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69화 (169/285)

제169화. 던전 관리조사원 김세라 (5)

“본궁에서 살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평생 동안요.”

“평생 동안…….”

다시 침음을 한 천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그만큼 본궁에 충성을 다한다고 하니.”

“그녀가 살도록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마기자의 말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자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마기자.”

“네. 천마 님.”

천마는 자하의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에 주방 숙수 한 명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

“네?”

“대체할 만한 숙수는 구했나?”

“아, 아뇨. 아직 못 구했습니다만.”

“잘됐군. 그럼 그녀를 주방에 넣어라.”

“그녀를… 숙수로 쓰시겠다고요?”

마기자가 입을 벌리자 천마가 턱을 까닥거렸다.

“아니면 충원할 곳이 또 있나?”

“아, 아뇨.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이제야 무림을 제패한 절대고수이자, 고금제일인의 보좌에 오른 천마가 왜 아직까지 홀몸으로 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단지 외모가 흉악해서가 아니었다.

천하 여인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밥통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말, 정말 매정하군요!”

자하가 울먹이며 뛰쳐나가자, 천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저 고얀 처자가 다 있나.”

천마는 황당한 표정으로 마기자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냐?”

천마와 시선이 마주친 마기자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뇨. 그게…….”

“변덕스런 여성이로군.”

불현듯 천마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 넣었으면 또 결원이 생길 뻔했다.”

마기자는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일평생을 천마가 독신으로 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깊은 회상에서 깨어난 천마.

어느새 높다란 천장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공터가 보였다.

광산 던전의 중심부에 도착한 것이다.

[대형 광석입니다.]

천마의 어깨에서 내려온 무명은 중심부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돌을 가리켰다.

본래는 거대한 전구처럼 환한 빛을 내야 할 광석이지만, 던전의 상태가 멀쩡하지 않은 탓에 아주 희미한 빛만을 내고 있었다.

[너무 크군요. 일부만 잘라내면 될 것 같습니다.]

무명의 말에 천마는 흠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꼿꼿이 세웠다.

치익.

강력한 마화열극지를 펼친 천마는 강철보다 단단한 대형 광석을 성인 몸통 정도 크기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세라가 탄성을 터뜨리며 입을 가렸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손가락에 빛이 어떻게…….”

‘아차!’

무명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허구한 날 보는 마화열극지였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볼 수 없는 신비한 기술이라는 걸 깜빡한 것이다.

[아, 사실 저희 사용자께선 두 가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듀얼 스킬을…….]

무명이 재빨리 대답하고 있는 찰나, 천마는 커다랗게 잘라낸 광석을 손바닥으로 주물거렸다. 그러자 단단한 광석이 마치 찰흙처럼 이리저리 다른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트리플 스킬을 가지고 있죠. 저건 그저 분자구조를 재배열하는… 별거 아닌 스킬들입니다.]

궁색하고도 황당한 변명에 던전 내부에는 황량한 적막이 흘렀다.

눈 센서를 희미하게 깜박거리던 무명이 다시 말을 이을 찰나,

콰르르르릉.

갑자기 엄청난 진동과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서진 대형 광석이 반짝이더니,

-부글부글…… 크르르.

무언가 액체가 끓는 소리와 낮은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더니, 바닥으로 금빛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순간 무명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글부글부글. 크르르르.

바닥에 흘러내리던 금빛 액체는 점차 거대한 인간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모 영화에서 나온 액체 금속로봇이 서서히 인간의 형태로 변신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저, 저건…….”

김세라가 비명을 질렀다. 히든몬스터 도감의 끝자락에 있는 어떤 몬스터를 떠올린 것이다.

[히든몬스터 ‘종결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추정위험도는 2만. 물리적 타격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발견한 적을 끝까지 쫓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체 히든몬스터가 갑자기 왜 튀어나온 거야?”

김세라의 비명에 무명이 우울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천마 님이 하는 게 늘 이 모양 이 꼴입니다.

라고 말할 수 없던 무명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을 뿐이다.

꾸르르륵.

그 사이 종결자는 인간의 형태로 변신을 했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갱도의 앞을 막아섰다.

목표로 정한 적을 반드시 죽이려는 특징 때문이다.

-우어어어!

낮은 포효를 터뜨린 종결자가 금빛 형태의 팔을 천마에게 휘둘렀다.

“흥.”

코웃음을 친 천마는 가볍게 손을 뻗어 금빛 손을 막아냈다.

치이익.

그 순간 하얀 연기와 함께 엄청난 고열이 천마의 손바닥을 태우기 시작했다.

“뭐냐.”

천마가 손바닥을 내려보는 사이,

콰앙!

종결자가 천마의 얼굴을 후려쳐 벽 끝으로 날려 버렸다.

[김세라 님. 어서 피하세요!]

무명이 외침과 동시에 김세라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어느새 종결자는 김세라의 가슴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안 돼!”

그녀는 다급히 종결자의 손목을 양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엄청난 고열이 손바닥을 녹이자 유일한 스킬을 펼쳤다.

샤아아아아!

김세라의 손바닥에 김이 서리더니 새하얀 냉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하지만 그녀의 손바닥에서 발생되는 냉기로는 종결자의 팔에 쏟아지는 고열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악!”

손바닥이 녹아내리자 김세라는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두 손을 놓게 된다면 자신의 몸은 순식간에 종결자에 의해 꿰뚫려 버린다.

“끄으으…….”

그녀가 이를 악물고 버티자 종결자는 재밌다는 듯 금빛 몸을 더욱 반짝였다.

동시에 팔목에서 쏟아지는 고열이 몇 배로 증가하며, 김세라의 손바닥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고통에 찬 그녀의 비명이 던전 내부에 울려 퍼질 무렵,

“한심한 것.”

던전 벽에 처박혀 있던 천마가 어느새 몸을 일으켜 김세라의 등 뒤로 다가왔다.

“본좌가 가르쳐 준 한령빙백신공을 잊었단 말이냐?”

“그, 그게 무슨…….”

그 사이 김세라의 손바닥은 거의 녹아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천마 님! 어서 김세라 님을!]

무명이 소리칠 찰나, 천마는 그녀의 등 뒤 명문혈에 손을 내고 반극진기를 쏟아냈다.

“본좌의 진기를 이용해 빙청옥음(氷淸玉陰)의 법문대로 내공을 운공하라.”

정심한 반극진기가 등 뒤에서 쏟아져 오자, 김세라는 순간 뇌리를 관통하는 어떤 느낌이 있었다.

번쩍!

순간 눈을 뜬 김세라의 전신에선 새하얀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냉기를 양손으로 뻗어내었다.

-샤아아아아아!

순간 절대영도에 가까운 엄청난 냉기가 종결자의 몸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지지직. 콰드드드득.

냉기에 감싸진 종결자의 몸에선 끊임없이 균열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쩌적.

마침내 양손을 뻗은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김세라는 얼음 동상처럼 얼어붙은 종결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하아.”

녹아버린 자신의 양손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냉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쏟아지는 차가운 기운은, S급 스킬 ‘증기 빙결화’를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의 엄청난 냉기였다.

“대체 어떻게 내가…….”

양손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핑.

짧은 파공음이 귓가에 울려 퍼지더니, 그녀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 * *

“정신이 드십니까?”

익숙하고도 낮은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자 김세라는 눈을 떴다.

순간 쏟아지는 하얀 조명 빛이 눈동자를 자극했다.

“여기가… 어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킨 김세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깨끗한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하얗게 채색된 방 내부엔 여러 가지 의료기기들이 세워져 있었다.

“운영본부 2층에 있는 의무실입니다.”

또다시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김세라가 눈을 비비자 그녀의 옆엔 협회 정복을 입고 까칠한 턱수염을 기른 남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박세환 팀장님?”

정복을 입은 남성은 자신을 도와 던전 확인 업무를 맡아주던, 던전 방위3팀의 팀장 박세환이었다.

“네. 박세환입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박세환의 말에 김세라가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저는 분명… 광산 던전에 있었는데.”

“맞습니다. 저희 팀원들이 광산 던전 입구에 쓰러져 있던 김세라 님을 구출해 온 겁니다.”

“던전 입구… 라고요?”

그녀는 분명 던전 중심부에서 히든몬스터, 종결자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던전 입구라니?

“그럴, 그럴 리가요? 저는 분명 던전 중심부 까지 들어갔는데?”

“네? 던전 중심부요? 아아…….”

눈을 깜빡이던 박세환은 알아들었다는 듯 탄성을 내었다.

“광산 던전이 재구축 상태로 바뀌면서, 내부에서 강력한 유독 가스가 나오고 있더라고요.”

“유독 가스요?”

“네. 무색무취의 유독성 기체였습니다. 들이마시면 마치 저산소증이 온 것처럼 두통이나 의식장애, 어지럼증을 동반하는…….”

박세환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김세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김세라 님은 그걸 모른 상태로 들어가셔서… 입구에서 오랫동안 쓰러져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유독가스를 마시고… 입구에서 기절해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민망한 표정으로 코를 쓱 훔친 박세환이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일부러 출동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정말 다른 던전에 일이 있었는데…….”

헛기침을 한 그는 매우 정중한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

“김세라 님께서 단독으로 던전에 들어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D급 던전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계속 끝말을 흐리는 박세환을 바라보던 김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협회에게 문책을 당할까 두려운 것이다.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탓에, 보다 못한 제가 던전에 들어가다 사고가 난 겁니다.

만약 김세라가 이렇게 보고한다면?

박세환은 즉각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중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내심을 짐작한 김세라가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세요. 제 판단으로 간 것이니까요. 방위팀에 피해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세환이 계속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자, 김세라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으음.”

“아, 죄송합니다.”

안색이 창백해진 김세라를 바라보며 박세환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편히 쉬세요. 의사의 말로는 특별한 이상은 없고, 링거가 다 떨어질 때까지 편히 쉬면 된다고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저희 팀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박세환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의무실 문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세라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정말 꿈을 꾼 건가.”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허공에 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냉기 따윈 쏟아지지 않았다.

“그동안 피곤했나 봐.”

피식 웃은 김세라는 다시 푸근한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눈을 감으니 정말 어지럽고 또다시 잠이 온다.

* * *

복복 인테리어와 연결된 비밀통로가 있는 가변던전의 폐건물 옥상.

광산 던전에서 나온 무명은 비밀통로의 입구를 여는 천마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전부터 김세라 님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무슨 말이냐.”

[천마 님께선 김세라 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주입시켰고, 그로 인해 김세라 님이 각성하지 않았습니까?]

무명은 방금 전에 광산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종결자의 손을 잡은 채 손바닥이 녹아내리는 상황에 처한 김세라. 천마는 갑자기 그녀의 등에 손을 얹더니 엄청난 기운을 쏟아냈다.

-샤아아아아아!

그러자 엄청난 냉기와 함께 김세라의 피부와 머리칼, 눈동자마저 하얗게 변했다.

마치 어느 왕국의 얼음 공주님처럼 변한 그녀는 고열을 쏟아내고 있던 종결자를 단숨에 얼려 버린 것이다.

“글쎄.”

천마는 대답을 회피했다.

정말 김세라는 자하의 환생일까?

사실 그도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게다가 만마집궁을 떠난 뒤로 자하의 소식은 더 이상 들은 기억이 없다.

하지만 자하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녀가 만마집궁을 떠난 뒤로 급사(急死:갑자기 죽음.)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상하군.’

하지만 종결자에 의해 머리를 부딪치자 천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세라가 자하라는 걸 확신했다.

즉각 반극심공을 사용해 한령빙백신공을 주입했고, 그녀는 한빙진기를 쏟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원래 손바닥을 얼리는 빙결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 어쩌면 ‘극한 각성’이라는 것이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나저나 정말 다행입니다.]

“뭐가 말이냐.”

무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히든몬스터, 종결자가 죽으면서 무색무취의 유독가스를 퍼뜨려서 말입니다.]

무명은 김세라가 빙결 스킬을 이용해 종결자를 얼려 버린 상황을 떠올렸다.

쩌적. 콰지지지직!

얼어붙은 종결자의 몸뚱이에서 균열이 시작되더니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러자 얼어 있던 종결자의 몸뚱이가 희미한 아지랑이와 함께 다시 녹아내렸고, 그곳에선 무색무취의 유독가스가 피어올랐다.

으적으적으적.

그 순간 출구로 나가는 갱도가 목구멍처럼 막혔고, 오히려 막혀 있던 입구 쪽의 통로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쓰러진 김세라를 입구에 둘 무렵, 나노슈트를 입은 인원들이 오는 걸 보고 즉시 몸을 피한 것이다.

“그렇군.”

천마는 덤덤히 대답했다. 사실 그는 줄곧 김세라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 갱도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자하와 김세라가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한 걸까?

설마하니 내공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의 기억도 잃었단 말인가?

“흐음.”

머릿속에 희미한 안개가 낀 기분이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엔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려 찾아왔던 자하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당신… 정말 매정하군요!

“그래. 본좌는 원래 그러하지.”

[무슨 말입니까?]

무명의 물음에 천마는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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