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요괴 사랑 이야기 (1)
새벽 무렵, 고요한 공기만이 감도는 시간.
천마는 평상 위에 단정히 앉아 운공을 하고 있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은은히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바닥에는 진동이 울려 퍼진다.
[…….]
평상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무명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옥탑방 난간 위에 올라섰다.
먼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아름다운 빛을 세상에 내려주고 있었다.
적막하면서도 고요한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던 무명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요괴란 존재는 무엇일까?
유이나 사건 이후.
무명은 그동안 천마가 인간이란 존재를 경멸하거나 냉소하며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인간을 경멸하거나, 하잘것없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그 말들이, 단순히 살벌하고 삭막한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요괴와 각성자는 닮아 있다.
평범한 인간들에 비해 소수이며, 제각기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평범한 인간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 역시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요괴와 달리 각성자는 인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각성자는 누구에게도 핍박받지 않고, 자유롭게 삶을 살아간다.
원한다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큰돈을 벌 수도 있고, 유명인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요괴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무리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저 부정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어쩌면 요괴라는 존재가 공개된다면, 연구 대상이 되거나 혹은 멸종시켜야 하는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비슷한 두 존재가 어째서 이토록 극명한 차이점을 가지는 걸까.
[어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하늘은 뿌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잠깐 생각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새벽을 꼬박 샌 것이다.
[정말 모르겠군요.]
무명은 난간에 만들어진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무명의 기분이야 어떻든 간에 세상은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자 도시는 다시 활력이 넘쳐흘렀고, 운공을 마친 천마는 바삐 출근을 시작했다.
“좋은 아침!”
매장에 도착한 천마가 청소를 마칠 무렵, 장채원이 출근했다.
아침이면 조금은 처질 만도 한데, 출근하는 그녀의 얼굴엔 늘 생기가 흐르고 눈동자는 반짝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얼굴이 더 박력 있네. 잠을 잘 못 잤나 보지?”
“잘 잤다.”
“그렇구나.”
책상에 앉은 장채원이 방실방실 웃을 무렵, 무명이 말했다.
[그럼 저는 창고 방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응.”
떼굴떼굴 굴러가던 무명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다시 말했다.
“무명.”
[네?]
“어디 아파?”
고도로 발달된 현대 과학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계에게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장채원은 언제나 무명을 평범한 사람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명은 그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그럴 리가요. 아프지 않습니다.]
전과 다르게 힘차게 대답한 무명이 다시 창고 안으로 굴러갔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하늘이 검게 물들어갔다.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은 한가한 하루였다. 천마는 책을 읽고 장채원은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매장이 바쁘지 않은 관계로 고은진과 김찬원은 며칠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간간이 대화가 오가기는 했으나, 늘 그렇듯 별로 영양가 없는 말들이었다.
창고 방 내부.
무명은 밥그릇처럼 생긴 구형 충전스테이션에 드러누운 채 조명이 매달린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복잡한 연산을 하는 것 같지만 무명은 실제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벌써 퇴근 시간이구나.]
절전 모드에 들어간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무명이 눈 센서를 반짝였다.
밖에서 천마가 읽고 있던 책을 주섬주섬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천마가 자신을 부를 것이기에 무명은 미리 몸을 일으켜 매장으로 굴러나갔다.
딸랑.
그때 풍경 소리와 함께 매장의 문이 열렸다.
일반 손님이라면 재빨리 피했겠지만, 무명은 그 자리에서 우뚝 서 있었다.
들어오는 그림자는 다름 아닌 김찬원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퇴근 전이구먼.”
평소와 달리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김찬원이 쑥스럽게 미소 지으며 들어왔다.
노트북에서 시선을 돌린 장채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디 놀러 갔다 오셨어요? 어쩐 일로 그렇게 멋지게 차려입으셨대요?”
별다른 시공일이 없는 탓에 김찬원을 본 지도 며칠이나 된 터였다.
김찬원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쑥스럽게 웃었다.
“아아,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오느라고.”
“그러셨군요.”
“장 사장. 오늘 혹시 시간 괜찮아? 노병에서 한잔 어뗘?”
“노병이요?”
“으응, 내가 살 텡께, 삼복구나 한잔하자고.”
기가 막힌 안주와 맛있는 술, 그리고 분위기까지 끝내주는 선술집 노병.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복구 가격은 헛웃음이 나올 만큼 비싸다.
큰 맥주잔에 담긴 술이 30년산 양주 한 병 가격과 비슷할 정도라, 장채원도 큰맘 먹고 시켜야 할 정도였다
“어우, 좋죠.”
“천 씨는? 퇴근하면 뭐 혀, 바빠?”
김찬원의 물음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그려? 뭔 일이 있는디?”
“오늘은 <나의 어사님> 3부, 제작발표회가 라이브 영상으로 진행된다.”
“응?”
“앞으로 방영될 전반적인 스토리와 등장인물 소개, 그리고 주인공들의 심층 질의 문답 시간까지 있다. 결코 놓칠 수 없지.”
가만히 듣고 있던 장채원의 눈썹이 일자로 변했다.
“과연.”
천마는 유이나의 진성 오덕후가 분명했다.
“천, 천 씨.”
더없이 진지한 천마의 얼굴을 보며 김찬원이 멋쩍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거, 나중에 보면 안 될까?”
“나중에라니.”
“천 씨에게 꼭 부탁할 것이 있어서 말여.”
“부탁?”
잠시 고민하던 천마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군. 배우들의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와 드라마 전반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자리라서 말이다.”
“그, 그렇구먼.”
김찬원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아, 무언가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천마 님.]
보다 못한 무명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오늘은 김찬원 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제작발표회 영상은 제가 녹화해 두겠습니다.]
천마가 영상 라이브를 반드시 보려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무명이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천마 님이 응모했던 질문이 라이브 영상 채팅창에 채택되도록 손을 써두고 말입니다.]
이번 제작발표회에선 ‘궁금한 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Q&A’라는 코너가 있었다.
그리고 천마는 무명을 통해 궁금했던 질문을 응모한 상태였던 것이다.
“답변을 확실히 들을 수 있단 말이군.”
[네, 네에.]
무명의 대답에 잠시 고민하던 천마가 김찬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한잔하러 가지.”
선술집 노병.
멋스런 나무로 만들어진 이 외딴 선술집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맛있는 안주와 향기로운 술을 빚어 파는 곳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손님은 적었고 매장은 한적했다.
외딴곳에 있기 때문에? 아니면 술값이 비싸서?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장금선과 주방 담당 초홍이 사실, 단골손님만을 가려 받기 때문이었다.
노병에 들어올 수 있는 손님이 되는 조건은 의외로 까다롭다.
첫 번째. 경박하지 않고 품위가 있는 성격이어야 한다.
두 번째. 좋은 술과 안주를 구분하고 즐길 줄 아는 섬세하고 풍부한 미각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건 장금선과 초홍이 남몰래 판단하기에 손님들은 꿈에도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할 테지만.
“카아!”
구석 자리에 앉아 삼복구를 가득 따른 피처잔을 단숨에 비운 장채원이 탄성을 질렀다.
“이게 사는 맛이지.”
타악.
경쾌하게 나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는 장채원은 야들야들하게 찐 스지(소힘줄)와 아롱사태살을 소스에 찍어 먹었다.
스지찜을 씹자마자 양 볼을 두 손으로 잡은 장채원이 또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아아, 입에서 녹아내려.”
또다시 삼복구를 들이켠 장채원은 이번엔 두툼한 광어회와 마늘을 초장에 찍어 쌈 채소와 함께 싸서 먹었다.
“회엔 역시 마늘이 올라가야지!”
요란하게 술과 안주를 먹는 장채원을 바라보며 천마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점주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생긴 것답지 않은 다혈질에다, 평소 몸가짐이 신중치 못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푼수로 보일 만큼 식사 예절이 없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은 반응이 상당히 과하다.
‘그런 거였나.’
벙어리 미소를 머금고 있는 김찬원의 표정을 발견한 천마.
그제서야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경직된 분위기.
김찬원은 흥 많고 익살스런 노인이었으나,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에선 속내를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것은 겉보기와 달리 그의 과거가 말 못 할 괴로움과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김찬원 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 건가요?]
직설적인 질문을 날린 건 다름 아닌 무명이었다
직접적으로 부탁할 것이 있는 천마와 장채원이 아닌, 제3자인 자신이 묻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아, 아녀. 안 좋은 일이 아니라…….”
무명의 배려는 효과가 있었는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던 김찬원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친구 중에 홍찬영이라고, 피부를 금강석처럼 바꿀 수 있는 구성(九星)일족의 요괴가 있는디…….”
구성일족 홍찬영.
그는 김찬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비슷한 점은 과거 인간들과 함께 던전의 몬스터들을 공략했다는 점이었고, 다른 점은 지금까지도 그는 요괴라는 걸 밝히지 않은 채 인간들과 살아간다는 점이었다.
퍼스트 버스터 이후, 전 세계에서는 각성자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각성한 수많은 인간들이 팀을 꾸려 가변던전을 공략하고, 안정화시켰다.
다만, 그 당시엔 지금과 같은 각성자 등록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든 원한다면 던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찬영이는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을 경질화 스킬이라고 속이고, 인간들이 모여 있는 팀에 들어갔구먼.”
혈기 왕성한 젊은 남녀들이 모여 있는 팀 ‘세시봉’에 들어간 홍찬영.
그는 요괴이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그리고 세시봉 팀의 일원이 되어 십 년 동안 그들과 함께 던전을 공략했다.
“그리고 그 팀엔 아주 아름다운 힐러가 있었지.”
홍찬영은 세시봉 팀에서 활동하는 동안, 홍일점이자 미녀 힐러, 김현정을 줄곧 짝사랑했다.
“처음 만난 때부터 십 년 동안 현정 씨를 줄곧 좋아했다고 하더구먼. 하지만 요괴라는 걸 숨기고 있었기에 다가갈 수가 없었지.”
삼복구 한잔을 쭉 들이켠 김찬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고백을 하러 마음을 먹고, ‘설산’ 던전에 들어가 월극화(月橶花)를 따기로 했지.”
“월극화? 그게 뭔가.”
천마의 물음에 김찬원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연심(戀心)을 양분으로 먹고 산다는 꽃이구먼. 찬영이는 설산 던전에 숨어 있는 월극화를 현정 씨에게 주고, 그 꽃이 계속 피어 있다면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지.”
사랑하는 마음을 먹고 산다는 신비한 꽃 월극화.
애정을 양분 삼아 피어 있는 월극화라면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신중하면서도 로맨틱한 방법이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장채원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이어서 말을 하는 김찬원의 눈빛은 궂은 날씨처럼 흐릿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같은 팀에 있는 이창수라는 놈이었어.”
팀 세시봉의 탱커이자 김현정과 동갑내기였던 이창수.
그 역시 오랫동안 김현정을 짝사랑했던 것이다.
[문제될 게 없잖습니까? 짝사랑 라이벌이 있든 없든, 그건 김현정 님의 선택에 달린 거니까요.]
무명의 분석에 김찬원이 씁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말여, 이창수라는 작자가 찬영이가 요괴라는 걸 알아부렀지 뭐야? 그래서 찬영이가 고백하던 그날 밤…….”
* * *
“이 꽃은 월극화라고 해.”
홍찬영은 목숨 걸고 S급 던전, ‘설산’의 절벽 끝자락에 신비롭게 피어 있는 월극화를 채취했다.
그리고 김현정을 불러내어 꽃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했다.
“내 마음을 받아줄래?”
깊은 밤, 아무도 없는 던전 입구에서 김현정에게 고백 연습을 하던 홍찬영.
하지만 그는 결국 고백은커녕 김현정의 얼굴조차 다시는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앞으로 이창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포기해, 현정이.”
홍찬영이 고백할 거라는 걸 짐작한 이창수.
심지어 그는 김현정 역시 홍찬영을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빤히 알고 있었다.
“네가 요괴라는 걸 알아.”
가만히 있으면 홍찬영에게 김현정을 뺏길 것이 두려웠던 이창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장 우리 팀에서, 아니 현정이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이 사실을 알릴 거야.”
이창수의 협박에 홍찬영은 크게 분노했다.
“이 치사한 녀석! 내가 얼마나 널… 많이 구해주고 도와줬는데. 어떻게 날 협박하냐?”
세시봉에서 탱커 역할을 맡은 홍찬영.
그는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위험한 상황에서 이창수의 목숨을 여러 번 구했다.
심지어 이창수를 구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할 만큼 극심한 부상을 입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일로 자신을 협박하다니?
“사랑에 치사한 것 따윈 없어.”
“뭐?”
“나도 현정이 사랑해. 너보다 더.”
홍찬영의 멱살을 움켜쥔 이창수.
그의 눈에선 질투와 집념이 뒤섞인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요괴 따위에게 결코 현정이를 줄 수 없어. 무슨 소린지 알아?”
“어차피 난 요괴라는 걸 현정이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이런 협박이 통할 것 같냐?”
“그렇겠지. 현정이라면 어쩌면 널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
이창수는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네가 요괴라는 걸 모든 팀원들이 알게 되면?”
“뭐?”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게 된다면?”
이를 꽉 깨문 이창수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다.
“평생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떠돌이 신세가 될걸? 너 하나 선택한 죄로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