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장채원과 고은진의 한가한 휴일 (4)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오래된 상가.
그 지하엔 조선시대 주막을 그려 넣은 간판이 세워진 전통 주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와,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주점의 내부를 살피던 장채원이 탄성을 질렀다.
건물 외관과는 달리 주점 내부는 마치 사극 세트장처럼 단아하게 꾸며져 있다.
“진짜 온갖 술집은 다 다녀봤는데. 이런 골목 구석에 멋들어진 전통 주점이 꼭꼭 숨겨져 있는 줄은 몰랐네.”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는 장채원을 보며 고은진이 코를 훔쳤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주점입니다. 이곳 사장님이 직접 담은 호박 막걸리가 정말 끝내주지 말입니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막걸리를 마셔야겠네요.”
“막걸리?”
천마가 묘한 표정을 짓자 어깨에 매달려 있던 무명이 말했다.
[우리나라 전통 술 중 하납니다. 다른 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도수가 낮으며, 달달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일품이죠.]
“흠.”
천마가 눈을 번뜩이자 장채원이 종업원을 불렀다.
“우선 여기 호박 막걸리 열 주전자. 그리고 해물파전, 김치전, 모듬전, 오돌뼈, 치즈불닭 주세요.”
천마는 장채원과의 약속을 지켰다.
술과 안주가 나온 이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막걸리를 들이켰다.
“크으.”
커다란 대접에 따른 호박 막걸리를 단숨에 비운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도수는 낮고 음료처럼 달달한데, 묘하게도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뿐만 아니라 아직 안주를 먹지 않았음에도 허기가 단숨에 메워지는 느낌이었다.
“좋군.”
꼴꼴꼴꼴.
다시 새 막걸리를 대접에 부은 천마가 연신 막걸리를 들이켰다.
고은진과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장채원은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넌 무슨 막걸리랑 원수졌냐? 안주 좀 먹으면서 마셔.”
“알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천마는 여전히 막걸리만 들이켰다.
지금까지 마셔봤던 술과는 전혀 다른 맛과 풍미를 가진 막걸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린 것 같았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테이블 아래에는 막걸리를 담았던 술주전자가 수북이 쌓였다.
천마가 들이부은 막걸리는 무려 스무 주전자. 고은진도 열 주전자의 막걸리를 비웠다.
결국 남은 술주전자가 없자, 종업원은 비어 있는 주전자에 막걸리를 다시 채우고 갖다주길 반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자리는 고요해졌다.
세 사람 다 술에 취했지만 갈수록 대화는 적어졌고,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테이블 구석에 앉아 있는 무명은 지루한지 수면 모드로 들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은진 씨, 막걸리 좋아하시나 봐요.”
긴 침묵을 깬 건 나직한 장채원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고은진이 술기운이 오른 뺨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가장 즐겨 마시는 술이 막걸리지 말입니다.”
“그랬군요. 그건 몰랐네요.”
그러다 문득 장채원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아까 그 이야기가 뭔지 물어봐도 돼요?”
“뭐가 말입니까?”
“배고픈 사람을 가만 보지 못한다는 말이요. 왠지 뭔가 의미가 있는 말 같아서…….”
순간 고은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마도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쓸데없는 걸 물어봤네요.”
당황한 장채원이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냥 술이나 마셔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거 아니지 말입니다.”
진한 알콜 향이 섞여 있는 한숨을 내뱉은 고은진이 막걸리 잔을 채우며 말했다.
“어딜 가도 배고픔이라는 단어는 똑같은데, 제가 괜한 의미를 두는 것이니 말입니다.”
두 뺨이 붉어진 채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는 고은진.
그녀는 분명 취한 것이다.
하지만 술에 취한 건지, 과거의 기억에 취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전에 있던 직장에서 있었던 일인가 보네요.”
장채원은 고은진이 민간군사기업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민간군사기업.
한마디로 고은진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용병 일을 했다. 그 생활을 오래 해서 군대식 말투도 입에 배어버렸다.
“직장은 선택의 여지나 있지, 저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 말입니다.”
고은진의 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억지로 끌려갔으니 말입니다”
“끌려가다뇨?”
“저희 일족은 성인이 되면 일족이 운영하는 민간군사기업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의무적으로 3년간 복무를 해야 하지 말입니다.”
“그, 그런 규칙이 있었어요?”
장채원이 입을 벌렸다.
상위요괴, 각각의 일족들은 그들만의 규칙이나 엄한 율법들을 고수하고 있다.
그녀는 인테리어나 신계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지만, 각 일족만의 규칙이나 규율 따위에 대해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을 했었나요?”
이 말은 장채원이 줄곧 고은진에 묻고 싶었던 말이다.
일전에 고은영과 장형욱의 상담 덕분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주워듣긴 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냥, 용병들이 하는 흔한 일이었지 말입니다.”
막걸리를 쭉 들이켠 고은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제3 세계에서 정규군을 도와 반군을 진압하거나… 테러를 저지르는 국제범죄 단체를 소탕하는 거. 그러다… 짬이 쌓이고 나서부턴, 요인 경호를 했지 말입니다.”
“그랬군요.”
“뭐, 억지로 한 것뿐이니… 정도껏 하고 금방 관뒀지만 말입니다.”
막걸리를 훌쩍 들이켠 고은진의 중얼거림에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때, 지금까지 줄곧 침묵하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희한한 일이군.”
“응?”
“용병이라면 회색 눈깔에겐 천직이 아닌가.”
천마의 중얼거림에 장채원은 도끼눈을 뜨고 쏘아붙였다.
“방금 한 말 못 들었어? 억지로 끌려갔다잖아.”
“끌려간 건 끌려간 것일 뿐. 적성과 소질과는 관계가 없지.”
빈 잔에 막걸리를 가득 채운 천마가 고은진을 보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않나, 회색 눈깔.”
“…….”
반박하지 못하는 고은진을 보자 장채원은 눈을 깜빡였다.
“그 일이 적성에 맞았어요?”
헛기침을 한 고은진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원래 저희 일족은 전투의 프로라고 할 수 있어서… 싸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입니다.”
장채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은진은 던전에 있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조차 싫어할 만큼 전투를 싫어하건만.
막상 용병 생활이 적성에 맞았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을 관둔 건 적성하곤 관계가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장채원을 보자, 고은진이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중간에 생각이 바뀐 것이지 말입니다.”
“그랬군요.”
심경의 변화.
고은진은 세계를 누비며 용병 일을 하던 중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느꼈던 것이다.
“생각이 바뀐 뒤로 일족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던전 식재료 전문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말입니다.”
“그럼 그 생각이 바뀐 이유를 들어보도록 하지.”
또다시 천마가 끼어들자 고은진이 눈을 부릅떴다.
“근육몬은 남의 사정에 관심 끊지 말입니다.”
“겁이 나서 도망친 건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고은진의 회색 눈동자에서 살기가 일어났지만 천마는 오히려 픽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시시한 이유겠군.”
보다 못한 장채원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천마. 아까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지?”
“깜빡 잊었군.”
막걸리를 쭉 들이켠 천마가 나직이 말했다.
“누가 들어도 시답잖은 이유일 게 뻔한데. 실컷 궁금하게 해놓고, 사연 있는 비구니처럼 미적거리며 과거를 숨기는 게 꼴보기 싫었을 뿐이다.”
으득.
날카로운 이를 꽉 깨문 고은진이 눈을 번뜩였다.
“근육몬이 뭘 안다고 지껄이십니까?”
“다 안다. 본좌는 그 계통의 전문가니까.”
“웃기지 마십쇼!”
벌떡 일어난 고은진의 회색 눈동자에선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인 기계로 키워진 소년병들을 상대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전장에 내몰린 아이들을 처리해 본 적이 있냔 말입니다.”
“있다.”
천마는 고은진을 바라보며 덤덤히 말했다.
“그런 일은 무림에서 흔하지. 직업 살수들은 보통 어릴 때부터 살교(殺敎)들에게 납치되거나 팔려나가 살수가 되니까.”
천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은진을 바라보았다.
“고작 그런 일 때문이었나.”
부들부들.
몸을 부르르 떨던 고은진이 또다시 버럭 소리쳤다.
“그럼 부모를 잡아먹은 몬스터를 사냥해, 그 고기를 먹는 3세계의 아이들을 본 적이나 있습니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먹어야 하는 아이들의 고통을 본 적이 있냔 말입니다!”
제3 세계엔 세이프던전은 거의 없다.
세이프던전을 만들기 위해선 대량의 병력을 투입해 던전을 안정화를 시켜야 하는데, 내전에 시달리는 나라엔 그럴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풍족한 던전 식재료나 값비싼 유물이 나오는 던전은 국가 혹은 반군들이 독점했다.
결국 가난한 자들은 목숨을 걸고 가변던전에 들어가거나, 혹은 거리에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잡아먹어야 했다.
“그곳의 아이들은 방금 가족을 죽여 배 속에 삼긴 몬스터를, 살기 위해 잡아먹어야 합니다!”
그 당시를 떠올리는 듯 고은진이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제가 고작 해줄 수 있는 게 뭔지 압니까? 몬스터의 누린내라도 없애기 위해 풀이라도 뜯어 넣어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
“테러 조직 처리? 반군 처리? 우리 일족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전쟁은 계속되고, 던전은 계속 불완전해지길 바라는 겁니다. 그래야 끝없는 싸움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고은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천마에게 소리쳤다.
“그 상황에서 거길 나오는 것 외엔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음속에 응어리를 입 밖으로 내뱉은 고은진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렀다.
“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천마는 식지를 천천히 뻗었다.
그러자 노란 번개가 잠시 번뜩거리는 듯하더니, 고은진의 전중혈을 가볍게 파고들었다.
파파팍.
지풍을 맞자 고은진은 피로가 몰려오는 듯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갑자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천마, 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입을 벌렸다.
그제서야 천마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설마 그때, 듀라한 사건처럼 은진 씨의 정신을 지배했던 거야?”
“빚을 갚은 것뿐이다.”
낮게 코웃음을 친 그는 졸고 있는 고은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어리는 풀었으니, 위로는 점주가 해주면 된다.”
“은진 씨도 듀라한에 시달린 남성처럼 그랬어?”
“그렇다.”
천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은진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속에 저런 응어리를 누른 채 지냈으니, 병이 생겼지.”
“병?”
“울화(鬱火)를 참는 것은 만병의 근원이다. 풀지 못한 감정이 쌓이면 기의 순환을 막고, 온갖 잡병이 생기지.”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 고은진을 바라보던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회색 눈깔은 그 울화로 인해 전중혈이 막혀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흉통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을 테지.”
장채원은 입을 쩍 벌렸다.
분명 봉타봉타에서 저녁을 먹으며 대화할 때, 고은진이 가슴 통증과 불면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는 수면 모드에 들어간 무명을 품속에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각이면 깨어날 거다. 그때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밤새 코가 삐뚤어지게 술이나 마셔라. 그럼 나아질 거다.”
“천마, 너…….”
장채원은 진심으로 놀랐다.
세상 인정머리 없는 천마. 하지만 가슴은 따뜻한 도시 남자였던가?
“말했잖나. 본좌는 물 한 모금의 호의도 우물을 파 보답한다고.”
무림엔 천마에게 호의를 베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그의 존재는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자와 같은 존재였으니.
“천마야.”
장채원은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천마가 질색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말하지 않았나. 그저 호의를 갚은 것뿐이다.”
그리고는 무명을 안은 채 조용히 사라졌다.
“저 녀석…….”
떠나가는 천마를 바라보며 장채원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래도 저래도 진짜 후임자처럼 챙겨주네.”
이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늘 험한 말을 내뱉지만, 천마는 고은진 역시 자신의 후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그의 붉은 눈동자에 고은진이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이다.
“근데…….”
잔에 담긴 막걸리를 쭉 들이켠 장채원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너무 늦잖아?”
그렇다.
지금까지 줄곧 천마와 고은진이 으르렁대는 것을 바라보고 얼러주던 장채원.
그녀는 이미 만성위장병 진단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채원이 조용히 술을 들이켜고 있는데 으으 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진이 눈을 떴다.
“끙, 좀 과음을 한 것 같지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잠깐 잠들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래요?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마셔요.”
장채원은 천마의 말대로, 고은진과 밤새 술을 주고받으면서 남아 있는 응어리를 풀어주었다.
깊은 새벽이 될 때까지, 조용한 전통 술집 내부엔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장채원과 고은진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