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장채원과 고은진의 한가한 휴일 (2)
“네?”
“그쪽 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정중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태도다.
TV에서 나오는 영화배우처럼 잘생기고 당당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장채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당당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남성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연락처…만이라도 좀 주실 순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맘에 안 드시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저, 삼봉 회계법인의 회계삽니다. 나쁜 사람 아니에요.”
명함을 내민 남성이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이런 데에서 헌팅하는 것도 처음이고요. 그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용기낸 겁니다.”
“죄송합니다.”
자신감이 과한 탓이었을까?
거절을 당한 남성이 안타까운 자책골을 넣기 시작했다.
“티가 안 나겠지만 저는 일반 요괴들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존재입니다. 혹시, 뱀파이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더 싫어!’
웃고 있는 장채원의 눈꼬리가 떨려왔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요괴가 바로 뱀파이어다. 건방지고,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피냄새는 풀풀 풍기고…….
“죄송하지만 제가 피냄새 알러지가 있어서….”
장채원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후로도 마켓을 돌아다닐 때마다 잘생긴 남성들이 한 번씩 말을 걸었다.
그때마다 장채원의 대답은 ‘죄송합니다.’였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어지간한 유명한 영화배우보다 제가 훨씬 낫지 않나요?”
남성들이 울상을 지을 때마다 장채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 여하튼 죄송해요.”
“네에…….”
‘하여간 꽃단장만 하면 이 난리라니까.’
또다시 고개를 숙인 채 뒤돌아 걷는 남성을 보자, 장채원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하튼 미안, 이 누나가 눈이 좀 높아서.’
금사빠이긴 하지만, 극도의 얼빠인 그녀의 남자 보는 눈은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직업은 최소, 대지유신 정도. 용모는 남신(男神)들 중에서도 용모가 눈부시다는 청연신쯤 되어야 금사빠가 발동하는 것이다.
‘뭐, 잘생긴 걸로 밀어붙이려면 김빠진 천마 수준 정도는 돼야지.’
김(근육) 빠진 천마.
탁 풀어진 눈동자, 서늘한 눈매, 아찔하면서도 위험스러운 분위기. 정말이지, 용모 하나만큼은 그쪽이 최고라고나 할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언제부터 천마가 미남의 기준이 된 거지?
피식 웃은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구석진 골목에 늘어진 매대를 둘러볼 찰나.
“어라?”
작은 후미진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그림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엔 갈라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근육에 민소매 도복을 입은 남성이 돗자리 위에 단정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옆엔 둥그런 나노봇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천마와 무명이었다.
“뭐야? 여기 네가 왜 있어?”
[장채원 님?]
장채원을 발견한 무명이 눈 센서를 깜빡이자, 고개를 든 천마가 덤덤하게 말했다.
“점주가 어쩐 일인가.”
“나야 구경 왔지. 근데 그 꼴이 뭐야?
천마는 누런 왕골 돗자리 위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돋보기만 들고 있으면 딱 점쟁이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해? 사주팔자라도 봐주는 거야?”
“사주팔자라니. 옆에 적혀 있는 글귀가 안 보이나.”
“글귀?”
그제서야 장채원은 천마의 옆에 빼곡히 세워진 목판에 적힌 글자들을 발견했다.
-천혈마제(天血魔帝)의 유진, 천혈비마록(天血秘魔錄)이 단돈 1억!
-고통 없이 손쉽게 보내버릴 수 있는 사제(死帝)의 극섬살수총요(克閃殺手總要)가 3억.
-원수를 졌나? 원한을 풀고 싶나?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보내버릴 수 있는 장상문(葬喪門)의 저주 비결이 이곳에 모두 들어 있다! 원혼저주혼명(冤魂咀呪魂鳴)이 단돈…….
벽에 세워진 목판들을 바라보는 장채원의 눈은 지진이 난 것처럼 위아래로 흔들렸다.
일필휘지로 휘갈긴 초서체 한문들을 내가 왜 읽을 수 있는 거지? 아니,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다 무슨 소린데.”
“알 거 없다.”
“고통 없이 손쉽게 보내버리고 싶다니? 이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점주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해당 사항이 없는 것들이 뭐냐고.”
집요한 장채원의 시선에 천마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명이 앉아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최근에 구입한 듯, 새 노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비급을 판매 중이다.”
“비급?”
“그렇다. 본좌가 친히 적어놓은 것들이지. 소장 가치도 충분하다.”
장채원의 부릅뜬 눈은 천마가 아닌 천마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무명에게로 옮겨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천마가 여기서 이런 걸 팔고 있는 건데?”
[그게… 장채원 님이 안 계실 때, 신지 관리팀의 동 차장님께서 매장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계에서 주최하는 플리마켓이 열린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판매대금을 기부하면 신력을 얻을 수 있다더군.”
무명의 말을 냉큼 자른 천마가 야심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1억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동꽃 하나씩이라고 했다. 이 비급을 다 팔면 자그마치 35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거지.”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장채원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노트를 바라보았다.
은총은 탐나지만, 딱히 팔 것이 없던 천마.
그는 무공절기, 아니, 사람을 골로 보내버리는 비법을 팔아 내공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점주, 주변엔 기혼자 지인들은 없나?”
“기혼자? 왜?”
“이 비급들은 약해빠진 문관의 자식이라던가, 앞으로 던전에서 활약하는 걸 꿈꾸는 소년들에겐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천마는 옆에 놓인 검정색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이건 적청혈마(赤靑血魔)의 흡혈귀인진생록(吸血鬼引眞生錄)이다. 약해 빠진 육체를 피로 개조할 수 있는 비법이 수록되어 있지.”
분명 검정색 노트였건만, 천마의 설명이 곁들어지자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아니면 도살광마(屠殺狂魔)의 착란살파검보(錯亂殺派劍譜)는 어떠냐? 익히면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칼 한 자루만 있으면 어지간한 것들을 썰어버리는 덴 문제가 없을 거다.”
이번엔 내민 노트에서는 왠지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풍기는 것만 같다.
“너, 이 나사 빠진 녀석. 이런 걸 책이라고……!”
화가 난 장채원이 이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칠 무렵,
[장채원 님.]
돗자리에 앉아 있던 무명이 풀쩍 뛰어올라 장채원에게 속삭였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무명, 너는 저런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천마 님께서 말씀하시길, 생애 처음으로 무언가를 판다고 했습니다. 이 플리마켓 문화도 천마 님에겐 좋은 취미 활동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 흉악한 내용들이 퍼지면 어떡해? 진짜일 수도 있잖아?”
[어차피 팔릴 책들도 아닙니다. 단정한 해서체도 아닌, 초서체로 휘갈겨 쓴 탓에 저조차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니까요.]
그때, 중년남성의 손을 잡은 채 길을 걸어가던 소년이 천마의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 나 이 책 사주세요.”
“으응? 책?”
“네. 재밌을 거 같아요.”
중년남성은 천마가 목판에 새겨놓은 글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보내버릴 수 있는 장상문의 저주 비결이 이곳에 모두 들어 있다?”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놀랍게도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부자는 천마가 휘갈겨 쓴 한문을 용케 읽고 있었다.
“추리소설인가.”
중년남성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뭐야? 중국인?’
잔뜩 긴장한 장채원의 옆으로 중년남성이 다가와 천마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책인가요?”
“잘 왔다.”
천마는 중년남성의 옆에 있는 소년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들은 청소년기에 딱 읽으면 좋을 만한 살학비법서(殺學秘法書)… 어억.”
반색하며 설명하던 천마의 목이 장채원의 수도치기에 비스듬하게 꺾였다.
“뭘 하는 건가!”
천마의 항의에 장채원이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닥쳐.”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버지와 아들을 향해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하! 죄송해요. 이거 19금이라서, 아이들이 읽기에는 너무 잔혹한 소설이거든요.”
“으음. 그런가요.”
중년남성은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번뜩였다.
“그럼 저나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엥?’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 쪽도 어지간히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쌓아둔 책을 들여다보던 남성은 그제서야 그 밑에 적혀 있는 가격표를 보고 펄쩍 뛰었다.
“어? 이거 동그라미 잘못 적힌 것 같은데.”
[5억 맞습니다. 고객님.]
장채원에게 입이 틀어막힌 천마를 대신해 무명이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장난 아니고, 우스개로 적은 것도 아니고, 사실은 5만 원을 표시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원화 가치로 정확히 5억. 달러로는 오늘 환율로 계산해 42만 3011달러입니다. 외상은 사절이고 카드 결제는 불가능합니다. 대지유신 님이시라면 은총 다섯 개로도 지불 가능하고요.]
딱 부러지는 무명의 설명에 중년남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
그리고 쥐고 있던 아들의 손을 이끌더니, 말없이 반대편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거 보십시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장채원의 어깨에 다시 올라탄 무명이 또다시 속삭였다.
[지금까지 여러 번 고객들이 왔다 갔지만, 한 번도 팔린 적이 없습니다. 팔릴 일도 없고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아니, 애당초 저 허접한 노트에 휘갈긴 글자들을 몇억씩 주고 살 미친놈은 세상에 없었다.
노기등등한 장채원의 눈빛이 점차 부드러워지자 무명이 다시 속삭였다.
[그냥 천마 님께서 잠깐이나마 즐길 수 있는 놀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장채원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서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정말로 저 가격에 자신이 쓴 비급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으음.”
침음을 한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하도록 해. 그럼 난 신경 안 쓸 테니까.”
“잘 생각했다. 본좌의 장사를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라.”
“알았어. 갈게.”
“어서 가라.”
손을 휘휘 저은 천마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 돗자리에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때때로 요괴들이 지나갈 때마다 천마는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구입하라. 구입하라. 구입하라.
천마의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눈빛을 마주한 요괴들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저 바보 녀석.’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채원은 낮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플리마켓이 열리는 공원을 빠져나오자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던 장채원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밥을 먹고 들어갈 것인가.
“모처럼이니까…….”
요리를 하는 것도 귀찮고 배달 음식도 지겹다.
잠시 고민하던 장채원은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이 근처의 맛집을 떠올렸다.
“자리, 있으려나?”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항상 붐비는 맛집들은 식사 시간에 관계없이 긴 줄이 늘어져 있으니까.
“돈이 있어도 맛있는 걸 먹을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인데.”
아닐까 다를까.
골목에 위치한 작은 파스타 매장 앞엔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당연히 혼자 서 있는 사람은 없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있거나, 어깨를 나란히 한 연인들이다.
“그렇지, 뭐.”
길게 늘어진 줄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혼밥에 꽤나 잔뼈가 굵은 그녀였지만, 저렇게 줄이 늘어진 곳에서 혼자 기다렸다 밥을 먹고 싶진 않았다.
‘천마라도 부를까?’
천마의 얼굴을 떠올린 장채원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 그 이상한 책을 팔겠다고 마켓이 끝날 때까지 버틸 것이 분명하다.
멀리서 줄을 바라보던 장채원은 결국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 재밌었어.”
나 홀로 데이트의 끝은 언제나 커피숍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꽤나 재밌고 알차게 보낸 편이었다.
그렇게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사장님?”
맞은편 골목에서 낯익은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고은진이었다.
“은진 씨? 어쩐 일이에요?”
“여기 밥집이 유명하다고 해서 밥 먹으로 왔지 말임다.”
고은진이 코를 훔치며 씩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엔 아무도 없다.
“혼자서요?”
“혼자 오면 안 됩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머쓱한 미소를 짓던 장채원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그럼 같이 먹을까요?”
“저랑 같이 말임까?”
“네에. 모처럼이니 제가 살게요.”
“저야… 땡큐지 말입니다.”
아, 역시 나오기 잘했어.
내심 쾌재를 부른 장채원이 고은진과 함께 줄을 섰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고즈넉한 저녁.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의 맛집 창밖으로 장채원과 고은진의 밥 먹는 모습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