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던전 관리조사원 김세라 (4)
번쩍!
자운광의 쾌검에 한 무림인의 복면이 잘려 나갔다.
“아앗.”
다급히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자운광은 이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네놈들이 마도의 무리로 변장한 것이냐?”
다시 한번 벼락과 같은 쾌검을 날린 자운광이 무림인들의 목을 베어낼 무렵,
“자운광. 투항하시오!”
우두머리로 보이는 복면인이 자운광의 손녀, 자하의 목에 검을 갖다 대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인다면 이 귀여운 손녀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싸악.
복면인이 예리한 검 끝을 자하의 목에 바짝 대자 붉은 혈화가 피어올랐다.
“사제…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벼락같은 일갈을 한 자운광이 복면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대체 왜!”
“흠. 음성을 변조해도 사형은 못 속이겠구려.”
정체가 들통났다는 걸 깨달은 복면인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탐스럽게 수염을 기른 청수한 초로의 노인의 용모가 천천히 드러났다.
바로 양광무림맹의 부맹주이자, 자운광의 사제인 유운검(流雲劍), 이자웅이었다.
“대체 이게…….”
푸욱.
그때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자운광의 아랫배에서 예리한 검날이 쑥 튀어나왔다.
어느새 기척을 숨기고 다가온 복면인이 기습을 한 것이다.
“이노옴…….”
한 손으로 검날을 움켜쥔 자운광이 기습한 복면인의 복면을 찢어냈다.
“후후.”
모습을 드러낸 복면인의 모습에 자운광이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운광장의 식솔들을 무참히 죽인 무림인들은 양광무림맹의 고수들이었고, 자신의 손녀딸을 겁박하고 있는 것이 자인의 친우였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서 기습을 한 자는 삼십 년간 우정을 나누었던 친우, 부요칠지(不要七指) 곡청(曲靑)이었다.
“자네는 또 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죄라고 하지 않는가.”
곡청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척사신검을 숨겨놓았다고 들었네만.”
“척사신검…….”
자운광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옥선도에 숨겨져 있던 척사신검을 우연히 발견한 그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유일한 친우인 곡청에게만 말했을 뿐이다.
“으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린 자운광이 나지막이 독백했다.
“30년간 사귄 벗에게 배신을 당했고, 식솔들이 무참히 죽어 나갔다. 그런데 척사신검을 달라고?”
“저 귀여운 손녀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내 손녀는 죽지 않아.”
“손녀에게 금강불괴체 신공이라도 가르쳤단 말인가. 하하핫!”
곡청은 자신의 말이 우스웠는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초점 없는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던 자운광이 처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부가 그대의 억지 부탁을 들어주었소! 그러니 이제 내 부탁도 들어줘야 하지 않소이까?”
자운광은 싸늘히 식은 아들 내외의 주검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부디 노부의 부탁을 들어주시오!”
“사형, 미친 거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자웅이 비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러지.”
하늘에서 굵고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자웅이 하늘 위를 올려 보자 달빛 아래 한 사내의 그림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하지만 빛을 등지고 가려져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어떤 쥐새끼냐!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이자웅의 외침에 허공에 떠 있던 그림자가 즉시 그의 앞으로 착지했다.
쿠웅.
순간 이자웅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사자 갈기와 같은 머리칼, 금강역사와 같은 체구. 그것은 고금제일인의 모습이 아닌가.
“당신은…….”
천마와 시선을 마주친 이자웅이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육척이었던 이자웅의 몸이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키가 줄어 있었고, 전신의 뼈와 근육이 뒤틀리고 있었다.
장원에는 수십 명의 무림인이 있었지만, 아무도 천마가 손을 쓰는 걸 본 자가 없었다.
“끄어어어어!”
무릎을 꿇은 이자웅이 피눈물을 흘려대며 고통스러워하자, 천마가 낮게 중얼거렸다.
“시끄럽다.”
그러자 이자웅은 어느새 아혈이 짚어졌는지, 입을 벌린 채 벙어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양광무림맹의 버러지들이로군.”
천마가 주위를 둘러보자 복면을 쓴 무림인들이 두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마도의 하늘이라 불리는 천마대제. 그가 왜 이 이곳에 있단 말인가?
석상처럼 굳어 있는 무림인들을 쓸어 본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지금부터 네놈들에게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선사하지.”
천마가 공언한 이상 그건 기정사실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본좌가 이 옥선도를 나가는 순간, 무림엔 양광무림맹이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자웅과 곡청이 이런 잔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배경엔, 양광무림맹주의 명령이 있다는 걸 대번에 짐작한 것이다.
천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복면을 쓴 무림인들이 쥐고 있는 검을 역수로 쥐어 배를 찔러갔다.
쩌엉!
하지만 그들이 들고 있던 수십 개의 검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땅 한켠에 둥글게 꽂혀 있었다.
천마가 가공할 내공으로 그들의 무기를 모두 땅에 박아버린 것이다.
“살려주시오!”
그때, 곡청이 천마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천마대제께선,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는 절대 죽이지 않는다고 들었소.”
천마와 눈이 마주치자 곡청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앞으로 마도에, 아니 일평생 천마대제께 충성을 바치겠소이다!”
“파벌을 바꾸겠다는 건가.”
“목숨은 하나. 그깟 파벌이 뭐가 중요하겠소이까?”
천마는 자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에 저토록 간악하고 목숨을 아끼는 자는 보기 힘들다. 절대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좋다. 대신 네놈은 평생 만마집궁의 마부가 되어 마구간의 똥을 치우게 될 것이다.”
“분부 받들겠소이다.”
목숨을 구했다는 기쁨에 곡청은 무릎을 꿇고 급히 절을 했다.
그 순간,
파아아!
피보라와 함께 무릎을 꿇은 곡청의 몸에서 안개와 같은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대체 왜… 약속이 틀리잖소.”
입가에 핏물을 철철 흘리는 곡청의 물음에 천마가 피식 웃었다.
“본좌가 먼저 말했잖나. 지금부터 네놈들에게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선사하겠다고.”
몸을 돌린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진 숨은 붙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고통을 음미해 보도록.”
파아아아아아!
그 말을 끝으로 운광장 안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의 몸에서 피안개가 퍼져 나왔다.
“흠.”
천마는 죽어가는 자운광에게 다가가 덤덤히 말했다.
“부탁은 들어줬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데, 자운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노부의 부탁은 복수가 아니었소.”
“뭐라.”
“아직 부탁은 말하지 않았소.”
자운광의 말에 천마가 인상을 썼다.
“저들을 도로 살려두라는 것이냐?”
“그렇소. 저놈들을 처단할 자는 따로 있으니.”
죽어가는 자운광의 입엔 희미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천마는 허탈한 코웃음을 내었다.
자운광. 참으로 묘한 노인이다.
공포의 대명사라 알려진 자신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고금제일쾌의 명성을 물려주기 싫어서 섬을 장시간 도는 내기를 걸었다.
소문이 아닌, 자신이 직접 본 천마의 모습을 믿었기 때문이다.
“관상쟁이 같은 노인네로군. 본좌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다니.”
낮게 콧바람을 낸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목을 높게 사도록 하지.”
다시 손가락을 펼치자 빛살과도 같은 수백 가닥의 지풍이 쏟아져 쓰러진 곡청과 복면인들에게 쏟아졌다.
파파파팍.
동시에 피안개를 내뿜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무림인들이 동작을 멈추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한목숨 붙어 있을 때 움직여라. 계속 본좌의 눈에 얼쩡거리면 죽이겠다.”
천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광장에 있었던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살아남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그들은, 한 방울의 힘도 남기지 않고 혼신의 신법을 펼친 것이다.
“좋다. 이제 원하는 걸 말하라.”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운광은 혼절해 있는 자신의 손녀, 자하를 가리켰다.
“저 아이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오.”
“힘?”
“그렇소.”
“추상적인 말이군. 힘이라는 범위를 조금 명확히 말해봐라.”
“무공을 가르쳐 주시오. 직접…….”
자운광의 말에 천마는 눈썹을 모았다.
상상할 수 없는 무학의 경지를 이룩한 천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무학을 가르친 적은 없으며, 딱히 제자를 둘 생각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좌는…….”
“…감사하오.”
하지만 자운광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흐음.”
숨을 거둔 자운광과 멀리 쓰러져 있던 자하를 보며 천마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 녀석이 또 난리를 치겠군.”
천마가 이틀간만 자리를 비워도 순식간에 행적을 찾아 칠신전의 고수들을 몽땅 출동시키는 만마집궁의 총사.
마기자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지킬 수밖에.
“좋다. 그럼 이틀간만 무공을 전수하지.”
실전무학.
정해진 초식을 펼치는 일반적인 무학과 달리, 실전을 통해 적절한 초수를 만들어내는 무학이다.
천마는 자운광의 손녀 자하에게 이틀간 실전무학의 요결을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전수할 수 있으며, 노력 여하에 따라 스스로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옥선도의 어느 동굴 앞.
“흐으윽. 흐아앙!”
그 앞에는 검을 들고 있는 소녀가 울고 있다. 바로 자운광의 손녀 자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집채만 한 덩치의 범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더 이상 울면 본좌는 떠나겠다.”
그러자 자하는 입술을 꾹 참은 채 눈물로 소매를 닦았다. 여전히 울먹거렸지만 더 이상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이제 네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너는 맹수들을 처리하며, 실전무학의 요결을 익혀야 한다.”
핑.
천마가 지풍을 날리자 범이 이빨을 드러내더니 자하에게 덤벼들었다.
다음날.
동굴 앞엔 어린 소녀, 자하가 빠르게 움직이며 커다란 곰을 상대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거나 머리로 생각하지 마라. 몸으로 느껴라.”
자하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림고수의 초수는 번갯불처럼 빠르다. 쏟아지는 공격에 맞춰 본능적으로 움직여, 허점을 찾아내는 거다.”
천마는 이 방대하고 오묘한 무학의 이치가 담겨 있는 것을 이틀 안에 모두 전수할 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궁리 끝에 그는 옥선도에 있는 맹수들을 사로잡아 자하와 싸우도록 했다.
맹수의 본능적인 움직임을 몸으로 받아들여, 이틀 만에 즉흥적으로 초수를 만들어내는 실전무학의 비법을 전수하려는 것이다.
삭삭.
모든 공격을 물 흐르듯 피한 자하가 검을 휘둘러 허점이 드러난 곰의 목을 찔러갔다.
“우욱.”
피가 뿜어나오자 그녀는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웨에엑.”
들고 있던 검마저 팽개친 채 눈물 콧물을 쏟는 자하를 바라보며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는군.”
그녀는 눈앞에서 부모와 할아버지가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걸 목격했다.
그로 인해 피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을 하는 괴질이 생겨 버린 것이다. 천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고칠 순 없었다.
“적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피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무인이 될 수 없지.”
고개를 가로저은 천마가 몸을 돌렸다.
“넌 무림인이 될 팔자는 아닌 것 같군. 무림을 떠나 조용히 살도록 하라.”
“안 돼…요.”
자하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원수는 멀쩡히 살아 있어요!”
운광장을 불태웠던 양광무림맹과 곡청은 멀쩡히 살아 있다.
자하는 절대로 그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피만 보면 토하고 우는 널 어찌 가르친단 말이냐.”
“그래도 가르쳐 주세요.”
눈물 콧물을 닦은 자하가 천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려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고금제일고수인 천마에게 무공을 배울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영영 복수 따윈 할 수 없다는 걸.
“흠.”
잠시 고민하던 천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군.”
반극심법을 운공하자 천마의 몸에선 신비한 광채가 솟구쳐 하늘 위로 치솟고 있었다.
“피를 아예 보지 않는 방법은 이것밖에…….”
자하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댄 천마는 뼛속을 얼릴 만큼 강력한 극음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칼부림을 하지 않고 사람을 멀리서 얼려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무학, 한령빙백신공을 전수한 것이다.
일 년 후.
천마의 한령빙백신공을 익힌 자하는 양광무림맹을 절멸시켜 버리고, 배신자 곡청도 얼려 죽였다.
그리고 그녀는 만마집궁으로 찾아와 천마가 앉아 있는 만마대전으로 찾아왔다.
“천마 어르신의 도움으로 부모님의 원한을 갚고, 모든 복수를 마쳤습니다.”
하얀 백의를 입은 그녀는 천마에게 정중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제 저의 남은 생은, 어르신에게 바치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본좌를 찾아온 건가.”
“그렇습니다.”
긴 속눈썹을 내린 자하의 창백한 두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천마가 지금까지 어떠한 여인에게도 마음을 두지 않고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진기를 아낌없이 주입하여 저를 도와준 어르신께 드릴 수 있는 저의 보답입니다.”
“보답이라.”
잠시 침음을 한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다.”
“네?”
“본궁엔 인원이 적지 않다. 네가 딱히 할 만한 일이 없다.”
엉뚱한 천마의 대답에 자하의 얼굴이 굳었다.
“아뇨. 그러니까 저는 천마 님을 직접 모시겠다는…….”
“괜찮다. 본좌는 번거로운 걸 싫어한다. 처소에 있는 시비도 보내버렸지.”
엉뚱한 대답이 오가자 천마의 곁에 시립하고 있던 마기자가 보다못해 앞으로 나섰다.
“아아, 천마 님.”
눈치 없는 모태솔로, 천마를 대신해 오만상을 찌푸린 마기자가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저 여인은 천마 님과 함께 이 만마집궁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