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71화 (171/285)

제171화. 장채원과 고은진의 한가한 휴일 (1)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둥그런 응접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천마는 뜨거운 녹차 한 모금을 마셨다.

“후음.”

굳은 목을 살짝 돌린 천마는 잠시 덮어두었던 책을 집었다.

장채원은 견적을 내러 간 상태였고, 김찬원은 타일 시공을, 고은진은 서류를 등기로 보내기 위해 우체국으로 간 상태였다.

“후룩.”

천마가 남아 있는 찻물을 훌훌 마실 무렵,

딸랑.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매장 입구에서 환한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샤라라랑.

맑은 소리와 함께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지더니 이내, 매끈한 정장을 입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원이었다.

‘이젠 대놓고 저렇게 나타나는군.’

처음 만났을 당시엔 평범한 인간처럼 들어오더니, 요즘 들어서는 ‘나도 신이오’라는 느낌으로 엄청난 효과를 주면서 등장했다.

“아, 천마 님.”

천마와 시선이 마주친 동원이 아침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음.”

“누님은 안 계시는 건가요?”

매장을 둘러보던 동원이 머리를 긁적이자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견적 내러 갔다.”

“아, 그렇군요.”

슬쩍 입구 쪽을 바라보던 동원이 슬그머니 천마의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천마 님.”

“…….”

“혹시 플리마켓에 관심 없으신가요?”

“그게 뭐냐.”

“안 쓰는 물건을 공원 등에 가지고 나와 매매나 교환하는 벼룩시장 같은 겁니다. 아, 그러니까 벼룩시장이라는 건…….”

동원의 설명이 이어지자 천마는 손을 내저었다.

“안다. 좌판을 열어 쓰던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더냐.”

“오, 아시는군요.”

“TV에서 봤다.”

쓸데없는 프로그램을 본다 어쩐다 해도 천마는 TV를 통해 착실히 이곳의 문화와 지식을 익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 저희 신계 주최로 요계 플리마켓을 여는데요, 영지 매장 쪽에서 참가하시는 분들이 적어서요.”

헛기침을 한 동원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혹시 천마 님께서 한번 참석해 주시면 안 될까요?”

“본좌더러 좌판을 열라는 거냐.”

“안 될까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천마가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좌는 마도의 하늘이니라.”

“네?”

“무림 역사상 최초로 무림일통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으며, 십만 팔천 종의 마종방학과 팔만 이천 종의 정종무학과 세외기학까지 통달하여, 새로운 무학 체계를 완성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는 전입미답의 경지에 이르러, 무량경지라는 새로운 경지를 창안한 본좌더러…….”

탁.

던지듯 책을 내려놓은 천마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좌판을 열어 물건이나 팔라는 거냐.”

“그게, 플리마켓에서 얻은 수익을 기부하면 은총, 그러니까 신력을 얻을 수 있거든요.”

“…….”

잠시 정적이 흘렀다.

테이블에 내려놓은 책을 다시 집어 든 천마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부라는 건 좋은 것이라지.”

“네?”

“더군다나 액수가 클수록 더욱 큰 기쁨을 느낀다고 하더군.”

팔짱을 낀 천마가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였다.

“물론 그 액수는 본좌의 신력이 될 테지만.”

“…참석하신다는 말씀이시죠?”

천마는 대답 대신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동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계 플리마켓에는 일정한 숫자 이상의 영지 매장이 참석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자재도 팔고 상담도 할 수 있는 인테리어 전문가 매대가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이번 주 일요일에 열릴 테니, 판매할 물품이라던가, 고객들을 위한 상담 내용 같은 걸 미리 준비해 주세요. 수익은 모두 기부되지만 모두 신력으로 되돌려 받게 되니, 최대한 좋은 값에 팔 수 있는 자재라던가, 물건들도 준비해 주시고요.”

“좋은 값이라… 알겠다.”

“그럼 천마 님의 이름으로 자리를 만들어놓겠습니다.”

“본좌 이름?”

천마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무렵,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커다란 수첩을 든 장채원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어? 어쩐 일이야?”

장채원이 눈을 크게 뜨자, 동원이 두 손을 모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누님. 이번 주 일요일에 열리는 요계 플리마켓 말인데요.”

“싫어. 나 그런 거 안 한다니까.”

그녀가 단칼에 말을 자르자 동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아, 겸사겸사요.”

방실방실 미소를 짓던 동원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어, 그래.”

샤라라라랑.

동원은 아까보다 더욱 화려한 이펙트 효과를 사용하더니, 이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장채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가 웬일이지? 평소 같으면 입에서 쉰내가 나도록 조를 텐데.”

따르르릉.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장채원은 재빨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복복 인테리어입니다. 아, 사장님! 아아, 깜빡했네요. 제가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

전화 응대를 하던 그녀는 이내 책상에 앉아 정신없이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마는 팔짱을 낀 채 동원이 사라진 곳을 망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좋은 값에 판매할 물건이라.”

나직이 중얼거리던 천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두 눈을 번뜩였다.

일요일.

복복 인테리어의 뒤편 내당.

벅벅벅.

향긋한 나무 향이 풍기는 마룻바닥에 옆으로 드러누운 장채원은 TV를 보며 발바닥을 긁었다.

“아함.”

회색 트레이닝복을 배까지 올려 입은 그녀는 하품을 하며 머리까지 긁적였다.

“딱히 재밌는 프로가 없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열려 있는 대청마루 문 너머로 아름답게 꾸며진 화원이 보였다.

정오 무렵의 따스한 햇살이 무지개처럼 쏟아졌고,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살랑 풀어와 꽃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날씨 좋구먼.”

두 눈을 가늘게 뜬 장채원의 입술에 자글자글 주름이 갔다.

“이렇게 좋은 날씨엔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데이트.”

언제든 외출할 준비가 되어 있건만, 아쉽게도 데이트 상대가 없다.

“집에만 있자니 좀이 쑤신데.”

고개를 돌리니 기분 좋은 햇살과 바람을 만끽하려는 듯, 제비 역시 어느새 밖에 설치된 만마소궁 안에 들어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외출, 하지 않겠는가.

그때, 굵고 엄숙한 성우의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시선을 돌리자 화면에는 때마침 예쁘게 치장한 여배우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쇼핑하는 광고 장면이 나왔다.

“광고 멘트가 뭐 저래.”

인상을 쓴 장채원은 몸을 일으켜 거실에 걸려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거울 속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고, 눈동자는 반쯤 감겨 있는 동네 백수가 나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좋아.”

쏴아아아아.

욕실로 들어가 깨끗이 씻고 나온 그녀는 열심히 단장을 시작했다.

화장대에 앉아 화사하게 화장까지 한 장채원은 외출복을 고르기 시작했다.

“음.”

발랄한 느낌의 플레어스커트에 하얀 프릴 장식이 된 자켓을 입고 나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좋아.”

어느새 거울 속에는 후줄근한 백수 대신 화려한 도시 미녀가 싱긋 웃고 있었다.

“이러고 소개팅이나 했음 딱 좋겠는데.”

아쉬운 마음이 솟구치자 절로 어깨가 늘어졌다.

못 말리는 금사빠에 괄괄한 성격이라는 게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난 건지, 어째 요즘은 주변에서 영 소식이 없다.

-꾸뀨?(해가 서쪽에서 드겠다냥.)

장채원이 구두를 신고 있자, 만마소궁에서 그 모습을 보던 제비가 울음소리를 내었다.

-뀨우 뀨? (웬일로 꽃단장을 했다냥?)

“잠깐 외출하고 올 거야.”

-뀨웅 뀽. (잘 다녀와랑. 올 때 간식도 좀 사와라.)

“알았어. 집 잘 보고 있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든 그녀는 내당을 나섰다.

시내로 나온 장채원이 가장 먼저 간 곳은 바로 대형 서점이었다.

딱히 약속이 없을 때 혼자 갈 만한 곳은 역시 서점뿐이었으니.

열심히 돌아다니며 책을 살피던 그녀는 인테리어 서적이 쌓여 있는 곳에 발길이 멈췄다.

“흠.”

닥치는 대로 인테리어 관련 서적을 독파하는 천마 때문에, 종종 서점이나 온라인으로 관련 책자들을 주문하는 터였다.

“요샌 좋은 책이 잘 나온단 말이지.”

인테리어 서적은 딱히 인기가 없어서 대형 서점이라고 해도 구색만 맞춰놓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소비자들도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진 탓에, 전문가들조차 흥미를 느낄 만한 서적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었다.

열심히 서적을 훑어보던 장채원은 <한 권으로 부수는 셀프 인테리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천마가 아주 좋아할 제목이네.”

구멍이 나도록 인테리어 서적을 읽고 또 읽는 천마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긴 건 노가다에 천직인 얼굴이건만, 막상 알맹이는 활자중독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한 책벌레였다.

“한 권만 더 사다 놓을까?”

결국 그녀가 고른 것은 <인테리어 세계 여행을 떠나보자>라는 책이었다.

각 나라별로 유행하는 인테리어 동향을 소개해 주는, 조금은 독특한 책이었다.

“와, 귀여워.”

책을 구입한 장채원이 이번에 들른 곳은 서점 안에 붙어 있는 팬시점이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그녀는 만년필 세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곳엔 최근 유행하는 안경 쓴 곰돌이 캐릭터가 펜대 위에 매달려 있었다.

“와, 이렇게 비싸?”

초등학생들이나 쓸 것만 같은 만년필이었으나 가격은 명품 쪽에 가까웠다.

잠시 고민하던 장채원은 고민 끝에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럴 땐 질러야지.”

구입한 만년필 세트를 가방에 넣은 장채원은 기분 좋게 서점을 나섰다.

“아아, 날씨 좋다.”

서점을 나와 이동한 것은 근처 커피숍.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는 거리를 바라보며 고즈넉한 시간을 만끽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노을빛으로 채색한 낭만적인 그림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장채원은 청량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사진은 역시 자연광이지.”

커피와 함께 구매했던 만년필을 테이블에 세팅한 그녀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어느새 슬슬 지루해졌다.

“흐음.”

휴대폰을 열어 인기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괜히 울리지도 않은 문자함을 확인하기도 했다.

턱을 괸 채 멍하니 시간을 때우던 장채원은 문득 동원의 말이 떠올랐다.

-누님! 올해도 요계 플리마켓 열리는데 참석하실 건가요? 원하시면 부스 만들어 드릴게요.

좋은 의미로 열리는 플리마켓이긴 하나, 딱히 일요일에 좌판을 열어 고객을 상대할 마음은 없었다.

“거기 구경이나 가볼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커피숍에서 나왔다.

그리고 번화가 근처에 있는 한적한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장채원은 공원이 아닌 외곽에 있는 작은 초소 같은 곳으로 향했다.

똑똑똑.

그리고 허름하게 지어진 단층 건물의 문을 두들기자 안쪽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갑니다.”

문이 열린 곳에는 돼지머리를 한 거구의 남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장채원을 내려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마켓 구경하러요.”

“그러신가요.”

돼지머리 남성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장채원의 몸에선 요력이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이곳은…….”

“아, 죄송해요.”

그제서야 채원은 핸드백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명한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요.”

“아, 영지에서 매장을 운영하시는 분이셨군요.”

명함을 내려다보던 돼지머리 남성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시죠.”

돼지머리 남성이 모자를 가볍게 들자,

-샤아아아아.

평범했던 초소 입구 옆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요계 플리마켓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장채원은 쏟아지는 빛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더니 노점들이 길게 늘어진 저잣거리의 풍경이 보였다.

“와아.”

저잣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들과 매대를 바라보던 장채원이 탄성을 질렀다.

전과 달리 이번에 열린 플리마켓은 규모가 꽤 컸다. 곳곳에 다양하고 신기한 구조물들을 만들어놓아서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보기 힘든 다양한 요괴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이번엔 꽤 크게 하잖아?

장채원은 신이 난 얼굴로 여기저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마음에 드는 구조물에선 사진도 찍고 마음에 드는 공예품도 몇 가지 구매했다.

“하하, 재밌다.”

여기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장채원은 복잡한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 잠시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한 옷을 입고 올걸.”

하이힐까지 신고 온 탓에 다리가 아프다.

끙끙대며 다리를 주무르던 그녀의 앞에 작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작은 고양이었다.

-야옹?

포동포동한 볼을 가진 갈색 고양이가 장채원을 빤히 바라보며 애교를 피우기 시작했다.

“안녕?”

고양이는 요괴라고 할 수 없지만, 태생적으로 분리된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반갑게 손을 흔든 장채원이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육포 한 조각을 꺼내었다.

“이거 먹을래?”

고양이는 덥석 달려와 허겁지겁 내민 육포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챱챱 거리며 육포를 먹고 있는 고양이를 응시하던 장채원은 낮게 미소 지었다.

“아, 생각났다. 들어갈 때 잊지 말고 제비 간식거리 사다 줘야지.”

-야옹?

“아, 언니가 기르는 신수야. 굉장히 귀엽고 똑똑해.”

-야오옹.

장채원이 이름 모를 길고양이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차이,

-이쁘다…….

공원을 지나가던 젊은 남성들이 벤치에 앉은 장채원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얼마 전까지 배바지를 입고 마루에서 뒹굴거리던 백수 모드의 모습은 없다.

귀여운 용모에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를 가진 신비한 눈동자.

햇살이 쏟아지는 벤치에 앉아 고양이를 보며 웃고 있는 장채원은 여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풍겼다.

‘응?’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장채원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저리 가, 꼬맹이들. 휘휘.’

“저, 저기…….”

그때 갑자기 한 남성이 장채원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키가 크고 매우 훤칠하게 생긴 남성이었다.

씨익.

입을 살짝 열어 시원한 미소를 머금자 남성의 하얀 치아가 햇살에 반짝였다.

“혹시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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