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양양 신뢰 (1)
양양 국제공항 근처, 월광 온천랜드.
이곳에는 과거, 선녀들이 사용하는 오색온천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편백나무로 만든 노천탕 시설이 되어 있는 곳으로, 이 지역뿐 아니라 전국에서 온천을 즐기는 손님들이 몰려드는 명소이기도 했다.
또한 이 온천랜드엔 비밀이 있었는데, 바로 신들이 즐길 수 있는 노천탕도 있다는 점이었다.
끼익.
온천랜드 주차장에 하얀 승합차 한 대가 세워졌다.
“아하함.”
조수석에서 내리자마자 장채원이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뀨우우.
그녀의 목을 휘감고 있던 제비 역시 잠에서 깬 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꽃무늬가 들어간 파스텔톤의 시스루 원피스로 한껏 멋을 부린 장채원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천마에게 말했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김찬원과 고은진도 뒷문을 열고 차례로 내리고 있었다.
“천 씨 운전 솜씨가 갈수록 늘어가는구먼. 유리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통에 꾸벅 잠이 들어부렀네. 안 그려?”
뒷좌석에서 늘어지게 잔 것이 양심에 찔리는 듯 고은진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맞습니다. 사십 년째 마을버스를 운행하는 운전수 같지 말입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이다.
하지만 천마는 듣는 둥 마는 둥,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운전석에 멀뚱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뭐 해?”
장채원의 물음에 천마가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후열 중이다.”
“후열?”
“그렇다. 최근 읽었던 서적에 의하면, 장기간 운행 후 후열을 하지 않으면 터보차저라는 부품에 손상이 간다고 적혀 있더군.”
“터보?”
“그렇다. 설령 그 부품이 없더라도 냉각장치의 파손을 막기 위해 후열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묵묵히 듣고 있던 장채원이 눈을 껌뻑거렸다.
“수소 하이브리드 차도 후열이 필요한가?”
“수소 하이브리드? 그건 또 뭐냐.”
천마가 눈을 껌뻑이자 대시보드 위에 웅크리고 있던 무명이 대답했다.
[수소와 전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차량입니다.]
“왜 본좌가 읽는 것엔 그런 정보가 나와 있지 않나.”
[천마 님이 읽는 차량 관련 잡지는 수십 년 전에 발행된 것들입니다. 라마스와 같은 내연기관 차들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있죠.]
“그런 거였군.”
천마가 고개를 끄덕일 무렵,
“혹시 복복 인테리어에서 오신 천마 님과 일행분들이신가요?”
온천랜드의 안에 문이 열리며, 근무복을 입은 젊은 남성이 걸어 나왔다.
키가 매우 크고 눈빛이 맑았는데, 허리춤엔 너구리 꼬리와 같은 것이 칭칭 감겨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락드렸던 월광 온천랜드의 지배인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활기찬 미소를 보인 장채원이 온천랜드 외관을 둘러보며 입을 벌렸다.
“와, 소문대로 시설이 너무 좋아 보여요.”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지배인에 안내에 따라, 본관을 지나 좁은 길로 이동하자 향긋한 나무 향이 풍기는 다락 건물이 보였다.
월광 온천랜드에서 가장 비싼 독채, 풍설정(風雪亭)이었다.
“계시는 동안 이곳에서 편히 머무르시면 됩니다.”
“와아.”
-뀨우!
3층으로 된 풍설정을 올려다보던 장채원과 고은진이 입을 벌렸다.
대문과 담장이 따로 있는 별채 구조에 넓은 대청마루와 안마당, 그리고 창밖으론 아름다운 화원과 프라이빗한 온천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희가 쓰기엔 너무 넓은데요.”
내부를 둘러보던 장채원이 민망한 듯 미소 지었다.
“물론 휴가 겸해서 온 거긴 하지만…….”
사실 이번에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온천랜드에 온 건 휴가차 온 것이 아니라,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반라로 모델을 해준 천마 덕택에 뜨거운 영감을 얻은 소조신.
그는 약속대로 좋은 신뢰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건 다름 아닌 온천랜드 내부에 설치된 욕탕의 수리였다.
때마침 매장도 한가한데다 요새 천마와 고은진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
때문에 장채원은 겸사겸사 단합대회 겸 단체로 이곳에 방문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천마 님께서 머무시는 동안은 손님을 받지 않을 예정이거든요.”
“네에?”
장채원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말 서두마다 ‘천마’를 붙이는 거지? 복복 인테리어를 운영하는 사람은 난데.’
“욕탕 수리는 하루 반나절이면 끝나는데요.”
의문을 꾹 누른 장채원의 말에 지배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 괜찮습니다. 천마 님과 복복 인테리어 직원분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소조신 님께서 나흘 동안 저희 온천랜드를 통째로 빌리셨습니다.”
“소조신 님이요?”
순간 장채원은 왜 지배인이 ‘천마, 천마’거렸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천마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신뢰뿐만 아니라 모델 의뢰까지 마친 천마.
거기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소조신이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편견 없는 시선’을 선물로 주었다.
그 천마에겐 정신 나간 부하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소조신은 큰 감동을 느낀 것 같았다.
‘괴팍한 신이라는 소문 때문에 꺼려했는데. 약속대로 신뢰도 소개시켜 주고, 휴가까지 배려해 주시다니.’
장채원은 이번 일로 소조신에 대한 시선이 조금 바뀌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희는 이틀만 묵고 갈 생각이라.”
지배인은 장채원이 미안함을 느낀 탓이라 생각했는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공사를 하는 동안 손님들은 받을 수 없으니까요. 소조신 님이야 워낙 단골이시기도 하니, 염가로 서비스해 드렸습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거절할 명분도 없다.
장채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난 천마 일행은 온천랜드에서 제공한 조식을 간단히 먹었다.
“바로 작업을 시작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카운터로 간 장채원이 묻자 지배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지배인이 안내한 곳은 본관 건물 뒤, 숲속에 위치한 노천탕 부지였다.
전혀 사람의 발길이 닿을 것 같지 않은 숲 안쪽엔 흐르는 계곡 아래 고급스럽게 지어진 온천탕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맞은편엔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공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멋스러운 정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별도로 지어진 독채마다 작은 탕을 설치해 놓아, 가족이나 연인끼리 편히 온천욕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와, 숲속에 이런 곳이…….”
숲속 노천탕 풍광을 둘러보던 장채원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지금 머물고 있는 풍설정도 고급스럽기 짝이 없지만, 이 숲속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에 비하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기가 신 님들이 즐기는 온천탕…….”
그런데 여기저기 둘러보던 제비가 계곡 안쪽에 심어진 반짝이는 나무를 발견하고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뀨우? (저길 봐라냥?)
그 모습을 본 장채원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런데 저긴 뭔가요? 물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아.”
지배인이 자랑스런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곳에 심어진 오상나무(五色木)엔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핍니다. 그래서 저 탕 부근은 오색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이죠.”
“그렇군요.”
장채원이 아름다운 오상나무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천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땅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군. 아무래도 꽃 색깔 때문에 물 색깔이 바뀐 것 같지 않은데.”
천마의 중얼거림에 지배인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실 계곡 부근은 영지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요?”
“영지? 이곳이 말입니까?”
고은진이 흥미 있는 눈으로 바라보자 지배인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계곡 부근이지만요. 저곳이 그 유명한 선녀탕이거든요.”
지배인은 계곡 앞에 놓인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큰 바위가 목욕을 하기 위해 옷을 널어놓았다는 선녀암(仙女岩)이고요.”
“옷을 말입니까? 그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볼 텐데 말입니다.”
“맞습니다. 과거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옷을 편히 집어가게끔 놔둔 것이죠.”
고은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그네들이 옷을 집어가게끔 놔뒀단 말입니까?”
“네. 요즘은 선녀들도 연애하고 결혼합니다만, 옛날 선녀들은 결혼 금지였거든요. 그래서 결혼하고 싶은 선녀들이 일부러 이곳에 옷을 둔 겁니다. 물론 예비옷이지만요.”
지배인은 실소를 머금고 말했다.
“가져간 남성의 용모가 괜찮으면 옷을 내놓으라고 말하고, 아니면 그냥 버린 셈 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고은진은 이마를 긁적거렸다.
분명히 알고 있는 전래동화 이야기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
“이 선녀탕을 포함한 안쪽의 노천탕은 신 님이 머무는 곳이라 자재들이 모두 신령목과 비슷한 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무게는 훨씬 가볍고요.”
계곡을 쓰윽 둘러본 지배인이 노천탕 한켠에 쌓여 있는 다양한 타일과 목재 등을 가리켰다.
“손상된 타일과 낡은 목재를 철거해 주시고, 보수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탕 내부 외에 자잘한 마감 작업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고요.”
수북이 쌓여 있는 자재를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땅 위로 서기가 흐르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소조신 님에게 소개를 받긴 했지만, 사실 양양 부근엔 이만한 신뢰를 처리할 수 있는 영지 매장이 없거든요.”
멋쩍게 웃은 지배인이 천마와 일행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투명한 가을하늘 아래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천마는 손상된 부위를 철거하고, 고은진은 새로 보수할 곳으로 타일과 목재 등을 옮기고 있었다.
공구 세트를 펼친 김찬원은 고은진이 가져온 자재들을 알맞게 가공하고 있었다.
“시간이 들더라도, 기왕이면 조금 더 유려하고 독특하게 붙여볼까요?”
그리고 장채원은 보수라곤 하지만, 조금 더 아름다운 노천탕이 될 수 있도록 고심하고 있었다.
-뀨우!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비 씨? 전 온천 같은 건 즐기지 않는단 말입니… 아앗!]
무명을 휘감은 제비는 어느새 선녀탕에 들어가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흠. 생각보다 신력이 많이 들어갔나 벼.”
타일 커터와 테이블 톱을 이용해 연신 자재를 가공하던 김찬원이 잠시 손을 멈추었다.
“장 사장. 아무래도 내일쯤 돼야 끝낼 수 있겠는디?”
“괜찮아요. 그래도 은총을 스무 개나 받았는데 하루 안에 끝내면 좀 미안하죠. 천천히 해요.”
“으음. 내는 은총 같은 거 필요 없는디.”
다시 테이블 톱의 손잡이를 쥔 김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채원이 은총을 받으면 선업(善業)으로 쌓인다.
천마는 신력으로 전환되어 내공을 얻는다. 하지만 상급요괴인 김찬원이 은총을 얻으면 도를 닦은 것처럼 수명이 대폭 연장된다.
딱히 수명 같은 걸 늘리고 싶지 않은 김찬원은 신뢰를 기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명 따위는 늘려봤자 소용없고 말여.”
신뢰를 맡으면 보수로 받은 은총은 자연히 알아서 분배된다.
네 명이 스무 개의 은총을 받았으니 김찬원은 원하지도 않은 다섯 개의 은총을 받게 된 셈이다.
“죄송해요.”
김찬원의 복잡한 마음과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장채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요.”
“으응? 아녀, 아녀.”
“그냥 휴가라고 생각해 주세요.”
장채원이 예쁘게 미소 짓자 김찬원이 두 손을 휘휘 저었다.
“나도 장 사장이랑 천 씨랑 한번 풍광 좋은 곳에서 한잔하고 싶었구먼. 때마침 좋은 기회지.”
그리고 열심히 목재를 운반하는 고은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 은진 씨도 복복 인테리어 직원잉께.”
“김 씨. 자재에 여유가 있나.”
그때 열심히 철거를 하던 천마가 김찬원을 향해 말했다.
“기왕 보수하는 거, 나중에 저 정자도 조금 보수하고 싶은데.”
최근 김찬원에게 목공 기술을 배운 탓인지, 천마는 공구를 만지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그려그려. 나중에 내랑 같이 한번 해보자고.”
“뭡니까? 저도 같이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고은진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서자 김찬원이 손을 저었다.
“응? 아녀. 이건 맡은 의뢰 외에 우리가 따로 수리를 해주는 겅께…….”
“근육몬이 한다면 저도 해야겠습니다.”
고은진은 천마가 하는 일은 무조건 같이해야 직성이 풀렸다.
고된 노동일에도 경쟁심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김찬원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이따 같이하자고.”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 본관 부근의 노천탕.
일을 마친 천마와 김찬원이 나란히 앉아 몸을 담그고 있었다.
물론 옷을 입고 즐기는 노천탕이기 때문에 남녀가 같이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장채원과 고은진은 풍설정 내부에 만들어진 고급스런 온천탕을 이용했다.
“어뗘? 목욕탕하고는 또 다른 정취가 있지?”
김찬원의 물음에 눈을 감고 있던 천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렇군.”
몸을 씻는 것조차 번거롭게 생각했던 천마.
목욕탕에 가서도 별반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런 온천에 몸을 담그니 탕욕의 즐거움을 알 것도 같다.
느긋하게 앉아 있던 천마는 문득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김찬원의 시선을 느꼈다.
“할 말이 있나.”
“아프진 않았어?”
“무슨 말인가.”
“그 상처들 말여.”
기묘한 광택이 흐르는 천마의 몸 주변엔 온갖 상처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어느 부위는 피부색이 변한 곳도 있었고, 어느 부위는 짐승의 발톱이 스쳐 지나간 듯한 곳도 있었다.
“전혀 아프지 않다.”
몸에 새겨진 상처를 쓱 바라보던 천마가 덤덤하게 말했다.
“금강지체에 이르면 어떠한 상처도 쉽게 아물고 회복되지. 하지만 그전에 입은 상처들은 없어지지 않는군.”
“이쪽에는 좋은 병원이 수두룩 혀. 원하면 흉터 따윈 깨끗하게 없앨 수 있어.”
“본좌가 이 흉터를 없애려 했다면, 예전에 없앴을 것이다.”
“으응? 일부러 안 없앤 겨?”
“그렇다.”
팔짱을 낀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본좌는 지금까지 스물다섯 번의 탈태환골을 겪었지. 그때마다 피부도 아기처럼 다시 깨끗하게 재생할 수 있었다.”
“근데 어째서 안 한 겨?”
“상처를 없앴다면, 지금까지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을 거라 생각될 수도 있잖나.”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여.”
“들어봤자 재미없는 말이다.”
“그래도 말혀봐. 왜 상처를 치료 안 한 건디.”
김찬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천마가 묘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본좌는 무림출도 이후, 수많은 싸움을 해왔다.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초반엔 상당히 극심한 부상을 입기도 했지.”
“으음.”
“하지만 십 년 후, 본좌는 한 치의 발전도 이룩할 수 없을 만큼, 무학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최근엔 정천이라는 절세 무학기재가 나타나 본좌와 칠주야 정도를 겨룰 만한 역량을 갖추긴 했지만… 부상을 입힐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
오랜 시간, 절대자의 생활을 영위해 온 천마의 표정엔 지루함마저 엿보였다.
“아마 상처를, 깨끗한 상태로 세월이 흘렀다면 본좌는 자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한계를 극복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니까… 몸에 상처를 안 없앤 이유가, 계속 자만할까 봐 놔뒀다는 겨?”
“그렇다.”
김찬원은 침음을 흘렸다.
적수가 없음에도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며, 한계를 돌파하려는 천마.
그 집착과 열망은 이 평화로운 세계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이었다.
“그렇구먼.”
하지만 김찬원은 빙그레 웃었다.
언젠가 천마를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천마 역시 이 세계의 평화로운 삶에 적응할 날이 올 것이다.
김찬원은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