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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수리하는 천마-145화 (145/285)

110화.

리안나가 황당한 표정으로 리즈벳을 바라보고 있는데, 훌쩍이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줌마 눈이 너무 무서웠어요.”

“얘, 내가 언제……!”

리즈벳이 당황한 얼굴로 가자미눈을 떴고, 그 모습은 그대로 리안나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랬구나. 안 봐도 뻔하지.”

리안나가 재빨리 아이를 품에 안아들고 리즈벳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 난 황비가 아이들을 좋아해서 메이슨 고아원에 봉사를 다녀온 줄 알았는데.”

“황후 폐하, 저 애의 말만 믿고 그렇게 속단하시면 안 되지요!”

“아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리안나가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로 리즈벳에게 일갈했다.

“다음부터는 함께하지 않아도 됩니다. 억지로 올 필요 없어요. 마음 없이 하는 봉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활동이니까요.”

“황후 폐하!”

리안나의 말에 리즈벳은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저 애조차 일부러 제 쪽으로 달려오게 해 넘어지게 만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니, 지금 리안나의 행동을 보면 고의적으로 아이에게 지시한 게 분명했다. 간교한 여자 같으니! 리즈벳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사이, 리안나와 리즈벳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귀부인들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이세요?”

“아뇨, 별일 아닙니다.”

리안나는 리즈벳을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지금 아이들에게 줄 간식을 만들러 가는데 함께 가시겠어요?”

리안나와 리즈벳의 눈치를 보던 귀부인 한 명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간식이라, 그거 좋네요. 마침 황궁에서 가져온 재료들도 있고요.”

하지만 누군가는 아이들과 놀아줘야 했다. 짧게 고민하던 리안나는 곧 묘책을 냈다.

“아이들도 함께 간식을 만들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손도 늘고 아이들에게도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을 텐데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과연 통제가 될지…….”

“주방은 위험한 곳이잖아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죠?”

“불 가까이에는 가지 못하게 하고 반죽 정도만 함께한다면 괜찮을 거예요.”

리안나의 설명에 모두가 수긍했고, 리안나는 안고 있던 아이에게도 물었다.

“어때, 혹시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하니?”

“네. 가끔씩 원장 선생님을 도와드려요!”

“그럼 같이 해 보자. 자, 다들 가시죠.”

리안나가 사람들을 전부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고, 리즈벳은 그 행렬에 끼지 못했다. 리안나가 따라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것도 아니었지만, 자존심상 곧바로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발을 움직이지 않는 리즈벳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결국 리즈벳은 완전히 혼자 남겨졌고,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여기 같이 오는 게 아니었어. 나 혼자 계속 다니면 소문이라도 조작할 수 있는데.’

리안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귀부인들의 눈에 들게 행동하며 그들의 마음을 바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영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리즈벳이 단단히 마음을 벼렸다.

‘두고 봐, 내가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줄 알고?’

아직 기회는 많았다. 리즈벳이 주먹을 꽉 쥐며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리즈벳이 주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들 요리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리즈벳은 어색하지 않게 무리에 섞여들어 장갑을 끼고 요리할 준비를 마쳤다. 우연히 그런 리즈벳의 모습이 리안나의 눈에 띄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언제 온 건가요?”

“아까 전에 왔답니다, 황후 폐하.”

리즈벳이 공손한 미소로 대답했다.

“저도 요리를 도와드리고 싶어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리안나는 건조하게 대답한 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리즈벳은 귀부인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리즈벳이 다시 한번 조용히 이를 갈았다. 역시,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안 좋게 흘려놓은 게 틀림없었다. 

리즈벳은 행동으로 증명하겠다고 다짐하며 재료를 손질하는 귀부인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리즈벳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자신들끼리 나누던 대화도 그녀가 등장함으로써 뚝 끊어버렸다. 리즈벳은 다시 한번 기분이 나빠졌지만 역시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때였다.

“프록터 부인, 감자는 아직인가요? 물이 끓고 있는데.”

감자 수프를 만들려던 리안나가 물어왔고, 리즈벳의 곁에 있던 프록터 부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황후 폐하. 글쎄, 감자에 싹이 나버렸지 뭐예요. 그걸 일일이 잘라내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답니다.”

“어머, 그랬군요.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거의 다 했답니다.”

실제로 프록터 부인은 감자에 싹이 난 부분을 거의 다 도려낸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감자를 조각내기는 전이어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즈벳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도와드릴까요, 프록터 부인?”

“네? 아뇨, 괜찮습…….”

“아직 감자를 조각내시기 전이잖아요. 둘이 하면 일이 빠를 거예요.”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황비 전하.”

이윽고 두 사람이 빠르게 감자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입이 많다 보니 감자의 양이 상당했지만, 리즈벳이 도와준 덕분에 일은 빨리 끝났다. 프록터 부인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리즈벳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황비 전하. 덕분에 빨리 끝날 수 있었습니다.”

“아녜요, 뭘요. 그보다 싹 낸 부분을 도려내지 않았더라면 일이 더 금방 끝났을 텐데요.”

“어머, 그랬다간 큰일 난답니다. 감자 싹에는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크게 아플 수 있어요.”

“……독성이요?”

“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제거해야 한답니다.”

“그렇군요…….”

평소에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프록터 부인은 별걸 다 알고 있었다. 프록터 부인의 말을 들은 리즈벳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리즈벳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나타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날지도 모른다.

“프록터 부인, 실례지만 이 양파를 좀 까주시겠어요?”

“아, 네. 황비 전하, 같이하시겠어요?”

그때 누군가 부탁해온 일에, 리즈벳은 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

리즈벳이 리안나와 다시 대면한 건, 그로부터 1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리안나가 리즈벳을 불렀다.

“황비, 지금 하는 일이 없다면 이 수프 그릇을 식탁으로 옮겨 주겠어요?”

리안나의 옆에 걸쭉한 감자 수프로 채워진 그릇들이 늘어져 있었고, 리즈벳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황후 폐하. 어렵지 않은 일인걸요.”

“그래요. 도와줘서 고맙…….”

“황후 폐하!”

그때, 메이슨 고아원의 원장이 다급하게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꽤 급해 보이는 몸짓에 리안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그게……!”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원장은 헐떡거리는 숨을 애써 진정한 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알렉산더의 방문 소식에, 리안나는 물론이고 리즈벳과 다른 귀부인까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부인 중 한 명이 리안나에게 곧바로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신다고 미리 귀띔해주셨나요?”

“아뇨.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정말로, 그는 언질조차 주지 않고 온 것이었다. 리안나는 일단 그를 맞이하기 위해 에이프런을 벗고 밖으로 나갔다. 고아원 앞에 황제의 문장을 단 마차가 서 있었고, 그는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리던 참이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리안나와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미소 지었다. 

환한 미소는 아니었다. 형식적이라 평해도 어색하지 않을 엷은 미소.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리안나의 심장은 이유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면서, 심장 박동은 더욱 빨라졌다. 옆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소리에 섞여, 다행히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를 터였다. 리안나는 자신이 어지간히 놀란 게 틀림없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에스테라즈의 주인,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어느새 제 앞까지 다가온 그에게, 리안나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여기 오실 줄은…….”

“많이 놀란 표정인데.”

“언질도 없으셨잖습니까.”

“말하고 오면 재미없으니까.”

그 말과 함께 알렉산더는 리안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혹시 뭐가 묻었느냐고 물어보려던 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쩌면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짓궂으신 면이 있으시군요.”

“어쨌든, 내가 잘못 온 건가?”

알렉산더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나름 그대 기를 살려주려고 온 거야.”

“절 위해서 오셨다고요? 어째서…….”

“그야…….”

알렉산더가 느릿하게 입을 열더니 돌연 리안나의 손을 잡아왔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리안나는 순간 돌처럼 굳었다. 정작 알렉산더는 그와 대조적으로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지.”

“…….”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게 황후의 가장 큰 권력 아닌가?”

“폐하!”

그때, 리즈벳이 뒤늦게 나타났다. 그녀는 리안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귀부인들을 지나쳐 서둘러 알렉산더의 앞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면서, 얼굴은 상기된 채로 알렉산더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후께서 오시는 첫 봉사활동이니.”

알렉산더는 리즈벳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대신, 리안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

“……마침 잘 오셨습니다. 요리가 거의 끝난 참이거든요.”

그 모습을 보고 리즈벳은 드레스 자락 뒤로 손톱을 세운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으시다면 폐하께서도 함께 드시지요.”

“황비, 폐하께서는…….”

“그것도 괜찮군. 마침 아직 식전이라.”

“폐하.”

독살을 걱정해 같은 음식을 다시 먹는 것도 피하는 사람이 이런 데서 식사라니. 

리안나가 무리할 필요 없다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알렉산더는 태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표시에 리안나도 더 만류할 명분이 없어졌다.

“그럼 저쪽으로 함께 가실까요?”

리즈벳이 잘됐다는 얼굴로 먼저 알렉산더에게 팔짱을 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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