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반요가수 유이나 (2)
“어디 아픈가?”
“응? 아니, 왜?”
“점주의 눈동자가 아까부터 풀려 있었다. 초점도 맞지 않더군.”
“풀리긴 뭘 풀려. 회상 몰라? 회상?”
“회상?”
장채원은 노트북에 멈춰져 있는 유이나의 섬네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나 영상이 떴길래 잠깐 생각한 것뿐이라고.”
“그녀와 아는 사인가?”
천마처럼 팔짱을 낀 장채원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데뷔 전부터 한솥밥을 먹은 사이라고.”
“호오.”
천마는 놀랍다는 듯 탄성을 내었다.
“인맥이 상당하군. TV에 나오는 자들과도 친분이 있다니.”
“하하, 사실 뭐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우연찮게 인연이 된 거지.”
“우연찮게라니.”
“아아, 그게…….”
장채원은 천마에게 유이나를 만났던 당시의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었다.
“…아무래도 연예인이라는 건 대중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직업이잖아. 가뜩이나 폐쇄적인 삶을 사는 월령일족들이 연예계 생활을 허락할 리 없지.”
“그랬군.”
백 년 동안 늙지 않는 연예인이 등장하면 세계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장채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웬일이셔.”
“뭐가 말이냐.”
“남의 이야기엔 관심도 없잖아. 웬일로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천마는 코를 쓰윽 훔치며 말했다.
“본좌는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TV 시청에 매진하고 있다.”
“재미로 보는 거 아니었냐.”
“도락(道樂)적인 측면도 있긴 하지. 어쨌든…….”
헛기침을 한 천마가 화면에 뜬 유이나의 얼굴을 가리켰다.
“본좌가 TV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이 봤던 인물이 바로 그녀다.”
“어떻게?”
데뷔 초에는 폭삭 망했지만, 꾸준히 노력한 유이나.
점차 얼굴이 알려지게 되었고 가수이자 배우로서 만능 엔터테이너의 행보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구성진 민요 음악을 하는 데다, 매니악한 드라마에만 얼굴을 비춘 탓에 아직 사람들에겐 크게 알려진 스타는 아니었다.
“설마, 이나가 나온 드라마를 본 거야?”
“그렇다. 처음에 <오리지널>이라는 곳에선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으로 나오더군. 본좌와 같은 매서운 직감을 가진 것 같아 동질감을 느꼈지.”
“와, 그거 본 거야? 그거 드라마 첫 데뷔작인데. 용케 봤네.”
“이후, <나의 어사님>이라는 프로에서 가난하고 기구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더군.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길을 걷는 모습에 상당한 감동을 받았다.”
“이나 팬이었냐?”
“무슨 말이냐.”
“엄청 좋아하고 있잖아. 이나를.”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군.”
천마는 장채원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본좌는 이후 그저 그녀가 나온 드라마와 노래를 모두 찾아본 것뿐이다. 처음엔 장미축제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천마는 다시 유이나가 나왔던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노래까지 줄줄 읊기 시작했다.
심지어 극성팬들이나 알 만한 기사와 내용까지 끊임없이 주절주절거렸다.
“이거 완전히 오덕후잖아?”
“오덕후?”
단어를 들은 천마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단어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매우 부정적이라는 어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본좌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긴 개뿔.”
장채원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 천마는 이미 유이나의 광팬이 된 것 같다.
“너처럼 연예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향후 활동 계획까지 외우고 있는 사람을, 여기에선 울트라 진성 오덕후라고 해.”
울트라 진성 오덕후.
그 말을 들은 천마의 눈빛이 서서히 흐려졌다.
뜻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뭔가 거친 호흡 소리를 내뿜는 몬스터가 연상되었다.
잔뜩 먹구름이 낀 듯 우울한 표정을 지은 천마가 다시 책을 붙잡았다.
“앞으로는 TV 시청을 줄여야겠군. 점주도 너무 TV 같은 것에 빠지지 마라.”
“시끄러.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천마와 장채원이 한창 투닥거릴 무렵,
딸랑.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매장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 어?”
자리에서 일어난 장채원의 몸이 마네킹처럼 굳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림자는, 다름 아닌 노트북 섬네일에서 방긋 미소 짓고 있는 유이나, 본인이었다.
“채원 언니!”
하얀 원피스를 입고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를 공주님처럼 땋은 유이나.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장채원에게 달려왔다.
“이나야?”
“언니!”
장채원에게 안긴 유이나를 바라보던 천마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유이……!”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게 무슨 경망스러운 행동이란 말이냐.’
마도의 하늘이라 불리는 천마대종사가, 생판 모르는 낯선 여인네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 했다니?
그것은 천마 스스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게 그런 거였나.’
천마는 불현듯 무림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천마 님! 천마 님! 천마 님!
때때로 천마는 만마집궁에서 나와 마도의 문파를 시찰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광적으로 지지하는 극성세력이나 마도고수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열정적으로 외쳤다.
-대체 저들은 본좌만 보면 왜 저렇게 흥분하는 거냐.
천마의 물음에 옆에 있던 마기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마 님은 항상 마고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지 않습니까? 늘 무림맹에서 배포한 수배 전단으로만 뵈던 천마 님의 용안을 직접 보게 되니, 환호할 수밖에요.
회상을 마친 천마가 침음을 내며 머리를 젓는 순간,
[유이나 님이 오셨다고요?]
창고 방에 누워 있던 무명이 떼굴떼굴 굴러와 소리쳤다.
[유이나 님!]
“나노봇, 오랜만이야!”
유이나는 굴러온 나노봇을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유이나 님.]
“으응. 많이 보고 싶었어, 나노봇.”
나노봇의 눈 센서를 바라보며 활짝 웃던 유이나는 문득 그 뒤로 시꺼먼 그림자를 발견했다.
“누구…….”
터질 듯한 근육에 시뻘건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는 거구의 사내, 천마를 가리키는 순간,
“그냥 오덕후.”
“네?”
“농담이야.”
장채원은 엷게 웃으며 천마를 가리켰다.
“얼마 전에 우리 매장 직원으로 들어온…….”
그녀의 말을 자른 천마가 두 팔로 원을 크게 그리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본좌는 천마다.”
“네에…….”
“그런데 어쩐 일이야? 요새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쁘지 않아?”
“아, 촬영이 연기되었거든요.”
“연기? 왜?”
장채원이 눈을 깜빡이자, 유이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우리 같이 저녁 먹어요.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그럴까?”
장채원은 걸어두었던 겉옷을 집어 들고 말했다.
“그럼 나 먼저 퇴근할 테니까, 천마 넌 있다 알아서 퇴근해.”
“알겠다.”
“나노봇은요? 같이 안 가요?”
유이나가 아쉽다는 듯 묻자 무명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의 주 임무는 공동 사용자인 천마 님의 업무와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수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잠깐 저녁만 같이해도 안 되는 거야?”
그녀가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묻자 무명이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 님. 혹시…….]
“괜찮다. 다녀오도록.”
[감사합니다.]
천마가 덤덤히 고개를 돌리며 다시 책을 폈다.
돌아서는 장채원의 어깨에 올라탄 무명은 고개를 돌려 천마를 바라보았다.
끼릭. 끼릭.
눈 센서를 크게 확장시킨 무명은 붉게 물든 천마의 눈동자를 크게 확대시켜 보았다.
-서운하다. 제법 서운하다. 크게 서운하다. 많이 서운하다. 으어어엄청 서운타.
센서를 확대할수록 눈동자에서 보여지는 감정들도 커졌다.
평소 천마의 눈동자에선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색채이기도 하다. 그제서야 무명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의 어사님>을 본 이후 천마는 유이나의 열정적인 팬이 되었다는 걸.
[이나 님.]
“응?”
[혹시 천마 님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이 기특하고도 똘똘한 기계 생명체는 사용자, 천마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천마 님은 이나 님의 방송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시청하는 팬입니다.]
“무명. 이나가 불편해할 거야.”
천마는 평범한 성격이 아니다.
장채원은 모처럼 만난 유이나에게 불편을 주고 싶진 않았다.
“모처럼 이나를 만난 자리에 천마가 있는 게 말이 돼?”
장채원의 핀잔에 무명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유이나가 물었다.
“무명? 네 이름이 이제 무명이 된 거야?”
[그렇습니다.]
무명은 천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천마 님은 저에게 무명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복복 인테리어의 첫 번째 인족 정직원이시기도 하고요.]
“인족?”
그제서야 유이나는 눈을 깜빡였다.
정령수랑 일하는 곳이 원칙이며 설령 직원을 뽑더라도 요괴를 뽑겠다던 장채원.
인족 따윈 잡부로도 쓰지 않겠다던 그녀가 정직원으로 뽑고, 아끼는 무명을 사용자로 등록까지 해주다니?
“이나야, 신경 쓰지 마. 무명 녀석이 오지랖이 넓잖아.”
장채원이 손을 휘휘 젓는데, 유이나가 무명을 향해 물었다.
“저분, 믿음직한 사람이야?”
[믿음직한 사람…….]
눈 센서의 빛을 최대한 밝힌 무명이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장채원 님도, 그리고 저도 가장 신뢰하는 분입니다.]
* * *
시내의 어느 일식집, 룸 내부.
정갈한 해산물 요리가 좌식 테이블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장채원과 유이나는 연신 꺄르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무명도 이따금씩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테이블 끝자리에 앉은 천마는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TV에서 나오던 비련의 여주인공이 지금 바로 눈앞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손을 뻗으면 사라질 것만 같고, 소리 내어 말하면 꿈에서 깨어날 것 같다.
‘냉혼부동공(冷魂不動功).’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음을 냉정하게 만드는 살수심공까지 끌어올린 천마.
그럼에도 그는 더 없이 진지하고 엄숙한 자세로 유이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천마야.”
옆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장채원이 천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만 좀 쳐다봐. 이나 얼굴 뚫어지겠어.”
“뭔가 다르군.”
“뭐가?”
천마는 장채원과 유이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TV에서 볼 때와 다르다.”
“무슨 소리야.”
“어딘가 모르게 더 생기가 넘치고… 표정도 다채로운 것 같다.”
‘아아. 이 오덕후 녀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누른 장채원이 천마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럴 땐 그냥 실물이 훨씬 낫다고 하는 거야.”
“실물이 낫군.”
뻔뻔하게 장채원의 말을 되뇌인 천마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마가 어두운 기운이 맺혀 있고 눈빛이 흔들린다. 뭔가 큰 고민이 있거나 곤궁에 빠진 듯한데.”
“시끄러. 누가 너 보고 관상 봐 달래?”
“감사합니다.”
그때, 쑥덕이던 이야기를 듣던 유이나가 천마를 향해 생긋 웃었다.
“예쁘게 봐주셔서요.”
“이 녀석, 네가 나온 프로를 다 찾아보고 있어. 진성 오덕후라니까, 오덕후.”
장채원이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휘젓는데, 유이나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정확하세요.”
“응? 뭐가?”
장채원이 눈을 껌뻑이자 유이나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 정말 고민 있거든요.”
유리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들이켠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이었는데.”
“변사또 놈 때문인가.”
“네?”
천마가 팔짱을 낀 채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간악한 놈 때문에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다는 걸 알고 있다. 원한다면 본좌가 은밀히 처리해 주지.”
[천마 님. 항상 말씀드리지만, 그건 드라마에서…….]
“허구의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다.”
무명의 말을 자른 천마가 솥뚜껑 같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하지만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패악질을 저지른 능글맞은 놈이다. 실제 모습도 그와 별 다를 바가 없겠지. 본좌는 사갈(蛇蝎) 같은 그놈의 행태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분노에 찬 눈빛을 한 천마가 손을 뻗었다.
“자, 변사또 그 간악한 놈은 어디에 있나.”
웃기지도 않는 한편의 촌극이다.
잠시 룸 내부엔 싸늘한 공기가 휘몰아쳤다.
컵에 담긴 냉수를 한 모금 마신 장채원이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이나야. 나쁜 녀석은 아닌데, 언제나 나사가 몇 바퀴 돌아간 상태라서 말야.”
“본좌에게 나사가 어딨나.”
“이 썰렁한 분위기 안 보여? 그런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는 게 나사가 돌아간 증거라고.”
“전 괜찮아요. 언니.”
두 사람이 투닥거리자 유이나가 손을 저으며 웃었다.
“두 분, 정말 친하신가 봐요. 언니가 그렇게 남을 구박하는 거 첨 봐요.”
“구박은 무슨. 지금이야 말로만 헛소리를 하지, 처음에 봤을 땐 그 헛소리를 진짜로 실행시키는 녀석이었다고.”
이나가 쿡쿡 웃자 장채원이 진지하게 말했다.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그 당시에 내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그래도… 즐거워 보이는걸요.”
유이나가 부러운 듯 눈을 반짝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 비친 그녀의 눈동자엔 왠지 모를 그늘이 맺혀 있었다. 처음 골목길에서 만난 그때처럼.
[그런데 이나 님. 대체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요?]
무명이 심각한 목소리로 묻자 입가에 떠올랐던 유이나의 미소가 사라졌다.
“사실 요즘 내 주변에 자꾸 위험한 일이 생겨서.”
[위험한 일이라뇨?]
“내가 있는 곳마다 장비가 망가지거나, 조명이 터지거나… 촬영장에 계속 이상한 일이 생겨.”
[이나 님이 계신 곳만 그렇다고요?]
“으응.”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천마가 또다시 나섰다.
“시기 질투하는 주변의 인물들이겠군. 변사또만 해도 당장 소녀를 죽도록 괄시하지 않는가?”
“이게 드라마냐?”
“그녀의 주변 인물이라면 누구나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뭔가 그럴듯한 추리다.
하지만 천마의 추리 전적을 익히 알고 있는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헛발질 하는 거 아냐? 그러다 터주신님을 범인으로 몰았잖아.”
“이번엔 결과가 말해주고 있잖나. 그녀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피해가 일어났다고 했다.”
천마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즉, 범인은 곁에 계속 머물거나 그 동선을 파악할 수 있는 자다. 그리고 악의를 가지고 음해하는 것이지.”
듣고 있던 무명이 눈 센서를 반짝였다.
[일리 있는 추리입니다. 천마 님.]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무명이 유이나에게 물었다.
[그 일 때문에 나의 어사님 시즌3 촬영이 중단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