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양양 신뢰 (2)
탕욕을 마친 천마와 김찬원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천마는 광마혈투의 대신 고급스런 광채가 흐르는 우리옷을 입었고, 김찬원 역시 재킷과 바지를 입었다.
풍설정 앞 정자에 이르자 그곳엔 식혜가 가득 담긴 주전자와 다과가 있었고, 구석엔 무명을 끌어안은 제비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점주는 아직인가 보군.”
“천 씨. 날씨도 좋응께 여기서 바람이나 쐬며 기다리는 게 어뗘?”
“괜찮겠지.”
천마와 김찬원은 정자에 앉아 식혜를 한 잔씩 걸쳤다.
달짝지근한 음료도 들어갔겠다,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겠다,
멀뚱히 앉아 있던 천마와 김찬원은 자신도 모르게 꾸벅 졸기 시작했다.
“벌써 끝난 거야?”
그때 맑은 목소리가 천마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하늘하늘한 비치 원피스를 입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미녀의 얼굴이 보였다. 장채원이었다.
“왔군.”
장채원을 힐긋 바라본 천마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모두 화장기 하나 없지만, 장채원은 두 볼은 볼터치를 한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고, 촉촉한 눈동자와 분홍빛 입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물론 고은진의 용모도 빼어난 편이긴 했지만, 평소와 똑같이 선머슴 같은 느낌이었다.
“으응? 왔는겨?”
그때 졸고 있던 김찬원도 천천히 눈을 떴다.
“오늘따라 장 사장 신수가 훤하구먼.”
김찬원 역시 어딘가 매력적으로 변한 듯한 장채원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확실히 물이 좋아서 그런지, 더 개운한 거 같아요.”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미소 지은 장채원이 천마에게 말했다.
“어때? 온천에 온 소감은? 괜찮았어?”
젖은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장채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천마가 눈을 껌벅였다.
“방금 뭐라 했나.”
“온천 괜찮았냐고.”
“좋았다. 온도도 적당하고 풍광도 좋더군.”
온천욕 때문인지 살짝 달아오른 천마의 두 볼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피식 웃고 있었다.
“천마, 넌 정말 돌쇠 스타일이구나.”
“무슨 말이냐.”
“아까 지배인님에게 들었어. 오솔길도 넓혀놨다면서? 그 울퉁불퉁한 길을 반듯하게 정리했다고 말야.”
천마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김 씨와 한번 해봤다. 영지의 초목을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그랬구나. 고생했어.”
활짝 웃은 장채원이 풍설정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들어가서 머리만 말리고 올 테니까 기다려. 이제 저녁 먹으러 나갈 거니까.”
고은진과 나란히 웃으며 걸어가는 장채원.
그녀는 정말로 휴가를 온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내심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꼈지만, 천마는 덤덤히 말했다.
“그러지.”
* * *
양양 국제공항 부근, 가변던전 지역.
강력한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이 지역은 퍼스트 버스터 시절, 유독 미사일 폭격을 퍼부었던 곳이기도 하다.
허허벌판처럼 되어 있는 가변던전 초입 부근은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밤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젠장. 숨쉬기도 힘들군.”
가변던전 초입에 포진해 있던 몬스터들을 처리한 청룡조합의 각성자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타다다닥. 파악.
짙은 안개 속에서 재빨리 후퇴하고 있는 무리들의 그림자가 보인다. 고속 이동 스킬을 펼칠 때 나는 파공음이 퍼져나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강연합의 각성자들 같았다.
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저들도 초입부터 몬스터들을 만나 후퇴와 진격을 반복하는 것 같다.
“서쪽으로는 누가 갔지?”
청룡조합의 길드장 이준혁의 말에 옆에 있던 부길드장, 손민국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중소길드 연합이요.”
“뺑이 치고 있겠군. 거긴 힐러도 거의 없지 않냐?”
“뭘 걱정해요. 당장 우리 코가 석 자인데.”
손민국은 뿌옇게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꼴새를 보아하니, 이번 원정은 완전 적자겠어요. 히든몬스터도 아닌데 이렇게 집요하게 따라오는 것들은 처음 봐요.”
청룡조합원들이 휴식하는 주변으로 거대한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 길로틴 크로커가 수백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위험도는 2000 정도.
외피가 워낙 질긴 탓에, 탱커 스킬 각성자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는 청룡조합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어차피 장기 프로젝트 아니냐. 이번 1회차 때는 반경 1킬로 부근만 정리한다고 하니까. 다음번 회차 때는 좀 괜찮아지겠지.”
“그럴까요.”
손민국은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다음 회차 땐 선두에 안 섰으면 좋겠어요.”
“다음 회차 걱정할 때냐. 지금 보니 1회차부터 사상자들이 무더기로 나올 것 같은데.”
손민국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준혁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놈의 뿌연 구름하고 안개만 걷히면 좀 할 만할 텐데… 앞으로가 꿈만 같네.”
“그러게요.”
멍하니 서 있던 손민국이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형님. 이번 일 끝나면 조합원들 데리고 양양에서 좀 쉬다 가죠.”
“여기서?”
“네에. 여기 굉장히 시설 좋은 휴양지가 있거든요. 온천랜드라고.”
예전에 방문했던 온천랜드 풍경을 떠올린 손민국이 멍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 참. 그리고 그 근처에 맛집도 굉장히 많거든요? 먼저 양양 횟집이라고…….”
* * *
양양 횟집.
온천랜드 지배인이 추천해 준 로컬 맛집이었다.
주차장이 꽉 찰 만큼 손님들로 붐볐지만, 모든 좌석이 룸으로 되어 있어 편안하고 분위기 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다만 각지에서 모여드는 손님이 많은 곳이니만큼, 제비와 무명은 데려오지 않았다.
“자, 먹자.”
미리 예약을 한 장채원은 코스요리로 나와야 할 해산물 요리를 한꺼번에 테이블 위에 깔아달라고 부탁했다.
두 개의 좌식 테이블이 휘어질 만큼 가득 채운 다양한 요리들을 바라보던 천마가 침음을 내었다.
“날 것이 많군.”
“해산물이니까.”
“안타깝군. 상태를 보건대,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들이다.”
“신선하다고 해줄래?”
묵묵히 먹고 있는 김찬원과 고은진과 달리, 천마는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기왕 휴양지에 왔으면 호사스럽고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게 낫지 않나.”
“여기 저렴한 곳은 아냐. 1인당 5만 원이나 하는 곳이라고.”
“그런가.”
가격을 듣자 천마가 마지못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묵묵히 테이블을 바라보던 그는 꿈틀거리는 낙지를 집어 올렸다.
“이걸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신선한 광어회를 달콤 짭짤한 간장에 살짝 찍던 장채원이 다급히 손을 올렸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입 다물어. 여기선 식당을 옮기지도 못하니까.”
“이상한 소리라니.”
“첫 회식할 때처럼 이상한 말 하려는 거잖아. 아직까지 난 닭발을 못 먹고 있다고.”
“첫 회식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감?”
분홍빛 개불을 입에 넣은 김찬원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묻자, 천마가 덤덤히 답했다.
“별거 아니다. 지류증에 걸린 닭발 이야기를 했지.”
“지류증? 그게 뭐여?”
“닭발에 생기는 피부병이다. 고름이 쭉쭉 나오지.”
“컥.”
김찬원뿐만 아니라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던 고은진마저 씹고 있던 음식을 뿜을 뻔했다.
“미쳤습니까, 근육몬? 밥 먹는데 고름 이야기를 왜 합니까?”
“본좌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식재료에 대한 고급 정보를 알려준 거다.”
첫 회식의 악몽이 재현될 기미가 보이자 장채원의 표정이 도깨비처럼 험악해졌다.
“회식할 땐 그런 정보는 네 머릿속에만 넣어둬. 알겠어?”
들고 있던 광어회를 슬쩍 내려다본 그녀가 잇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또다시 좋아하는 음식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다.”
아쉬운 표정으로 젓가락을 든 천마는 생선찜이나 튀김 종류 같은 익힌 음식만 집어 먹었다.
“천 씨. 해산물 안 좋아혀? 여기 해산물들 진짜 신선하고 맛나는디.”
“좋아한다. 날 것을 딱히 즐기지 않는 것뿐이지. 왜냐하면…….”
과거를 회상하려던 천마는 장채원의 눈빛에 불꽃이 이글거리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식사를 하던 고은진은 그 모습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천마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걸 장채원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빚을 갚으면 갚는 사람이지 말입니다.’
크흠 하며 헛기침을 한 고은진이 말했다.
“제가 남 먹는 걸 참견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녀는 쌈 채소에 광어회 한점을 올린 후, 초장과 마늘을 곁들인 쌈을 내밀었다.
“이곳 해산물 정말 신선하고 맛있습니다. 한번 드셔 보십쇼.”
“너나 먹어라.”
“그냥 맛만 보십쇼. 모처럼 다른 세계에 왔으니 다양한 음식을 즐기셔야 하지 않습니까?”
보다 못한 장채원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은진 씨 말이 맞아.”
평소 같으면 콧방귀만 끼고 대답조차 하지 않을 천마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장채원이 묘한 매력을 풍기는 데다, 나긋하게 말하는 어투에 덤덤히 손을 내저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도 않은데, 굳이 날 걸 먹고 싶지 않다.”
천마로선 보기 드문, 완곡하고 부드러운 거절이다.
하지만 이번엔 고은진의 지병이라 할 수 있는 똥고집이 발동되었다.
“아, 그냥 한 번만 먹어보십쇼. 맛없으면 뱉으면 되잖습니까?”
“본좌는 한번 입에 들어간 음식은 뱉지 않는다. 그건 낭비니까.”
보다 못한 장채원은 깻잎에 간장을 찍은 도미와 날치알을 듬뿍 올려 내밀었다.
“자, 내 것도 먹어.”
“거절한다.”
“네가 안 먹으면 여기 음식이 남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한번 먹어봐.”
장채원의 하얀 손가락을 바라보던 천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권하는데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좋다.”
양손으로 쌈을 받아들인 천마가 고은진의 것부터 입 안으로 천천히 넣었다.
“어떻습니까, 근육몬?”
“아직 씹지도 않았다.”
마지못해 쌈을 우물우물 씹던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괜찮은 맛이로군.”
“그것 보십쇼. 맛있지 않습니까?”
“그렇군. 꽤나 잘 담근 젓갈처럼 풍부한 맛이 있군.”
“그럼 내가 준 것도 먹어봐.”
“알겠다.”
우물우물 쌈을 씹은 천마의 눈이 이번엔 번쩍 뜨였다.
“상당한 맛이군. 신선한 생선과 톡톡 터지는 식감, 그리고 향긋한 간장이 잘 어우러져 있다.”
“거봐. 맛있지?”
장채원은 성공했다는 듯 두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꺄르르 웃었다.
그 자태가 너무나 곱고 아리따워 천마는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상하군.’
평생 무도에 뜻을 두고 전념한 천마.
단 한 번도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적이 없으며, 여인의 미모나 자태 따위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새삼 장채원의 용모에 눈길과 시선이 가다니?
“천마, 김 기사님. 은진 씨. 우리 다 함께 건배해요.”
그때 장채원이 소주잔을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모처럼 놀러 왔으니 기분 좋게 마시고 즐겁게 놀다 가요. 건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한쪽으로 빗어 내린 장채원이 살짝 웃자, 방 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딸각.
잔을 부딪치고 술을 들이켰으나, 김찬원은 마네킹처럼 팔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김 씨. 뭐 하나.”
천마의 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김찬원이 헛기침을 하며 물을 마셨다.
“노인네 심장을 사정없이 때리는구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 * *
어두운 밤, 양양 국제공항, 가변던전 지역.
청룡조합의 각성자들은 불을 피워놓고 야영을 하고 있었다.
경계 근무를 서는 자들은 불빛이 닿는 곳 끝에 우뚝 서 있었고, 휴식을 취하는 각성자들은 모닥불에 육포를 구워 먹고 있었다.
“근력 강화나 실드 생성 스킬을 펼치면 묘하게 고기가 당긴단 말이죠.”
갖고 있는 육포를 모두 불에 구워 먹은 손민국이 말했다.
“아아, 이런 날엔 한잔하고프네요.”
던전 공략 시 술은 절대 엄금이다.
적발 시 길드 강퇴는 물론, 협회에 보고되면 바로 각성자 등록 취소다.
작전 수행 능력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가 있으니 말이다.
“형님. 그거 아세요?”
손민국은 맞은편 나무에 기댄 채 물을 들이켜고 있는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온천랜드는 모두 독채로 운영되는데, 각 건물마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테라스가 있어요. 거기서 술 마시면 진짜 끝내주는데.”
달빛마저 가려버린 뿌연 하늘을 바라보던 이준혁이 피식 웃었다.
“너 양양 온천 홍보대사냐? 대체 얼마나 좋길래 계속 온천랜드 타령이냐.”
“정말이에요. 그 테라스에서 한잔하면 끝내준다니까요.”
“야, 그러고 보니 너…….”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는 손민국을 보며 이준혁이 눈을 깜빡였다.
“저번에 놀러 간 뒤로 여자친구랑 결혼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냐?”
“아, 그거요?
“평생 결혼 안 한다는 녀석이 커플 여행 간 뒤로 얼마 안 가 바로 결혼 발표했잖아.”
“아, 그게요.”
손민국이 부끄럽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때도 여기 온천에 놀러 왔었는데, 그날따라 여친이 이뻐 보이더라고요. 남은 인생을 다 바칠 만큼이요.”
“멍청한 놈. 어지간히 술을 많이 퍼 마셨구만.”
“아뇨. 그건 아닌데… 여행 와서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이쁜 애였나 싶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럽더라고요.”
“야, 지금 누구 염장 뒤집냐?”
“아뇨. 진짜인데.”
손민국이 억울한 표정을 짓자 이준혁이 바위에 벌러덩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쉬어둬. 언제 또 길로틴 크로커 무리가 올지 모르니까.”
야심한 시각. 온천랜드, 풍설정의 야외 테라스.
아름다운 꽃과 식물들이 곳곳에 피어 있고, 고즈넉한 정자 아래 온천이 흐르는 풍광이 보인다.
세세한 묘사 따윈 필요 없는 근사한 풍경 속, 천마는 정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좌식 테이블을 올려둔 곳엔 소주와 맥주, 그리고 간단한 안주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엔 긴 머리를 구름처럼 틀어 올린 장채원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모처럼 놀러 온 건데, 한잔 더 해야지.”
김찬원과 고은진은 잔뜩 술에 취한 탓에 일찍 잠이 들었다.
제비는 무명을 하루 종일 끌어안은 채 같이 놀고 있었다.
하지만 장채원은 술이 아쉬웠는지, 운공을 하고 있는 천마에게 찾아왔다. 양손에 술과 안주를 잔뜩 든 채.
“모처럼 휴가 겸 놀러 왔는데, 아쉽잖아.”
술과 안주까지 직접 들고 왔는데, 문전박대를 하기도 뭣했다.
구름이 가득 끼었던 하늘에 다시 보름달이 새하얗게 땅을 비추고 있었다. 안 그래도 술 한잔이 생각나기도 하던 차였다.
“그러고 보니 단둘이 술을 마셔보는 건 처음이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회식 때는 무명이 끼어 있었으니까.
“술은 술일 뿐이다. 둘이 마시나 셋이 마시나 상관없지.”
“무슨 소리야. 술자리는 분위기를 마시는 거라고. 머릿수가 다르면 분위기도 달라진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 천마가 맥주캔을 쭉 들이켰다.
하지만 청량감보다는 왠지 모를 텁텁함이 남아 있었다.
분위기.
장채원의 말대로 머릿수가 달라지니 분위기도 달라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귀 부근이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