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반요가수 유이나 (3)
“응.”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나의 어사님>은 매니악한 드라마임에도 큰 인기를 끌어 시즌3가 확정이 되었다.
각종 매체에 막바지 촬영 중이라는 기사가 얼마 전까지 쏟아지고 있었는데, 중단이 되었다니.
“나의 어사님 시즌3 촬영이 중단되었다고?”
충격을 받은 천마가 중얼거릴 무렵, 유이나는 장채원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일로 언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찾아왔어요.”
“내가? 어떻게?”“언니에겐 특별한 정령수가 있잖아요. 요력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척척 해낸다는 정령수요.”
“아아.”
허탈한 미소를 머금은 장채원이 천마를 가리켰다.
“어쩌지? 정령수가 없어서 그 대신 천마를 직원으로 채용한 건데.”
“네? 정령수 대신에요? 왜요?”
“그게…….”
차마 ‘다른 세계에서 온 천마가 약 대신 먹으려다 부쉈다’라고 말할 수 없던 장채원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고로 부서졌거든. 기르는 데만 3년은 넘게 걸리니까, 그냥 일 잘하는 천마를 고용했어.”
“그랬군요.”
유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은 넓지만 정령수를 기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나 장채원의 정령수는 이동 거리가 한정되어 있는 평범한 정령수와 달리,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
“근데 정령수가 왜 필요해? 그 정도면 수사기관에 의뢰해야 하는 게 아냐?”
“아뇨. 전 단지… 드라마 촬영을 하는 동안 정령수에게 스탭이나 장비들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거든요.”
“무슨 소리야. 범인을 잡는 게 우선이잖아?”
“그건…….”
유이나가 고개를 떨구자 장채원의 머릿속엔 천마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주변 인물이라면 누구나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설마 일족들이 촬영을 방해하는 거야? 아직도?”
유이나는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망가진 장비 곳곳에 요력을 방출한 흔적이 있었으니까요.”
과거 유이나가 가출을 한 이유도 바로 월령일족들이 그녀의 연예계 데뷔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한 발 떨어진 채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월령일족.
그들은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연예계에 유이나가 발을 내딛는 걸 원치 않았다.
결국 그녀가 연예계 데뷔를 강행하자 한동안 그들은 극심한 방해를 시작했다.
데뷔 무대에 잠입해 음향기기를 망가뜨린다던가, 때론 학교폭력 같은 허위 루머를 퍼트려 그녀의 방송 출연을 취소시켰다.
하지만 유이나는 온갖 방해와 박해를 꿋꿋이 견디며 마침내 얼굴을 알리고 있는데, 또다시 방해를 시작하다니.
“이제는 제법 알려진 연예인이 되었잖아. 그런데 아직도 방해를 하는 거야?”
“제가 유명해질수록 불안함을 느끼겠죠. 저로 인해 월령일족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드러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장채원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로운 요괴일족이라고 해도 그 불안감에 테러와 협박을 일삼다니.
심지어 유이나는 요력이 없는 돌연변이로, 수명이 길다는 것 외엔 평범한 인간과도 다를 바가 없는 상태가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장채원이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정령수 따윈 필요 없어.”
“네?”
“내가 해결해 줄게.”
“어떻게요?”
“우선(牛仙) 님께 부탁드릴게. 다시는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없도록. 네 연예계 생활을 방해할 수 없도록.”
우선(牛仙).
대지유신들이 땅을 밟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근본과도 같은 신이다.
아무리 월령일족이라고 해도 우선 님의 지엄하신 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유이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하나 때문에 저희 일족이 곤란에 빠지는 건 원치 않아요.”
요괴 역시 인간 세계의 일에 관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로 인해 소수의 인간만이 드나드는 던전조차 출입이 금지된 상태.
만약 방송국에 잠입해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 우선 님의 귀에 들어간다면?
절대 구두경고 정도로는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거야?”
“어차피 제 연예계 생활은 그리 길지 않을 거예요.”
“뭐?”
유이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유리잔을 응시했다.
“저희 일족의 긴 수명을 생각해 본다면 찰나와 같은 시간이겠죠.”
고개를 든 그녀는 슬픈 미소를 머금었다.
점차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고 있는 유이나. 그로 인해 그녀는 머지않아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안 늙지 않는 신비로운 요괴의 진면목이 드러날 테니까.
“제가 다치는 건 상관하지 않아요. 하지만 혹시라도 저로 인해 스태프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정령수를 빌리러 왔던 거예요.”
“그랬구나. 미안해. 정령수를 조금이라도 키워 놨어야 하는 건데.”
장채원이 속상해하자 유이나가 웃으며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찾아와 도움을 받으려 한 것뿐인걸요.”
활짝 웃은 유이나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당분간 연예계 활동을 쉬면 돼요. 시간이 좀 지나면 또 괜찮아지기도 하더라고요.”
“또 쉰다고? 음반 준비한다고 많이 쉬었잖아.”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활동을 강행할 수도 없잖아요.”
그때 천마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유이나에게 말했다.
“인간들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가?”
“네?”
“근본적인 원인은 요괴라는 존재가, 인간들에게 알려지면 안 된다는 것 때문이 아닌가.”
묵묵히 듣고 있던 무명은 눈 센서를 반짝이며 생각했다.
[그렇군요. 이게 과연 월령일족의 잘못인지, 아니면 인간들의 잘못인지 모르겠군요.]
“무명. 너까지 천마에게 물드는 거야?”
[죄송합니다, 장채원 님.]
라고 말했지만, 무명의 머릿속엔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떠올랐다.
요괴라는 존재는 인간보다 우수하다.
태생적으로 요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수명도 길다.
어느 한 가지라도 인간보다 낫지 않은 점이 없건만, 그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불현듯 무명은 천마가 화재 현장을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건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이 세계의 인간들은 항상, 강자의 힘을 억눌러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고 있구나.
‘유이나 님은 요력조차 없다. 그저 인간들보다 수명이 긴 것뿐인데.’
-인간들은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반드시 재앙과 공포를 가져온다고 믿지.
잘생긴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의 천마가 옥탑방에서 회식 중에 한 말이다.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별일 아니군요.]
잠시 고민하던 무명이 앞으로 나섰다.
[제 계산이 맞다면, 이 일은 천마 님이라면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천마가?”
[그렇습니다. 장채원 님도 천마 님의 실력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렇군.”
무명의 말에 천마가 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본좌가 이 일을 처리해 주지.”
“안 돼.”
장채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나가 실력 있는 경호원을 못 구해 정령수를 찾은 줄 알아?”
“무슨 말이냐.”
“이나는 연예계에서 주목받는 라이징 스타야. 원한다면 회사에서 상위 랭커들이 몸담고 있는 길드 각성자를 경호원으로 고용해 줄걸?”
“그럼 고용하면 되잖나.”
천마의 말에 장채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정말 월령일족들의 하수인들과 부딪치면? 그러다 싸움이 벌어져서 주변의 스태프들이나 인간들이 휘말리면?”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이나를 가리켰다.
“이나는 월령일족에게도, 인간들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그냥 활동 중단을 하겠다고 한 것이고.”
[아뇨. 활동 중단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명은 천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천마 님을 경호원으로 고용하십시오. 천마 님 실력이라면 촬영장에 스며든 불순한 요괴를 조용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무명은 장채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 센서를 반짝였다.
[그리고 드라마 촬영 기간 동안 제비 씨를 유이나 님 곁에 머물게 해주세요. 천마 님의 공격을 거뜬히 피하는 제비 씨라면 돌발적인 위험으로부터 유이나 님을 지켜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제비?”
무명은 유이나의 안전까지 잊지 않고 염두에 둔 것이다.
착실한 계획을 짜고 있는 무명의 태도에 장채원이 제동을 걸었다.
“네 전략이 나쁜 건 아냐. 하지만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혹은 천마의 경호로 인해 그들이 더 나쁜 일을 벌인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제가 방비하겠습니다.]
장담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무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방법만이 유이나가 드라마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당연히 유이나 님의 드라마 촬영을 무사히 마치기 위한…….]
“그런 거 말고.”
장채원은 엄숙한 눈빛으로 무명을 내려다보았다.
“너답지 않은 무리한 계획이잖아. 이런 건.”
주 사용자이자, 그 누구보다 통찰력이 뛰어난 그녀는 무명의 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캐치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인간과, 인간 위주로만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을 원망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뭐?”
[천마 님께서 늘 말씀하시길, 이 세계는 다수의 약자들로 인해 강자들이 피해를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이나 님은 역시 그저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정체를 숨기고 일족들에게 협박을 당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
놀란 장채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명은 인간들을 사랑하고 요괴를 사랑하고 신 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천마에게 마음을 열고, 충심을 다해 보필한 탓이었을까? 점점 천마의 사상에 물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건 내 잘못이야.’
주먹을 쥔 장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마는 이 세계와 맞지 않는 위험하고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데다, 달변가이자 궤변가다.
도화지처럼 맑은 무명이 그 사상에 물들 수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다.
[장채원 님. 제 말뜻은…….]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억지로 미소 지은 장채원이 무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선 이나의 문제가 우선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난 정말 괜찮으니까.”
유이나가 손을 젓자 장채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게 하자.”
“네?”
“무명의 계산은 언제나 정확하잖아. 촬영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 없도록 잘 해결할 거야.”
장채원의 눈동자에는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한없이 깊은 장채원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유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언니.”
“고맙긴. 천마와 무명은 우리 복복 인테리어의 정직원이야. 일이 해결되면 너희 회사로 청구서 들어갈 거야.”
“물론이에요.”
장채원과 유이나의 맑은 목소리가 번갈아 흘러나오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한결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근데 제비는 뭐예요? 그분도 직원이에요?”
“아냐. 내가 기르는 애완동물인데, 몸을 자유자재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어. 몸도 빠르고 힘도 엄청 세고. 볼래?”
장채원이 내민 휴대폰 사진을 바라보는 유이나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그곳엔 눈꽃처럼 하얀 털을 가진 불가사리가 귀여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와아, 너무 귀여워요. 담비예요?”
“아니. 불가사리야.”
“불가사리? 신수 불가사리요?”
“응.”
신수. 말 그대로 신력을 지닌 영물.
인간이나 요괴 따윈 하찮게 보며, 상급신 정도쯤 되어야 길들일 수 있다.
심지어 불가사리는 신수 중에서도 정점에 올라있는 최강의 신수. 그런 무시무시한 짐승을 애완동물로 키우다니.
“우연히 다른 영지 매장으로 갔다가… 잘 따르길래 집에서 기르고 있어.”
“그, 그래요? 물진 않고요?”
휴대폰을 닫은 장채원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람은 안 물어.”
XX지구, 드라마 오픈세트장.
“보고 싶었소, 낭자.”
옥빛 두루마기를 걸친 꽃미남 선비가 다홍빛 치마와 붉은색 저고리를 입은 유이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에 오시면 안 되어요.”
유이나가 다급히 몸을 돌리자, 선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오지 않을 수 없었소.”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은 선비의 눈빛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째서 내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는 게요.”
-사각사각. 서걱서걱. 챱챱챱.
“컷, 컷!”
오디오에 낯선 목소리가 섞여 들어오자 감독이 소리쳤다.
“누가 촬영 중에 뭘 먹는 거야?”
주위를 둘러보던 감독의 눈빛에 스태프들의 시선은 모두 한곳에 쏠려 있었다.
그곳엔 하얀 담비와 같은 동물이 반짝이는 과자 같은 걸 열심히 먹고 있다.
“저건 또 뭐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망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인 유이나의 매니저가 얼른 제비를 안고 세트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이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언니…….’
신수 제비는 분명 사람을 물지 않았다.
또한 베테랑 경호원처럼 24시간 유이나 근처에 머물렀다.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쇳덩어리로 만든 과자를 처묵처묵 먹는다는 점이었다.
“자자, 다시 가자. 큐!”
감독의 소리에 또다시 유이나와 꽃미남 선비의 열연이 시작되었다.
“보고 싶었소. 낭자.”
“이곳에 오시면 안 돼요.”
-네놈, 수상하군. 그 손에 든 게 뭐냐?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어쨌다고요?
“컷, 컷!”
또다시 오디오에 낯선 목소리가 섞여 들어오자 감독이 소리쳤다.
“이번엔 또 어떤 놈이야?”
주위를 둘러보던 감독의 눈빛에 스태프들의 시선은 또다시 한곳에 쏠려 있었다.
그곳엔 하회탈을 쓴 거구의 사내가 구석에 대기하고 있는 엑스트라 한 명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