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67화 (167/285)

제167화. 던전 관리조사원 김세라 (3)

육중한 기간토마뱀의 앞발을 거뜬히 막아낸 천마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별거 아니군.”

퍼억!

그리고 나머지 오른팔로 기간토마뱀의 복부를 꿰뚫어 버렸다.

콸콸콸. 우수수.

기간토마뱀의 뚫린 뱃속에서 붉은 창자와 핏덩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부산물들은 무릎 꿇고 주저앉아 있는 김세라의 안면으로 푸짐하게 쏟아졌다.

[아…….]

놀란 무명이 외마디 실성을 내뱉는 순간,

“꺄아아아아아---!”

기간토마뱀의 부산물을 안면으로 받아낸 김세라가 눈동자를 하얗게 까뒤집은 채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 * *

“어흐흑. 흐으으윽.”

갱도의 벽에 기댄 김세라는 눈물 콧물을 쏟고 있었다.

몬스터와 눈만 마주쳐도 뱃속이 뒤틀리고 비위가 상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선혈과 내장들이 뒤섞인 것들이 얼굴 앞에서 쏟아지다니.

“흐어어엉. 웨엑.”

얼굴에 피가 튄 탓에 그녀는 울다가 비릿한 피 냄새 때문에 구역질을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김세라 님.]

무명은 미안한 마음에 김세라에게 다가갔다. 어찌 되었건 그녀를 사지로 내몬 것은 그 자신이었으니.

“안 괜찮… 웩.”

[혹시 비위가 약해 몬스터를 못 잡으시는 겁니까?]

“그래.”

[죄송합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무명의 사과에 그녀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몬스터 따윈 안 잡으려고, 죽도록 열심히 공부해서… 빅데이터실에 취업을 했는데… 흐흐흑. 웨엑.”

우스꽝스러운 신세 한탄에 무명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그러셨군요.]

그때 천마가 고개를 파묻은 채 우는 김세라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당당한 무림의 여걸이 이런 일에 울다니. 피를 보며 무서워하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애가 하는 짓이 아닌가?”

“여걸은 무슨! 난 학자라고요! 학자! 평생 몬스터 따윈 사냥 안 할 거라고요!”

“흠.”

천마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원래대로 같으면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무명이 계속 애원했다.

<천마 님. 협회 각성자를 버리고 가면 절대 안 됩니다. 부디 던전 밖으로만 안전히 내보내 주시기만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대형 광석은 나중에 캐고, 미로를 뚫어서 이 여자를 밖으로 내보내야겠군.>

<안 됩니다. 만약 천마 님이 또다시 미로를 부수면 지금까지 ‘히든몬스터와 던전 재구축을 한 건 바로 이 몸이다!’라고 알리는 꼴입니다. 부디…….>

살인멸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명은 저토록 애원을 하니 어쩔 수 없다.

탐탁지 않지만 계속 가는 수밖에.

천마는 울먹이는 김세라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거기서 계속 울고 있다면 버리고 가겠다.”

“네?”

“일어나라. 출발할 테니.”

“잠, 잠깐만요.”

천마가 갱도 안으로 걸어가자, 김세라는 다급히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같이 가요.”

“눈물을 닦아라. 울면 데려가지 않겠다.”

“알, 알겠어요.”

김세라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면서도 천마에 대한 원망을 잊지 않았다.

“정말 매정한 분이시군요.”

-당신… 정말 매정하군요!

순간 천마의 귓가엔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바뀌며, 먼 과거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잠깐 기억났던 것과 다르게 매우 또렷이, 생생하게 말이다.

* * *

옥선도(玉仙島).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영물들이 많이 숨겨져 있었다는 옥수산(玉秀山) 부근에 있는 외딴 섬이다.

그리고 이 작은 외딴섬엔 암기의 달인이자 고금제일의 경공 실력을 지녔다는 번쾌(飜快) 자운광(慈雲廣)이 살고 있다.

오랫동안 명성을 날린 그는 무림을 은퇴하여 이 옥선도에 운광장이라는 장원을 짓고 아들 내외와 함께 호젓하게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달이 휘영청 뜬 야심한 밤.

휘르르륵.

갈댓잎 하나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유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갈댓잎 위에는 회색 무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허어. 일위도강(一葦渡江)의 신법이 진짜 존재했다니.”

옥선도 해변가에 서 있던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무림인들은 ‘일위도강의 신법을 펼쳤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쓰곤 하지만, 사실은 갈댓잎을 밟고 신법을 펼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 거구의 사내는 갈대에 우뚝 선 채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것은 전설의 달마대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운광.”

거구의 사내는 해변가에 서 있는 노인을 보자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살 떨리게 살벌한 미소였으나, 노인은 그 미소가 악의 없는 웃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구려.”

노인이 덤덤히 웃자 거구의 사내가 약간 놀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단한 정보통이 있나 보군. 본좌가 도착할 시간까지 알고 있었다니.”

무림에 자신을 ‘본좌’라고 칭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당금의 마도제일인이자 고금제일마인 천마. 그렇다, 이 거구의 사내는 천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볼품없이 깡마른 노인이 바로 고금제일쾌라 불리는, 경신법의 대가 자운광이었다.

“노부의 신법비급을 원하는 것이오?”

자운광의 말에 천마는 코웃음을 쳤다.

“허튼소리.”

“그럼 노부를 죽이러 온 것이오?”

“본좌가 살인마로 보이나.”

“그렇다면 뭣 하러 이 절해고도까지 노부를 찾아온 것이오?”

자운광은 산천초목도 떨게 만든다는 천마를 빤히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노부에게 오는 날짜가 친절히 적힌 서찰을 은밀히 보내면서 말이오.”

잠시 침묵하던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고금제일쾌라는 별호를 거두기 위해서다.”

“거둔다니.”

“얼마 전 본좌는 오랜 연구 끝에 신법 하나를 창안했지.”

“신법을 창안했단 말이오?”

자운광은 입을 벌렸다.

신법은 권장무학을 창안하는 것과 궤가 다르다.

진기운행에 막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내공심법에도 정통해야 하며, 근육 반응과 장기 위치 등 인체 조직에 대해서도 해박해야 한다.

권장무학은 헤아릴 수 없이 발전하는 반면, 무당의 제운종이나 곤륜의 운룡대팔식 등 무림 각파의 신법절기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는 점이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본좌가 창안한 신법이라면 고금제일신법이라 평가되는 십방번신(十方飜身)을 능가할 것이다.”

무학과 신법은 분야가 조금 다르다.

무림에서 가장 빠른 신법을 펼친다고 무림에 가장 강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무림에서 가장 강하지만 신법은 조금 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천마는 지금 고금제일 고수이자 고금제일의 경공 대가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다.

“어떤가. 본좌와 경공 시합을 한번 해보겠나.”

“으하하하.”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자운광이 하늘을 보며 껄껄 웃었다.

무림엔 언제부턴가 괴상한 소문이 하나가 떠돌았다.

천마가 사실은 엄청난 무공광이며,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도 밤낮으로 무학을 연마한다는 황당한 소문이었다.

무림인들은 당연히 이 소문을 믿지 않았다.

천마의 무학은 천하무적을 넘어서 이미 고금제일이라 평가된다.

게다가 무림을 제패한 그가 애써 무공을 연마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허황된 소문이라고 생각했건만. 정말로 무공광일 줄이야.’

“노부를 높게 평가하는 건 감사한 일이오만…….”

감탄 속에서도 자운광의 말투는 퍽 정중했다.

천마의 배분은 신선처럼 오래 살고 있는 무원정종의 종주, 정념보다도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절하겠소.”

자운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노부는 이미 무림을 은퇴한 지 오래요.”

“제자가 있나.”

“없소. 아들 내외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고, 손녀는 무공을 익혔으나 이제 갓 열네 살일 뿐이오.”

순간 천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담 고금제일쾌라는 명성은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이군.”

“내키지 않는구려. 이 나이쯤 되면 밤이슬만 맞아도 뼈가 시리는지라.”

자운광은 농을 던졌다.

소문과 달리 실제로 본 천마는 걸핏하면 사람을 패 죽인다던가, 피를 갈구하는 마인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이다.

콰직. 쩌저저저적.

하지만 농을 던진 순간, 자운광이 서 있는 부근이 메마른 땅처럼 쫙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키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천마의 눈동자에선 지옥불과 같은 빛이 피어올랐다.

모골이 송연해진 자운광이 갑자기 성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금제일쾌라는 명성은 억지로 거두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소. 하지만 그토록 시합을 원한다니 하도록 합시다.”

“음.”

“다, 다만 이 일은 천마대제, 당신이 부탁했다는 걸 잊지 말아주시오.”

“방법이나 정해봐라.”

헛기침을 한 운광이 옥선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크험, 그렇다면 이 옥선도를 열 번을 먼저 도는 걸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 어떻겠소?”

쾌속한 신법은, 대체적으로 지구력이 약하다. 진기와 힘을 일순간 폭발적으로 발휘하기 때문이다.

자운광은 천마가 고금제일쾌라는 별호를 거둔다고 호언장담한 만큼, 분명 쾌속하지만 지구력은 썩 좋지 않은 신법이라 예상한 것이다.

“십방번신은 오래 달릴 수 있단 말이군.”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면 내기 내용을 바꾸어도 괜찮소이다.”

자운광의 속내를 짐작한 천마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달빛이 비치는 운선도에 두 개의 그림자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푸르릇. 타악.

백의를 입은 채 십방번신을 펼친 자운광의 모습은 하얀 그림자가 되어 허공에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신법을 펼치던 자운광은 고개를 힐끗 돌아보았다.

어느새 천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자신 혼자만이 옥선도를 돌고 있었다.

‘하긴, 고금제일의 고수라고 해서 고금제일의 경신대행가라고 할 순 없지.’

자운광이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머금을 무렵,

고오오오오…….

어디선가 굉음이 하늘에 울려 퍼지더니, 저 멀리 원추형의 구름이 쏘아져 오고 있었다.

천마였다.

‘저, 저게 뭐야?’

천마는 마치 하얀 공기를 뚫고 달려오고 있을 뿐 아니라, 쏘아져 나갈 때마다 쾅! 하는 폭음이 들렸다.

만약 자운광이 현대인이라면 저것이 음속을 돌파했을 때 발생하는 소닉붐 현상이라는 걸 대번에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천마가 구름을 타고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이미 선경(仙境)에 들었단 말인가!’

콰앙!

그때 또다시 폭음과 함께 저 멀리 사라진 천마가 또다시 자신의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사이 옥선도를 한 바퀴 돌고 온 것이다.

‘이, 이건…….’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

마침내 열 바퀴째가 되자 자운광은 신법을 중단하고, 어느 산봉우리에 멈춰 섰다.

“노부가 졌소이다.”

옥선도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우뚝 서 있는 자운광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십방번신은 무림제일의 신법으로 수백 년간 명성을 날렸다.

고금제일이라고까지 불렸던 신법이 천마의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일 줄이야.

“하지만 이건 고금제일신법이 아니라, 신선의 축지법이 아니오?”

“무슨 헛소리냐.”

“천마대제, 당신은 이미 신선이 된 것이 아니냔 말이오.”

“흥, 이건 본좌가 창안한 엄연한 신법이다.”

천마의 눈동자에는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자운광을 죽일 수 있는 그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정말로 그는 고금제일의 신법을 창안한 것이다.

“그렇구려.”

속 시원히 패배를 인정한 자운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그 신법의 이름이 무엇이오?”

“만드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이름은 아직 짓지 못했군.”

“그렇다면…….”

자운광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외람되지만 노부가 한번 이름을 지어봐도 괜찮겠소?”

“말해봐라.”

“밤하늘에 떠 있는 달(夜月)의 빠르기조차 추월한다(克速)…….”

“야월극속이라.”

신법의 이름을 되뇌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금제일신법의 이름치곤 너무 운치가 있군.”

“어차피 이러한 신법은 천마대종사, 당신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오? 조금은 운치 있는 이름이라고 해도 관계가 없을 것 같소이다.”

“흐음.”

천마가 턱을 쓰다듬을 무렵,

퍼엉.

낮은 폭음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섬 아래에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곳은 자운광이 사는 운광장이 있는 곳이었다.

“설마, 나를 꾀어놓고 암습을…….”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려던 그는 덤덤한 천마의 눈빛을 발견하자 고개를 저었다.

“…할 리가 없지. 당신의 실력이라면 일수에 옥선도를 박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야월극속이라… 괜찮은 이름 같긴 한데. 약간 정파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천마는 운광장이 불타든 말든, 턱을 쓰다듬으며 신법의 이름을 고심하고 있었다.

하기사, 그의 입장에선 운광장이 불에 타든 말든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실례하겠소!”

자운광은 신법을 펼쳐 즉시 운광장이 있는 곳으로 쏘아져 나갔다.

휘리리릭.

단숨에 운광장에 도착한 자운광은 입을 벌렸다.

“이럴 수가.”

운광장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고, 검은 복면을 쓴 무림인들이 식솔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있었다.

이 외딴 고도에 식솔들만 있는 운광장에 누가 쳐들어온단 말인가?

“멈춰라!”

바닥에 떨어진 장검 한 자루를 집은 자운광이 벼락과 같은 노성과 함께 무림인들을 베어갔다.

비록 은퇴한 몸이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공과 검법을 연마한 그였다.

십방번신과 함께 쾌검을 펼치자 사방에선 번쩍번쩍하는 빛과 함께 무림인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마, 이놈들…….”

복면을 쓴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검법은 모두 사파의 검법이었으나, 신법과 보법은 모두 정파의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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