을 찌푸린 천마가 쌀쌀맞은 침음을 내자, 무명이 부드럽게 말했다.
[천마 님. 호조 군의 동작을 보건대 적응의 문제 같습니다. 몇 번만 더 하다 보면 반드시 7레벨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도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명의 말에 천마가 편의점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이맘때쯤 다시 와라. 본좌도 퇴근하고 바로 이곳으로 오겠다.”
“네. 그럼 내일 저녁 먹고 바로 올게요!”
“잠깐.”
한호조가 싱글벙글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천마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기 전에 한 판만 더 하고 가라.”
* * *
“뭐야. 같이 게임하자는 거였어?”
편의점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건물의 옥상 난간.
그곳엔 신채영, 유은호, 그리고 던전에서 돌아온 한만재까지 숨을 죽인 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마 님도 참… 나도 저 게임 잘하는데.”
유은호가 서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신채영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게임하러 간다고 말을 정확히 하지. 괜히 쓸데없이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고 있어.”
“…….”
난간에 우뚝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만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특수대응팀에서 가장 바쁜 건 사실 한만재다.
탱커 포지션인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던전에서 보내며, 발생되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을 조사하고 구조가 필요한 사람들을 구출한다.
늘 바쁜 탓에 아들과 함께 놀아주지 못했다.
그런데 떡 벌어진 체구의 천마와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지. 한판 하는 게 꽤 걸릴 것 같은데.”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한만재가 몸을 돌렸다.
다음 날.
칼퇴근을 한 천마는 아예 라마스를 편의점 뒤쪽 주차장에 세웠다.
“아저씨!”
편의점 입구에 도착하자 그 앞에서 쭈그리고 있던 한호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걸 보아 꽤 오래전부터 천마를 기다렸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호조 군. 먼저 와 있었군요.]
무명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한호조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엄숙하게 말했다.
“몸을 풀어라.”
“네?”
“결전을 앞두고 어찌 그런 자세를 유지해 몸을 굳게 만든 거냐.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몸을 풀고 정신을 집중하라.”
“네, 네에.”
한호조가 별수 없이 국민체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꼼꼼히 풀자 천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다.”
동전을 꺼낸 천마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고로 오늘 도전은 한 번뿐이다.”
“네?”
“이런 건 패배한다고 해도 생명에 위협 따윈 없지. 그렇기 때문에 안이한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거다.”
깊은숨을 한 모금 들이마신 천마가 엄숙하게 말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최고의 기록을 내던가, 아니면 영원히 패배하는 거다.”
천마는 어젯밤, 무명과 함께 한호조가 디펜스를 실패한 이유를 분석했다.
놀라운 감각과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한호조가 7레벨을 돌파하지 못한 건 적응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극한의 집중력과 긴장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알겠어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한호조가 눈을 번뜩였다.
천마의 조언에 따라 한 단계 더 높은 집중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GAME START!
경쾌한 음성과 함께 우주비행선이 발진되었다.
마침내 웜홀을 뚫고 우주로 진입하자 수많은 함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푸슝! 삐유유융! 지이이잉.
마침내 레벨 7에 들어서자 적함에선 비행선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로를 예측할 수 없는 미사일을 퍼붓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한호조는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미사일을 요격했다.
옆에 있는 천마는 단 한발의 실패 없이 적기 들을 정확히 명중시키고 있었다.
-LEVEL 10.
마침내 마지막 스테이지가 펼쳐졌다.
-슈우우우우.
엄청난 소리와 함께 우주를 삼킬 듯한 거대한 함선이 눈앞에 등장했다.
배틀 체인저의 최종 보스였다.
-삐이이이!
괴음과 함께 우주를 가르는 거대한 빔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나온 함선들이 쏘아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력한 빔이었다.
-지잉! 콰아아아아!
정신없이 빔과 미사일을 요격하던 한호조의 눈동자.
마치 전능시야 스킬을 사용하는 것처럼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잉! 지잉! 지잉!
함선들의 빔 공격이 거세지자 한호조과 천마의 손동작은 더욱 빨라졌다.
결국 빗발치는 빔에 맞은 거대함선이 붉은빛을 내며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천마 님. 이제 저 거대함선의 중심부에 빔을 쏘면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무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슈우우웅!
굉음과 함께 천마와 한호조가 탑승한 우주비행선이 자동으로 회피기동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뭐냐?”
천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회피기동을 할 때마다 화면은 빔과 미사일로 가득했고, 방향 감각마저 잃게 만들었다.
심지어 천마가 공격하는 조준경 화면마저 전동 모터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천마가 레이저 빔을 쏘려고 하면 또다시 회피기동을 시작했다.
[게임 난이도를 상승시켜, 클리어를 어렵게 하도록 설정해 놓은 겁니다.]
무명의 말에 천마는 말없이 조종간을 움직이고 있었다.
-콰우우우!
그때 함선에서 쏘아진 미사일 하나가 방어막을 뚫고 들어왔다.
어지러움을 느낀 한호조가 방어에 실패한 것이다.
‘아차!’
거대한 미사일이 우주선에 부딪칠 무렵,
“끝이다.”
탁.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천마가 미친 듯이 흔들리는 조종간의 버튼을 눌렀다.
-지잉!
‘저 흔들리는 조준경에서 타이밍을 맞췄다고?’
한호조가 눈을 부릅뜰 무렵,
천마가 쏘아낸 한줄기 레이저 빔이 동시에 정확하게 거대함선에 명중했다.
-콰와아아아아아앙!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함선이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마침내 최종 단계까지 클리어한 것이다.
“와아! 됐다!”
한호조가 환호성을 외쳤다.
“깼다! 깼어요! 우리가 배틀 체인저 최종 보스를 물리쳤어요! 그것도 국내 최고 기록으로요!”
동네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외치던 한호조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목이 쉬도록 크게 소리를 질러본 기억이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천마 님. 호조 군. 고생했어요.]
“으응!”
[그럼 호조 군이 이니셜을 새겨보도록 할까요?]
무명의 말에 한호조가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새겨도 돼요?”
“본좌는 할 줄 모른다.”
한호조는 떨리는 손으로 컨트롤러를 조작했다.
-1st. score. 9,999,999. 천마 & 호조.
신들린 집중력과 경로 예측으로 마지막 한 발을 제외한 모든 디펜스에 성공한 한호조.
그리고 어떤 흔들림에도 ‘PERPECT’ 판정으로 적기를 명중시킨 천마.
두 사람은 게임상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하이스코어를 찍은 것이다.
띠잉. 띠잉.
그때 화면이 반짝이더니, 라는 글자가 표시됐다.
“이게 뭐냐.”
천마의 물음에 한호조가 말했다.
“온라인 대전 요청이 들어왔어요. 이거 대전 모드도 가능하거든요.”
“그게 뭐냐.”
“컴퓨터와 싸우는 게 아니라, 이 게임에 접속한 다른 실력자들이랑 싸우는 거예요.”
“다른 실력자라.”
천마가 혀로 입술을 적셨다.
가상의 적보다 실제 플레이어를 때려잡으면 그 쾌감은 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뭐야. 팀 볶음밥?”
화면 하단에 새겨진 팀의 이름을 발견하던 한호조의 눈이 커졌다.
“여기 우리나라 랭킹 1위 팀이에요.”
“1위?”
붉은 눈동자를 번뜩인 천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 2위가 되겠군.”
* * *
-깼다! 깼어요! 우리가 배틀 체인저 최종 보스를 물리쳤어요! 그것도 국내 최고 기록으로요!
동네가 떠나갈 듯이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놈의 게임기!”
몸을 웅크린 채 매대의 음식들을 정리하던 김혜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제 하다 하다 밤에도 몰려와 게임을 하는 거야?”
터져 나오는 울화통을 억지로 누른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안 되겠어. 아빠한테 없애달라고 해야겠어.”
게임기가 보이는 유리창 쪽으로 다가간 김혜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뭘 하길래 소리를…….”
중얼거리던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다물었다.
종종 보이던 초등학생은 그렇다 치고, 엄청난 거구의 남성이 게임기 앞에 웅크린 채 나란히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처럼 보이지 않는데.”
유리창 너머 보이는 남성의 옆얼굴은 험악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눈동자도 은은히 붉은 탓에 멀리서 보면 근육질의 로봇 인간 같다.
“음.”
남성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김혜원은 갑자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매우 따스하면서도 그리운 감정이었다.
“저게 그렇게 재미있나?”
전력을 다해 컨트롤러를 조작하는 남성을 바라보던 김혜원은 피식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놔두지 뭐. 저렇게 좋아하는데.”
몸을 돌린 김혜원은 다시 매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가슴 부근에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