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62화 (162/285)

제162화. 요괴 사랑 이야기 (3)

[저는 최근, 천마 님이 해왔던 말씀들을 깊이 생각하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항상 월등한 존재를 두려워하고, 강자의 힘을 억압하고 억눌러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무명은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솔직한 마음을 천마에게 전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집니다. 요괴라는 이유만으로, 연인에게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김찬원 님의 친구분 사연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돕고 싶습니다.]

“본좌가 했던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더냐.”

[아뇨, 같습니다. 김찬원 님의 친구분 역시, 요괴라는 월등한 존재이면서도 인간에게 차별을 당했으니까요.]

-이곳은 강한 자가 차별받는 세상이다.

늘 천마가 부르짖던 말이다.

말은 빙 돌려서 했지만, 무명은 천마의 그 생각에 동의하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좋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건방진 말을 본좌의 앞에 사용하지 마라.”

솔직함.

그리고 자신의 사상에 동의하는 무명의 태도에 천마는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천마 님.]

잠시 침묵하던 무명이 다시 말했다.

[그럼, 그분을 도울 방법은 있는 겁니까?]

끈질긴 무명의 말에 천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금안이라는 건 선천적인 능력이다. 그녀의 의식을 대법이 펼치는 곳으로 돌릴 수 있다면, 대법을 튕겨내는 방벽도 자연스레 깨지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좌의 영마현기대법이 필요한 것도, 결국 그 할멈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서로의 맘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정신의 방벽을 허물 수 있는 계기만 만들어준다면 대법도 통할 것이다.”

“어떻게 말여?”

묵묵히 듣고 있던 김찬원의 질문에 천마가 즉각 대답했다.

“김 씨의 친구라는 자를 불러라.”

“안 돼야. 그렇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려면 뭣 하러 천 씨를 불렀겠어.”

“만나서 이야기할 일 따윈 없다. 걱정 말고 불러라.”

“어, 어떻게?”

“일단 불러라.”

침상에 누워 있던 김현정의 창백한 안색을 떠올린 천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

* * *

홍찬영.

구성일족의 요괴이자 김찬원과 친구인 그는 실제 나이가 백 살이 넘어간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저 단단한 체구를 지닌 삼십 대 초반 정도의 남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장 사장, 천 씨. 이쪽이 내가 말한 친구 홍찬영이여.”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홍찬영입니다.”

홍찬영은 천마와 장채원을 보자마자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막무가내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찬원을 통해 이러한 부탁을 하길래 유순하고 힘없는 사내일 줄 알았건만.

실제로는 호감 가는 외모에, 당당하고 멋진 풍채를 지닌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장채원은 영마현기대법을 부탁한 홍찬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말할 수 없던 거야.’

목숨처럼 사랑했던 연인은 늙어간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도 가을하늘처럼 투명한 생기를 내뿜고 있다.

차라리 같이 늙어갔으면 좋으련만. 죽음을 앞둔 연인에게, 이런 모습으로 말을 건넨다는 건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얼마 전 나르시스 던전에서 만났던 요괴와도 비슷한 일이었다.

“빨리 시작하도록 하지.”

현무 요양병원을 올려다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1002호.

병실의 문을 바라보자 홍찬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쳤다.

이곳은 꿈에도 보고 싶었던 첫사랑이 쓸쓸히 묵고 있는 병실이다.

얼마 전 우연히 김현정의 얼굴을 보았을 때완 다르다.

손만 뻗으면 뺨을 어루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갈 수 있다.

똑똑똑.

문을 두들긴 홍찬영이 심호흡을 하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

며칠 전에만 해도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던 김현정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 있었다.

몸에선 생기가 다 빠져나간 듯 힘없이 누워 있는 그녀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위독한 환자들의 집중치료실로 옮겨야 할 판이다.

“흠.”

김현정을 바라보던 천마는 갑자기 손가락을 펼쳐 지풍을 날렸다

파파파파팍.

송곳 같은 지풍이 몸속을 파고들자,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떨리고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지금 대체 뭐 하는…….”

당황한 홍찬영이 제지하려 하는데, 장채원이 그를 막으며 천마의 얼굴을 가리켰다.

“저걸 보세요.”

“아니.”

평온했던 천마의 얼굴은 생사대적과 혈투를 벌이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으며,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무언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파파파팍.

또다시 지풍이 한차례 쏟아지자, 김현정의 피부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후우.”

지풍을 멈춘 천마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군.”

그리고 고개를 돌려 홍찬영에게 말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라.”

“네? 네.”

“그리고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하라.”

“어차피 들을 수 없을 텐데…….”

“그냥 하라.”

괴로워하는 홍찬영의 모습에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나머지는 본좌가 알아서 할 테니.”

“알겠습니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홍찬영이 김현정의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정아. 나… 기억해?”

하지만 김현정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 찬영이야. 너랑 같이 십 년 동안 세시봉에서 활동했던 탱커, 홍찬영.”

홍찬영은 천천히, 그리고 사랑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리고 그 당시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모두 꺼냈다.

“…정말 미안해. 조금 더 일찍 너에게 요괴라는 걸 말했어야 했는데.”

심호흡을 한 홍찬영의 눈에선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말하지 못했어. 평생 도망자가 되더라도 나와 함께 있어 달라는 말을…….”

수십 년간 녹아 있던 후회와 괴로움이 눈물이 되어 흐른다.

홍찬영은 진심으로 김현정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에겐 사랑을 뒷받침할 용기가 없었다.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 요괴라도 괜찮냐고, 도망 다녀도 나와 함께 있자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모든 이야기를 마친 홍찬영은 김현정이 있는 침대 앞에 쓰러진 채 숨죽여 흐느꼈다.

“그랬군요.”

그때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김현정이 무릎을 꿇은 홍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없이 떠나간 이유가 너무 궁금했는데… 이렇게 듣게 되네요.”

“현, 현정이 너…….”

“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엔 보게 되는군요.”

홍찬영이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김현정이 미소 짓고 서 있었다.

이건 환상인가? 찬원이 말대로 저 천마라는 분이 내게 펼친 그 환상이라는 건가?

홍찬영은 정신없이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천마와 장채원, 무명, 김찬원은 여전히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심지어 장채원과 김찬원은 눈물 콧물을 뚝뚝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랬군요.”

지금에서야 모든 걸 알게 된 김현정이 미소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내게 직접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현, 현정아.”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죠?”

김현정은 쓰러진 홍찬영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그를 꼭 안아주었다.

“이젠, 행복하게 살아요. 찬영 씨.”

“으, 으응.”

홍찬영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수십 년간 쌓아두었던 후회가 아닌,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었다.

“찬, 찬영이…….”

그때 등 뒤에서 따뜻한 손길이 홍찬영의 어깨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하는 김찬원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자네는 또 왜 우나. 이렇게 기쁜 날에…….”

말을 잇던 홍찬영은 문득 가슴에 닿은 따뜻한 체온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을 느꼈다.

떨리는 팔로 두 팔을 밀자 평온하게 숨을 거둔 채 미소 짓고 있는 김현정의 얼굴이 보였다.

샤르르르.

그리고 침상 옆 테이블에 책갈피로 올려놓은 월극화 역시 천천히 사라져 버렸다.

* * *

김현정의 장례는 조촐했다.

남편이 죽은 후, 평생 아무하고도 연락하거나 친분을 쌓지 않았다.

그 당시, 홍찬영이 세상을 등지고 도망가자고 했다면,

-물론이에요. 당신과 함께 영원히 둘이서만 살 수 있었어요!

라고 대답을 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고마워, 천 씨.”

그리고 홍찬영의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김찬원이 천마의 두 손을 잡았다.

“천 씨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천마는 하늘에서 내려준 은인과 같았다.

자신의 괴로움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친구의 응어리조차 단숨에 풀어주었으니.

“별거 아니다.”

무명을 어깨에 올려두고 있던 천마는 장채원과 함께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차 안.

장채원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천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한 거야?”

“뭐가 말이냐.”

“환상을 보여준다는 기술, 그거 쓴 거 아니잖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던 장채원의 눈동자가 서서히 깊어졌다.

“현정 씨는 분명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안 들리는 상태였어. 심지어 다시 용모까지 젊게 만들었잖아. 대체 어떻게…….”

“마도의 대법 중엔 시강대구술(尸僵大求術)이 있다. 그 대법은 생기가 끊어져도, 잠시 동안은 신체와 용모를 모두 젊은 상태로 만들어주지.”

“와아, 그런 게 있어?”

“그렇다.”

장채원은 잠시 고민하다 다시 물었다.

“그럼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도 있어?”

“그런 건 없다.”

운전대를 잡은 천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그건 신이겠지.”

“그렇구나.”

그런데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무명이 입을 열었다.

[요괴라는 것이 죄일까요? 우월하다는 건 과연 인간들에게 그저 나쁜 것인가요?]

눈 센서를 반짝이던 무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천마 님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무명, 너.”

장채원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부터 말하려 했지만 그런 생각은 위험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뭐가 위험하다는 건가요.]

“천마의 극단적인 생각과 표현에 계속 물들어가는 거 말야.”

[장채원 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천마 님은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이고 매우 냉철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명!”

장채원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몇 가지 능력이나 힘을 갖고 있다고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선 안 돼. 그리고 그 우월함 때문에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거야.”

무명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네가 느끼는 게 뭔지 잘 알아.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나 요괴, 강함과 약함을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 되는 거야.”

무명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해 주세요. 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죠?]

라는 말을 했다간 장채원의 입에서 불벼락이 떨어질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무명의 반항적인 생각을 짐작한 장채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점차 갈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두 이견 차이는 계속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대수롭지 않게 운전하고 있는 천마였다.

“천마, 넌 할 말 없어?”

“설마 본좌가 저런 생각을 주입시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주입이 아니라 영향을 받은 거라고. 너한테.”

천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본좌는 한 번도 어떤 생각과 사상을 다르다고 핍박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엔 우주는 광대무변하지.”

그리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마도와 정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점주는 이 모든 걸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나?”

“그건 궤변이야. 이 주제랑 맞지 않는다고. 난 네 사상을 말하는 거잖아.”

“사상?”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면 걸어라. 믿고 싶은 것이 있다면 믿어라. 모든 걸 속박하는 걸 버려라. 그것이 본좌의 사상이다.”

너무나 파격적인 성향이다.

말 한마디에 칼부림이 나는 살벌한 무림에서는 나쁜 성향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평화로운 이 사회에선 뭔가 위험한 생각에 더 가깝다.

‘안 되겠어.’

무명은 티 없이 맑은 존재였다.

인간을 사랑하고, 요괴를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더 없이 중립을 지켜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이대로 놔뒀다간 무명은 제2의 천마, 아니 천마 키즈가 될 것이다.

‘당분간 천마와 떨어뜨려 놓을 방법을 찾아야겠어.’

남몰래 결심한 장채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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