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53화 (153/285)

제153화. 반요가수 유이나 (4)

“아니, 이 아저씨가 자꾸 제 나노 플레이어를 달라고 해서요.”

엑스트라의 외침에 감독은 거구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자갈기와 같은 머리칼을 대충 틀어 올린 사내의 용모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복장은 암행을 다니는 왕족마냥, 이루 말할 수 없이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회검빛 괘자를 입고 있었다.

“또 당신이야?”

감독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날 찰나, 이번엔 유이나가 황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망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인 유이나를 보며 감독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나야. 촬영장까지 계속 데려와야겠어?”

“죄송해요. 그게…….”

“예전에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야? 이젠 괜찮잖아.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없다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장비가 부서지고, 스태프가 부상을 입는 등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던 나의 어사님 촬영장.

연이은 사건과 유이나의 멘탈 문제로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다시 환한 미소를 되찾은 유이나의 복귀에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고,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유이나가 데려온 듣도 보도 못한 두 마리 짐승 때문에 연이어 촬영이 중단되었다.

“어휴, 저건 또 무슨 괴상한 취미야.”

감독은 하회탈을 쓴 천마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나야. 어지간하면 각성자들은 경호원으로 쓰지 않는 게 좋아. 쟤들은 힘만 믿고 경호원 교육은 잘 안 받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문제가 많이 생긴다고.”

“네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주의 드리고 올게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유이나는 멀뚱히 서 있는 천마에게 달려가 속삭였다.

“아저씨. 촬영 현장에는 멀리 떨어져 있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멀리 있었다. 하지만 저 사내의 움직임이 매우 부자연스럽더군. 그래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의 뻔뻔한 대답에 유이나는 빙그레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나저래나 자신을 열심히 지켜주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그 방증으로 천마가 경호원이 된 이후로,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어쨌든 곧 마지막 씬 촬영이에요. 금방 끝나니까 조용히 계셔주세요. 알겠죠?”

“알겠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고, 유이나와 남주인공의 열연이 계속되었다.

천마는 멀찌감치 서서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초감각은 촬영장 전체에 퍼져 있었으나, 어느 순간 유이나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사랑이란 감정과 희생을 착각하지 마세요! 절 위해 감내하면 행복하다고요? 그럼 저는요?”

유이나의 애절한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그걸 바라봐야 하는 저는요?”

그녀의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떨어지자 세트장엔 한없이 슬프면서도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대단하군.’

천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상황이 꾸며낸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유이나의 표정을 보면 도무지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찬 감정들의 빛깔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눈빛, 더 없이 진지하고도 서글픈 목소리.

어찌 저 행동들이 가짜일 수가 있단 말이더냐.

‘그렇다면 역시 변사또, 그놈도…….’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변사또로 분한 배우는 촬영 중단 전에 모든 촬영을 마친 상태였다.

만약 오늘 촬영에 나왔더라면 그 배우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이상하군요.]

유이나와 남주인공의 촬영 씬이 끝나자,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무명이 눈 센서를 번뜩였다.

[이제 마지막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전혀 방해 공작 따위가 없으니 말입니다.]

“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천마가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유이나는 모포를 뒤집어쓴 채 감독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장면을 촬영하는지, 대기하고 있던 엑스트라들과 무술팀이 세트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본좌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후퇴한 것이겠지. 섣불리 나타났다간 요괴라는 걸 들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천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무명이 둥그런 머리통을 연신 움직였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걱정이 됩니다. 유이나 님이 각성자를 초빙했다고 판단하고, 다른 흉계를 꾸미려는 것일까 봐서요.]

분명 월령일족의 요괴들도 천마의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천마가 입을 열려던 찰나,

“쳐라!”

그때 시꺼먼 옷을 입고 복면을 쓴 무술팀과 엑스트라들이 우르르 몰려와 남주인공을 포위했다.

극 중,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한 암살자들이 몰려온 것이다.

“저놈의 목을 가져오거라!”

암살자들의 우두머리가 소리치자 부하들이 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오너라!”

선비 옷을 입은 남주인공 역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무술을 배웠는지, 대역을 쓰지 않고 무인들을 상대하는 남주인공. 치열하게 합을 맞춘 액션 탓에 전투 장면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크윽.”

삭삭 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던 남주인공은 결국 어깨와 무릎에 상처를 입고 무릎을 꿇었다.

“후후후.”

예리한 검을 치켜든 암살자 우두머리가 남주인공의 목을 칠 무렵,

“대군을 구하라!”

반대편에서 푸른 무복을 입고 있는 젊은 무사 수십 명이 검을 빼 들며 달려왔다.

남주인공 휘하의 무사들이 달려온 것이다.

챙강챙강.

수십 명의 무인들이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연기라곤 하지만 무술팀들이 실감나게 전투 장면을 연출했다.

‘이거야말로 병아리들의 춤 그 자체로군.’

액션씬을 지켜보던 천마가 하품을 했다.

무술팀의 연기와 합은 일품이었으나, 눈만 뜨면 칼부림을 한 천마에겐 작위적이고 어색하게 보일 뿐이었다.

위잉.

그런데 갑자기 무명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여러 가지 센서가 튀어나왔다.

무음모드로 실행했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천마 님. 촬영장은 그만 구경하시고, 유이나 님께 집중해 주세요.>

은밀히 음성을 전달한 무명의 속삭임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던 천마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음?’

머릿속에 뭔가 불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오랜 무림 생활을 하면서 얻게 된 예지능력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휘익.

그때 복면을 한 무술팀 중 한 명의 검이 남주인공의 목젖을 검으로 찔러갔다.

예정된 합이었기 때문에 남주인공은 자연스럽게 몸을 반신으로 젖혔다.

그런데 암살자의 검은 허공에서 빙글 돌더니 다시 목 뒤를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하압!”

하지만 남주인공은 그것도 모르고 다른 엑스트라와 예정된 합을 진행하고 있었다.

“거기 있었군!”

콰릉.

공기를 가르는 폭발음과 함께 하늘에서 검회색 구름이 세트장 안으로 떨어졌다.

절정의 신법을 펼친 천마였다.

챙강!

세트장에 난입한 천마가 손을 내밀자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남주인공을 찔러가던 검이 부러졌다.

“그랬나.”

자주빛으로 물든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혈광을 번뜩였다.

“괜찮은 방법을 썼군.”

복면 암살자의 의도를 파악한 천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24시간 유이나와 스태프들을 보호하는 천마와 무명, 그리고 제비.

그 촘촘한 시야로 인해 촬영장에 테러를 저지를 수 없자, 남주인공에게 부상을 입혀 촬영을 망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상관하지 마라.”

스르렁.

암살자는 등 뒤에서 새로운 검을 뽑은 후 번개처럼 천마의 목을 찔러갔다.

“꽤나 하는군.”

암살자의 휘두르는 검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공수의 전환이 번갯불처럼 빨랐다.

단숨에 팔을 뻗어 제압하려던 천마는 암살자의 검술을 보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좋구나!”

오랜만에 몬스터가 아닌, 제대로 된 무인의 검을 상대하자 천마는 기쁨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의 검법은 얼마나 예리한지 보겠다.”

퍼엉!

천마가 뇌인파멸의 초식을 사용하자 다섯 줄기의 무시무시한 경력이 암살자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창창창창!

놀랍게도 암살자는 권법에서 뻗어 나온 경력을 검으로 해소시켰다.

아무리 반 갑자의 공력으로 펼쳤다지만 천마의 번개 같은 일격을 검으로 막아내다니.

“제법이로구나. 그럼 이것도 받아봐라!”

천마가 일권을 뻗어내자 해일 같은 힘이 암살자에게 쏟아졌다.

암살자는 크게 놀란 듯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천마가 뻗어낸 권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피하지 못한다. 권마무도!”

천마의 양 주먹이 교차되더니, 수백 개의 손그림자가 암살자의 퇴로를 막았다.

“큿.”

도저히 피할 곳을 찾지 못한 암살자는 공격을 피하는 대신 뒤에 있던 선비의 목을 찔러갔다.

“영특한 놈이로고.”

천마는 껄껄 웃으며 권마무도의 초식을 중단했다.

그러자 삭삭 하는 소리와 함께 검기를 회수한 암살자가 다시 검법을 펼쳤다.

“저 두 사람, 각성자 같은데? 언제 섭외한 거야?”

천마와 암살자의 싸움을 보던 무술감독과 스태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급스런 우리옷을 입고 복면 암살자와 여유롭게 싸우는 천마.

그의 동작은 허공을 노니는 신선들처럼 우아하다가도, 먹잇감을 찾은 맹수의 동작처럼 맹렬했다.

“크으.”

몇 번의 시선과 초수가 교환되자, 암살자의 눈빛은 체념으로 변해갔다.

심지어 장난스럽게 뻗어내는 천마의 공격조차 막을 수 없게 되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퍼엉.

가벼운 일권을 맞고 뒤로 주르륵 물러난 암살자는 검을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흠.”

천마는 쓰러진 암살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전과 달리 불길한 기운도, 자색의 눈빛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컷!”

그때 그 장면을 바라보던 감독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정말 완벽해! 완벽한 액션씬이 나왔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모습을 구경하던 남주인공은 헐레벌떡 뒤로 물러나 무술 감독에게 달려왔다.

“뭐예요, 감독님. 사전에 약속했던 액션씬과 다르잖아요?”

당황한 무술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너였던 거야?”

어느새 달려온 유이나가 쓰러진 복면인을 향해 다가갔다.

“지금까지 네가… 날 괴롭혔던 거야?”

“…….”

유이나에게 정체를 들킨 복면인은 갑자기 몸을 날려 세트장 밖으로 사라졌다.

“어림없는.”

천마가 몸을 돌려 쫓아가려 하자, 유이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아요. 쫓지 마세요.”

“무슨 말이냐.”

“누군지… 아니까 괜찮아요.”

유이나의 눈동자엔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력을 끌어올렸던 천마는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복복 인테리어 내부.

둥그런 응접 테이블엔 천마와 장채원이 마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엔 무명이 올라와 있었고, 장채원의 목엔 제비가 올라타 있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온 무명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고 있는 중이었다.

“맙소사. 그랬구나.”

복면인의 정체와 유이나가 남긴 이야기를 들은 장채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이나의 연예계 생활을 지독히도 방해했던 사람이… 친동생이었다니.”

[지금이라도 연예계를 관둔다면, 어쩌면 사람들에게 금세 잊혀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눈 센서를 희미하게 번뜩이는 무명이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분께선 연예계 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정리해야, 유이나 님이 평범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암살자로 변장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유이나의 동생, 유승호였다.

그는 촬영장의 해프닝 이후, 유이나가 머무는 집에 찾아와 모든 걸 설명했다.

갈수록 인기와 명성을 얻어가는 유이나를 보며, 월령일족 장로들은 입을 모아 그녀가 평범한 삶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 예언했다고 한다.

-하루빨리 누나가 연예인을 관두도록 해야 해.

십오 년? 잘해야 이십 년이다. 늙지 않는 유이나의 모습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말이다.

차라리 하루빨리 연예계 생활을 포기한다면, 유이나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누나가 각성자까지 고용할 줄은 몰랐어.”

유승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이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족들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활동을 중단했던 누나가 말야.”

“아니, 그건…….”

“괜찮아. 그 정도 각오라면… 설령 일족들이 방해해도 잘 이겨나갈 수 있겠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유승호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관두면, 아마 다른 일족들이 찾아와 방해할지도 몰라. 그때도 지금처럼 싸울 각오로 대응해야 할 거야. 그래야 관둘 테니까.”

“승호야.”“누나는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올 순 없겠지?”두 주먹을 꽉 쥔 유승호의 눈에선 맑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누이의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바라왔을 뿐이다. 결국 슬픔과 절망으로 끝나는 엔딩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열심히 해. 멀리서 지켜볼게.”

눈물을 닦은 유승호는 미련 없이 유이나의 집을 나섰다.

[유이나 님은 이번 드라마를 끝으로 잠시 휴식기를 가진다고 하더군요.]

회상을 마친 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연예인이라는 삶을 되돌아보겠다고 하시면서요.]

“그렇구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장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맛이 씁쓸하다.

이제 막 성공을 앞둔 지점에서, 유이나는 연예계 생활을 포기할지 모른다.

인간들보다 수배는 오래 살 수 있는 요괴들에겐, 화려한 연예인의 삶이란 찰나의 행복일 수도 있다.

그 반짝임을 뒤로 하고 다시 기나긴 삶을 평범하게 살긴 어려울 테니까.

“평범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범한 인간들의 삶에 맞춰 살아가야 하다니.”

팔짱을 낀 천마의 탄식에 장채원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렇다. 조만간 또 하나 해결할 일이 생겼다.

바로 천마의 저 위험한 세계관과 그에 물들어가는 무명에 대한 교육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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