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59화 (159/285)

제159화. 던전의 비밀통로 (4)

“지금 이 상황 안 보이십니까?”

“뭘 말이냐.”

“저 괴물들 말입니다.”

“아주 좋은 기회잖나.”

“죽으란 말입니까?”

고개를 돌린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극한의 전투는 무인을 성장시키지.”

보다 못한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고은진 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기면 된다. 저 강시 같은 놈들은 오직 전투본능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 같으니…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야, 이 씨이…….”

고은진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인정 없고 냉혹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헛소리만 할 줄이야.

[고은진 님.]

그때 무명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로 표현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천마 님은 냉정하지만 같은 업계에 있는 동료를 외면할 분은 아니십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고은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살려주세요. 헬프 미(help me). 쪼밍아(救命啊). 힐페(Hilfe). 오 쓰꾸르(Au secours).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살려달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한 번도 살려달라는 말을 내뱉은 적은 없다.

“…….”

팔짱을 낀 천마는 고은진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분명 살려달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저 인정머리 없는 근육몬은 결코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도…….”

두 주먹을 꽉 쥔 그녀가 ‘도와주십쇼’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본좌가 말하지 않았나. 결국 이 녀석은 남의 것을 주워다 파는 수준밖에는 안 되는 거다.

출근을 시작할 무렵, 천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모멸감을 느낀 말이었다.

“도움 따윈 필요 없지 말입니다!”

버럭 소리친 고은진은 분노를 터뜨리며 요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 또다시 투명한 광채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또다시 신병기사를 소환하려는 것이다.

지이이잉.

순간 환한 빛과 함께 고은진의 몸에서 투명한 신병기사의 모습이 드러났지만,

“으으으.”

체력이 크게 떨어진 탓에 몸과 분리시킬 수가 없었다.

-쿠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변신각성자들이 낮은 웃음과 함께 주먹을 내뻗자, 고은진이 강력한 요력을 발휘했다.

“합신(合身)!”

그 순간 신병기사가 그녀의 몸에 흡수되더니, 투명한 갑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심력과 체력이 소모된 탓에 신병기사를 완벽히 불러내지 못하자, 몸에 신병기사를 덧씌워 전투력을 높이는 수법이었다.

퍼엉! 쨍그랑.

하지만 폭음 소리와 함께 고은진은 갑주가 박살 난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합신이 끝나기도 전에 각성자들이 달려와 주먹을 퍼부은 것이다.

“멍청한 것. 적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변신을 하다니.”

천마의 중얼거림을 들은 고은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 끄럽지 말입니다!”

그녀의 오른팔에는 아직 신병기사의 갑주가 맺혀 있었다.

“하압!”

번개처럼 앞으로 달려 나간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사악!

예리한 빛과 함께 선두에 서 있던 각성자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덤벼! 이 근육몬 사촌들아!”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던 고은진이 이를 깨물었다.

본래 환진일족은 그 어떤 요괴보다 전투에 능하고 호전적이다.

“지금까지 무서워서 싸움을 피한 줄 아냐!”

고은진의 치켜뜬 회색 눈동자에선 엄청난 살기가 솟구쳤다.

그녀는 전투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를 벌일 때마다 잔혹하고 강해지는 환진일족의 피가 싫었던 것뿐이다.

촤악! 번쩍!

합신에 실패했음에도 고은진은 강했다.

오른팔에 남아 있는 신병기사의 갑주로 순식간에 세 명의 변신각성자들을 베어내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고은진의 체력과 정신력도 바닥난 상태였다.

특히 뒤에서 기습을 당한 탓에,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 없을 만큼 심한 상처를 입었다.

퍼억.

잠시 허점을 보이자, 어느새 두 주먹을 모아 쥔 변신각성자가 그녀의 등을 강하게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 덤벼. 덤비라고!”

-쿠후후.

잔혹한 웃음을 지은 각성자 두 명이 동시에 발을 허공에 드는 순간,

“으윽.”

갑자기 고은진의 동작이 멈추었다.

괴상한 청년이 사용한 힘에서 완전히 회복되자, 급격히 차오른 요력이 오히려 그녀의 몸을 경직시킨 것이다.

‘이런 젠장!’

쏟아지는 거대한 발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콰우우우우!

강렬한 바람과 함께 쏟아진 붉은빛이 두 변신각성자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실전 경험이 너무 없군.”

한 손으로 천수공파를 쏟아낸 천마는 쓰러진 고은진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힘을 사용하는 법도 부족하고.”

“참견… 마십쇼.”

쓰러져 있던 고은진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도와달란 말 안 했지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의식을 잃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졸졸졸.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온몸이 따뜻해졌다.

다시 태아가 되어 따뜻한 엄마의 뱃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졸졸졸.

또다시 물소리가 들리자,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며 몸 안의 노폐물과 찌꺼기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으음.”

가벼운 콧소리를 낸 고은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천마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숨을 내쉬자 천마의 얼굴이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이제 보니 그녀는 맑은 물속에 들어가 있었고 천마는 발로 그녀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뭐, 뭡니…….”

입을 열자 입에서 물방울이 보글거렸다.

그녀가 몸을 버둥거리자 천마가 인상을 쓰며 발에 힘을 주었다.

“움직이지 마라.”

천마는 엄숙한 눈빛으로 고은진을 내려다보았다.

“꼬이고 들끓은 기혈을 간신히 풀고 안정시켰다. 온천의 물은 따뜻하니 이대로 있음 곧 회복될 거다.”

그러고 보니 몸속에 따뜻하고 오묘한 기운이 빙글빙글 돌며 몸을 치료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고은진은 발로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천마를 보며 외쳤다.

“보글보글! 보글보글!(됐슴다. 신경 끄십쇼).”

“본좌의 진기를 헛되이 날릴 셈이냐?”

“보글(뭐)?”

“곧 끝난다. 얌전히 있어라.”

천마의 눈빛은 위엄이 가득했다.

“보글보글보글… 에잇!”

벌떡 일어난 고은진이 천마의 발을 치우며 소리쳤다.

“도와달라고 한 적 없지 말입니다!”

천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근데 왜 멋대로 도와줍니까?”

“부하에 대한 배려라고 해두지.”

“난 선임몬 부하가 아니지 말입니다.”

고은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리고 난 남의 것을 주워다 판 적 없고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몸을 부들부들 떨던 고은진이 버럭 소리쳤다.

“남의 것이나 주워 파는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습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지하 온천엔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잠시 침묵하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해두지.”

“무슨 말입니까.”

“그때는 무인의 혼이 보이지 않았으니.”

천마는 무인을 존중하며, 강자를 예우한다.

그는 방금 전, 죽을힘을 다해 몬스터와 싸운 고은진의 모습에서 무인의 혼을 발견한 것이다.

“무인의 혼? 그건 또 무슨 헛소립니까.”

“모르면 됐다.”

천마는 벌떡 일어난 고은진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 회복되었나 보군.”

“관심 끄지 말입니다.”

걸음을 내딛으려던 고은진은 그제야 자신의 옷이 모두 젖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물속에 마주 선 채 천마의 뜨거운 시선을 마주하자 왠지 부끄러웠다.

“쳐다보지 마십쇼!”

“안 본다.”

[근데 아까 그 괴물의 정체가 뭡니까?]

그때 쭈그려 앉아 있던 무명이 물었다.

[아까 고은진 님에게 덤벼들었던 괴물들 말입니다.]

옷을 쫘악 짜낸 고은진은 심호흡을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범죄자들이랬어.”

[네?]

“가변던전 같은 곳에서…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저들은 그 결과물이고…….”

고은진이 손가락을 가리켰지만 이미 변신했던 각성자들은 한 줌의 핏물로 변해 있었다.

[범죄자들로 몬스터를 만들었다고요? 누가요?]

“나도 잘 몰라. 협회의 각성자라기보다는… 꼭 이상한 비밀단체의 사람처럼 보였어.”

무명의 눈 센서가 강렬하게 반짝였다.

심각한 일이다.

고은진의 말대로라면, 저 괴물들은 인체를 베이스로 한 비윤리적인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이었으니까.

“누구냐!”

그때 물속에 서 있던 천마가 어둠 속을 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또각또각.

그러자 저 멀리 갈림길에서 작은 서치라이트를 든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앞머리가 없는 칼 단발머리를 한 채 나노슈트를 입은 여성, 신채영이었다.

“아저씨?”

온천 쪽으로 걸어온 신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뭐 해요?”

“본좌는…….”

천마가 말문이 막히자 무명이 재빨리 대답했다.

[온천욕 중입니다!]

“온천욕?”

눈을 찌푸린 신채영은 그제서야 고은진을 발견했다.

잔뜩 젖어 있는 몸으로 마주 서 있는 천마와 고은진.

그 모습은 영락없이 던전 속에서 밀회를 하는 모습이 아닌가?

“당신은…….”

고은진을 발견한 신채영이 더듬거리자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같이 온천욕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고은진이 펄쩍 뛰었다.

“미쳤습니까, 선임몬? 말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리고 신채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채영 씨. 이곳의 온천물은 매우 따뜻합니다.]

무명이 앙상한 손을 흔들었다.

[한번 들어오시겠어요? 유황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피부병과 부인병에도 효과가 좋습니다.]

“나도 들어오라고?”

고은진의 젖은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신채영은 차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렘은 사양이야.”

[네?]

“어서 빨리 나가. 이 지하 던전, 협회에 보고해야 하니까.”

[보고요?]

순간 무명은 머릿속에 묘한 생각이 들었다.

가변던전과 세이프던전이 즉결로 연결되어 있는 이 지하통로는 앞으로 무궁무진한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채영이 보고한다면 이 지하 던전은 앞으로 영영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아 참, 이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화제를 돌린 무명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까 가변던전 지역에서 이상한 인물들이 들어와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

신채영은 무명의 말을 자르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거 협회에서 승인한 조사야. 가변던전 관리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라고.”

[가변던전 관리 실태 조사요?]

그럴 리 없다.

방금 전 고은진에게 덤벼들었던 괴상한 몬스터는 또 뭐란 말인가?

‘어쨌든 이 통로는 너무 아까운데.’

[신채영 님. 천마 님께서는 남몰래 던전을 지켜오신 분입니다.]

화끈하게 뻥을 친 무명이 다시 말했다.

[이 지하통로의 보고는 나중에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금 더 조사해야 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황당한 부탁이다.

무명은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저 차가운 협회 요원이 이런 막무가내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팀장님께 말은 해볼게.”

잠시 고민하던 신채영은 놀랍게도 긍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구나.’

무명은 신채영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의 빛을 캐치했다.

그것은 신뢰였다.

천마는 어느새 특수대응팀이 무한히 신뢰하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신채영은 고개를 숙이는 무명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이상한 나노봇 녀석’이라고 내뱉고 싶은 듯한 얼굴이다.

“됐으니까 빨리 나가.”

짧은 한마디를 남겨둔 채 신채영은 어둠 속으로 홱 사라졌다.

“선임몬. 어서 가십쇼.”

그때 고은진은 천마의 옷깃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녀가 오해하잖습니까? 빨리 가십쇼!”

“무슨 말이냐.”

“선임몬과 나 사이를 오해하고 있지 말입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천마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어서 가라. 본좌도 복귀해야 하니까.”

* * *

“이런…….”

어느 가변던전의 던전 중심부.

반달눈을 접은 청년이 놀란 표정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다섯 마리의 실험체와 함께 얌전히 있어야 할 여성 요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풀다니. 역시 평범한 각성자가 아니었나요.”

잠시 고민하던 그는 턱을 쓰다듬었다.

“실험체들이 같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분명 이곳에 비밀스런 통로가 있다는 건데.”

흥미로운 눈으로 던전 내부를 살펴보던 청년이 피식 웃었다.

“뭐, 상관없으려나요. 오늘부로 이 재미없는 짓도 끝이니.”

그리고 안쪽 호주머니에서 투명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유리처럼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작은 물체는 겉모습은 마치 세열 수류탄과 흡사했다.

특히 화약이 채워져야 할 부분엔 투명한 액체와 팥알만 한 붉은색 돌이 뒤섞여 있었다.

-띠링.

클립을 제거한 후 안전핀을 뽑은 청년은 무심한 동작으로 수류탄을 던전 중심부에 던졌다.

퍽. 치이이이이.

붉은 액체가 땅속으로 스며들자, 갑자기 던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우웅. 쿠르르르.

좌우로 흔들리던 땅은 어느새 맹렬한 상하 진동으로 바뀌었고, 동시에 던전의 벽이 흘러내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던전의 불안정화.

안 그래도 불안했던 가변던전 내부가 그 물체로 인해 극도의 불안정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겠죠”

흔들리는 던전을 올려다보던 청년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쿠지지직.

뱀처럼 꿀렁거리던 던전의 벽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번에는 조금씩 구조가 변해가고 있었다.

수류탄으로 인해 던전이 다시 재구축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덕택에 흥미로운 걸 발견했으니까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청년의 몸은 출구가 있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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