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요괴 사랑 이야기 (2)
결국 홍찬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창수의 말대로다.
어쩌면 김현정은 자신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이해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이창수가 집요하게 요괴라는 사실을 알린다면?
그녀의 친구, 부모님, 지인… 모두가 그녀를 떠날 수도 있다.
어쩌면 질투에 눈이 먼 이창수가 당국에 고발한다면?
평생 도망자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찬영이는 홀연히 떠날 수밖에 없었구먼.”
모든 이야기를 전해준 김찬원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들리는 말로는 현정 씨는 오랫동안 찬영이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결국 포기하였다고 하더군. 그리고 이창수 그놈과 결혼하고 말야.”
“찬영 씨라는 분은요?”
장채원의 물음에 김찬원이 말했다.
“찬영이는 각성자 생활을 접고, 새 삶을 시작했지. 물론 구성일족 특성상 용모가 전혀 늙지 않은 탓에 연신 직업을 바꾸고, 새로운 신분을 얻어야 했지만 말여.”
빙그레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현재는 김치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의 삶을 살고 있구먼.”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앉아 모든 이야기를 들은 천마가 인상을 썼다.
“시답잖은 이야기군.”
“그려. 시답잖은 이야기지.”
김찬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끝나면 좋았을 이야기였고…….”
어딘가 여운이 감도는 음성이다.
김찬원의 표정을 바라보던 일행들은 이 이야기에 후일담이 남아 있다는 걸 짐작했다.
[이창수라는 자가 현정 씨를 괴롭히는 건가요?]
천마와 함께 다양한 드라마를 감상했던 무명.
흔하디흔한 막장드라마 스토리를 예상했지만 김찬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이창수 놈은 오래전에 간암으로 죽었다고 하더구먼. 천벌을 받은 게지.”
[그렇다면…….]
“그려. 찬영이가 현정 씨를 다시 보게 된 거여.”
현무 요양병원.
은퇴한 각성자들이 들어가는 요양병원이다.
홍찬영은 우연히 지인의 병문안을 갔다가 늙고 쇠약해져 있는 김현정의 모습을 보았다.
이창수와 결혼했지만 아이는 없던 김현정.
홀로 삶을 이어가던 그녀는 늙고 병이 들자 요양병원에 스스로 입원한 것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마음을 전하면 되겠군요.]
무명의 짧고 명쾌한 결론에 장채원이 초를 치고 나섰다.
“민폐야.”
[네?]
“지금에 와서 마음을 고백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늙고 병든 사람에게 말이야.”
그녀의 말에 김찬원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폐랄 것도 없구먼.”
“네?”
“노환으로 인해, 아무것도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않은 채 멍하니 있었으니 말여.”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가요?”
“으응.”
다시 삼복구 한잔을 꿀꺽 마신 김찬원이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우연히 테이블에 올려진 책에 월극화가 꽂혀 있지 않았더라면… 찬영이가 그토록 괴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그게 무슨…….”
“침상 옆 책에 생기있고 반짝이는 월극화가 책갈피로 꽂혀 있다고 하더구먼. 이창수 그놈이 찬영이가 가져온 월극화로 고백을 한 거지.”
일행들은 잠시 침묵했다.
사랑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라는 월극화.
그 신비한 꽃이 아직도 활짝 피어 있다면?
설마 그녀는 아직도 홍찬영을 못 잊고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잖나.”
천마의 말에 김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도 있겄지. 하지만 찬영이는 직감했다고 하더구먼. 현정 씨가 아이를 낳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지금까지 월극화가 피어 있는 이유도, 아직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여.”
“그렇담 이야기는 쉽군.”
천마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가서 구애하면 되잖나.”
“어찌 그러겠어.”
김찬원이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늙고 쇠약해진 탓에 눈도 흐릿한 현정 씨여. 젊고 생기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찬영을 어떻게 알아보겄어?”
천마는 잔뜩 눈썹을 찌푸렸다.
“요괴라는 걸 설명하면 되지 않나. 젊은 게 죄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천마는 남녀 간의 애정에 관해서는 젬병이다.
그나마 이 세계로 와서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감상했기에 이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말로 주절주절 설명할 만큼 현정 씨 상태가 그리 좋지 않어. 노환으로 언제 숨을 거둘지도 모르고 말이여.”
“그럼 뭘 도와달라는 건가.”
천마의 직설적인 말에 김찬원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현정 씨에게 현실과 다름없는 좋은 꿈을 꾸게 해주면 안 될까?”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김찬원이 다시 말했다.
“일전에 천 씨가 내게 해준 것처럼 말여.”
몇 달 전 천마는 꿈속에서나마 김광욱과 회포를 풀 수 있도록, 김찬원에게 대법을 펼쳤다.
영마현기대법.
이 오묘하고도 놀라운 대법의 공능으로, 김찬원은 실제와 다름없는 생생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을 짓눌렀던 응어리가 풀린 것이다.
“술에 취해서 자는 줄 알았더니만.”
“취하긴 했어. 그저 깊이 잠들 정도는 아니었던 것뿐이지.”
천마가 입맛을 다시자 김찬원이 코끝을 훔쳤다.
“어쨌든 천 씨 덕택에 나는 다신 그 일로 괴로워하지 않게 됐어. 고마워.”
“부탁이라는 게 대법을 펼쳐 달라는 말인가.”
“그려. 나한테 해준 것처럼, 현정 씨에게도 찬영이와 해후하는 꿈을 꾸게 해주었으면 좋겠구먼.”
김찬원은 장채원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급하게 천 씨를 좀 빌려야 항께, 장 사장의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말여.”
그제서야 장채원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에요. 그런 일까지 저에게 허락을 맡으실 필요까지야…….”
하지만 천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 사장이 허락해야 천 씨도 허락할 것 같아서 말여.”
천마가 허락하지 않으면 장채원에게 업무 명령으로라도 부탁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에게도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셨군요.”
“그려. 주말까지 기다릴 수가 없구먼. 아무래도 현정 씨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말여.”
홍찬영이 했던 말을 떠올린 김찬원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고…….”
심호흡을 한 김찬원이 두 손을 모아 천마에게 말했다.
“천 씨. 부탁 좀 할게. 응?”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연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천마는 단칼에 손을 내저었다.
“거절한다.”
“뭐? 왜?”
옆에 있던 장채원이 펄쩍 뛰자 천마가 인상을 썼다.
“본좌의 대법은 아무에게나 쥐여주는 무료 상품이 아니다. 타인의 심령을 조작해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야멸찬 대답에 김찬원이 입을 벌리며 더듬거렸다.
“어떻게 안 되겄어?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으응?”
“김 씨 본인 일도 아니잖나.”
“찬영이는 내 절친한 친구란 말여. 정말 나랑 둘도 없이 친하고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천마는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게 본좌란 무슨 상관인가.”
순간 술자리는 얼어붙었다.
아무리 야박하고 남에게 관심 없다고 하지만, 주변 인물, 특히 김찬원에게는 제법 마음을 써주는 천마였건만.
이토록 애절한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다니.
“김 씨의 일이라면 한다.”
장채원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천마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김 씨의 친구까지 신경 쓰라는 건 본좌를 너무 물로 보는 게 아닌가.”
“그래도 좀 해주면 안 돼? 무협지엔 사해가 모두 동도…….”
천마가 꿈쩍도 하지 않자 장채원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고용주로서 부탁 좀 하자. 이번 일 좀 도와줘, 응?”
“업무 명령이라면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업무와 관계없는 내용인 것 같군.”
매정한 대답만이 돌아오자 김찬원이 억지로 미소 지었다.
“미안하구먼. 내가 괜한 부탁을 해서 말여.”
“김 씨가 미안할 일은 아니다.”
“그, 그럼 내는 먼저 일어날 텡께 편히 돌아가라고. 계산은 미리 다 해놓을 테니.”
터져 나오는 실망감을 참을 수 없던 김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김찬원 님.]
가만히 듣고 있던 무명이 눈 센서를 번뜩였다.
[제 예상입니다만, 천마 님은 친우, 그러니까 친구라는 개념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절한 것이고요.]
“무슨 헛소리냐.”
천마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본좌가 친구라는 개념을 모른다고? 네놈은 본좌를 바보로 아는 것이냐.”
눈 센서를 크게 키워 천마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던 무명이 말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리고 초장에 찍은 광어회를 집어 우물우물 씹고 있는 천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마 님에겐 친구가 있습니까?]
“없다.”
[없었습니까?]
“없다.”
[있었는데 없어진 겁니까?]
“아니, 그냥 없다.”
그 순간 장채원과 김찬원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생각해 보면 저 앞뒤 꽉 막히고 위험한 사고방식을 가진 독불장군, 천마에게 친구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심지어 천마 본인도 오직 자신의 주변엔 부하와 적만 있을 뿐이라고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던가.
[천마 님. 친구라는 건 말입니다…….]
“시끄럽다. 본좌가 묻지도 않은 말을 가르치려 하지 마라.”
[천마 님.]
무명은 안타까웠다.
김찬원의 친우, 홍찬영 역시 요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연인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가능한 천마가 이 일을 돕게 만들고 싶었다.
“하아.”
보다 못한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며 천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천마야.”
“말하라.”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자신이 없다.
감정이 말살된 저 터미네이터 같은 녀석에게 ‘우정’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명확히 설명해 줄 자신이…….
고민 끝에 장채원은 대신 천마가 알아들을 수 있는 직설적이고 명쾌한 단어를 선택했다.
“수당 두둑이 쳐줄게.”
각성자협회 산하, 현무 요양병원, 10층 1002호.
그곳에는 과거 힐러로 퍽 이름을 날렸던 각성자가 살고 있었다.
비록 결혼 후 각성자 생활은 은퇴했으나, 많은 던전을 안정화시키고 몬스터로부터 사람들을 구한 공로가 인정되어, 현무 요양병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현정. 바로 김찬원의 친우, 홍찬영이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똑똑똑.
“실례합니다.”
맑은 음성과 함께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미녀.
그리고 멋들어진 괘자를 입은 남성이 나노봇을 어깨에 멘 채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천마와 장채원, 그리고 무명이었다.
“…….”
김현정은 그저 침상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비록 기운이 없는 듯하고 몸은 비쩍 말라 있지만, 눈동자는 맑고 자애로운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마와 장채원은 한눈에 그녀의 성품이 매우 고아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김현정 님의 친구분에게 부탁을 받고 말씀을 전해드리러 왔는데요.”
“소용없다. 아예 귀를 닫은 상태로군.”
대뜸 앞으로 나온 천마가 영마현기대법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할멈, 본좌의 눈을 봐라.”
식지와 중지를 관자놀이에 갖다 댄 천마의 눈동자가 자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웅웅웅.
낮은 진동과 함께 눈동자에서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심령을 장악하여, 원하는 것의 환상을 보여준다는 천고의 비술.
영마현기대법이 펼쳐진 것이다.
“차압!”
천마의 기합이 병실에 울려 퍼졌다.
“…….”
하지만 김현정은 관자놀이에 손을 갖다 댄 채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천마를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흠칫 놀란 천마는 다시 한번 영마현기대법을 펼쳤다.
“허업!”
역시나 통하지 않는다.
그제야 천마는 김현정의 눈동자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비록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만, 눈동자에는 그 어떤 대법도 능히 튕겨낼 수 있는 굳건하면서도 강인한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자하금안(紫霞金眼)을 갖고 있군.”
자하금안.
자하선인의 은혜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 얻는 눈동자로, 어떠한 외력이나 대법이 통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후천적으로 귀문의 비술을 연마하여, 척령화안(斥靈火眼)을 연마한 천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셈이다.
“왜? 잘 안 되는 거야? 아프셔서?”
장채원의 속삭임에 천마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다. 애당초 영마현기대법이 통하지 않는 눈을 가졌다.”
“뭐? 그럼 어떡해?”
“몸 상태를 보니 오늘내일하는군. 어차피 틀린 일이다.”
천마는 매정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김현정의 초점 없는 시선을 빤히 바라보던 장채원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죄송합니다.”
그날 저녁, 복복 인테리어 매장 내부.
둥그런 응접 테이블에 앉아 설명을 듣고 있던 김찬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그냥 손으로 머리를 만지면 되는 거 아녔어?”
당시 김찬원은 술은 취해 잠들었고, 천마는 그의 머리에 손을 까닥 대었다.
“손가락 하나로 타인의 심령에 스며드는 대법이 어딨겠나.”
하지만 천마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김 씨의 심정이 좋지 않을 걸 예상해, 그 전부터 미리 영마현기대법을 펼친 거다. 머리에 손을 댄 것은 백회혈을 열어 대법의 기운을 빨리 받아들이게 한 것뿐이지.”
“그런 거였구먼.”
김찬원은 살짝 감동을 느꼈다.
무감정한 나무토막처럼 굴 때도 있지만 천마는 생각이 깊다.
이미 술을 마시기 전부터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대법을 준비한 것이다.
“그럼 어떡해?”
“말했잖나. 어차피 틀린 일이라고.”
장채원의 말에 천마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하금안을 갖고 있는 이상, 동술(瞳術)을 이용해 심령을 조종하는 건 어렵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어?”
장채원의 말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다.”
[그렇다면 이 일은 실패한 것이군요.]
실패.
천마의 앞에선 결코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다.
무명의 말에 천마가 인상을 팍 썼다.
“그 쭈그렁 할멈이 자하금안을 가지고 태어날 줄 본좌가 어찌 알았겠느냐.”
[천마 님답지 않은 궁색한 변명이십니다.]
빠지지직.
순간 천마의 몸에선 격렬한 반극진기의 불꽃이 번쩍임과 동시에 눈동자에선 시뻘건 혈염광휘가 치솟았다.
“감히 그따위 말을 본좌 앞에서 하다니. 간이 붓다 못해 터져 나갔단 말이냐.”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천마의 음성에 무명은 정신을 화들짝 차렸다.
[죄송합니다, 천마 님.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뭐란 말이냐.”
[김찬원 님의 친구분을 꼭 도와주고 싶습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무명의 말에 천마뿐만 아니라 장채원과 김찬원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생판 알지도 못하는 일에 무명이 저토록 발 벗고 나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