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42화 (142/285)

제142화. 나르시스 던전 (2)

[천마 님. 싸우시면 안 됩니다.]

양팔을 든 무명이 펄쩍 뛰며 만류했다.

[어찌 되었건 저흴 도와준 은인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서야 되겠습니까.]

“본좌가 충분히 아량을 베풀지 않았나.”

그때 청년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힘이군.”

뇌인파멸을 막아낸 청년의 손바닥은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었다.

손을 탁탁 턴 청년은 천마를 바라보며 덤덤히 말했다.

“보아하니, 꽤나 높은 등급의 영지에서 일하는 친구 같은데.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

사사건건 반말을 내뱉는 청년을 보자 천마는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파란 놈이 본좌에게 반말을 하는군.”

“이 몸은 흑혈(黑血)일족이다.”

흑혈일족.

수명이 상당히 길 뿐만 아니라, S급 중력조작 스킬인 ‘중력자(重力子)’와 비슷한 힘을 사용하는 호전적인 요괴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올해로 100살이 넘었지.”

“어리군.”

“뭐라고?”

청년이 눈을 부릅뜨자 천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본좌는 천마다.”

청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마의 눈동자에선 자신감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무림제일의 배분을 갖고 있는 자의 우월감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건가.’

천마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청년이 씁쓸하게 말했다.

“오늘은 양보해 줬으면 좋겠군.”

“양보?”

“어려운 일도 아니잖나.”

청년의 눈동자엔 근심과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무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못을 보면 좋은 기억만 본다고 하던데… 전해오는 소문이 거짓이었나요?]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제대로 잘 보인다.”

[그런가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리 좋지 않으신지요.]

청년이 침묵하자 무명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걸 물었군요.]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무명은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사실 제가 버티고 서 있던 것도, 소문의 진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쪽 분의 눈빛이 너무 우울해서,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지 걱정되어서 그랬습니다.]

참으로 수다스럽고도 친근한 말투를 사용하는 기계다.

무명의 오지랖에 줄곧 무표정했던 청년의 입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인간 쪽은 기계 같고, 기계 쪽이 오히려 인간답군.”

[하하하. 그렇습니까?]

무명이 너스레를 떨자 청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걱정 마라. 나는 자살 따위를 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럼 제가 연못을 한번 들여다봐도 되겠습니까?]

“그럴 순 없다.”

[정말 잠깐만 보겠습니다. 딱 10초, 아니 5초만 들여다보는 것도 안 될까요?]

청년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연못은 한 사람의 추억을 하루에 한 번만 꺼내준다. 만약 누군가 이 연못을 들여다보면, 나는 하루 동안은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거지.”

무명은 눈 센서를 깜박였다.

이 나르시스 궁전의 연못에 그런 법칙이 있었단 말인가?

“오늘은 내가 사랑했던 연인의 기일이다. 나는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녀의 기일에 이 연못을 찾아 하루 종일 그녀를 기리지. 하지만 중간에 다른 이가 연못을 사용한다면 나는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한다.”

[3, 30년이요?]

무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알고 보니 이 흑혈일족의 요괴는 오랜 기간, 나르시스 궁전을 찾아 연인을 기리는 의식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러셨군요.]

그런 사정이 있다는데 연못을 본다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명이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천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뭐라고?”

“그렇게 매년 연못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죽은 자가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잖나. 백 살이나 살았다면서 그러한 이치도 깨닫지 못했나.”

냉소 어린 천마의 말에 청년의 눈동자에서 불티가 튀어 오르는 듯했다.

[천, 천마 님.]

무명 역시 크게 놀라 천마를 제지했다.

[먼저 떠나간 자의 넋을 기리는 건 유구한 전통과도 같은 일이 아닙니까?]

“넋을 기리는 것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저자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천마는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그마치 30년 동안 매해 찾아와 기억을 더듬는다고 했지. 그건 떠나간 자를 기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떠나간 자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뿐이지.”

무명은 회로가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천마가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가졌으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연히든 어쨌든 호의를 베풀어준 요괴에게 작정을 걸고 시비를 걸다니?

“망령에 사로잡혔다고?”

청년이 몸을 부르르 떨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혀진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니까.”

“평생 가도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다!”

“물론.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도 있지.”

천마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굳이 이 연못을 찾는 건, 자연스레 잊혀졌던 기억을 다시 되살리려 하는 것이잖나.”

기묘한 말이다.

순간 청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그가 매년 그녀의 기일에 연못을 찾는 것은, 그리고 하루 종일 연못을 들여다보는 것은, 천마의 말대로 잊었던 연인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녀의 얼굴과 추억이 잊혀져 갔으니까.

“어떻게 알았지.”

청년의 말에 천마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좋은 기억이라 해도, 30년간 되새김질할 필요는 없잖나.”

“…….”

잠시 침묵하던 청년은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바닥에 고정된 청년의 눈동자는 낮고 우울해졌다.

[괜찮으시다면 사정을 들을 수 있을까요?]

또다시 무명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일전 달고나 사건 이후, 무명은 천마에게 한가지 배운 사실이 있었다. 바로 인간의 마음속 깊이 박힌 응어리는 말로 풀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 연인은 인간이었지.”

고개를 떨군 청년이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이며, 다음 생애에도 다시 그녀를 만나겠다고 맹세했지.”

낮게 중얼거리는 청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와의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더군.”

심호흡을 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갈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고 언제부턴가는 그녀의 얼굴도 깜빡 잊게 되더군. 어쩌면 요괴라는 이유로 주어진 긴 삶 때문에 더 이상 그녀를 기억할 수 없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년 연못에 왔나.”

천마의 물음에 청년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에 오면 그녀와 같이했던 모든 추억이 떠오르니까.”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천마는 차가운 콧바람을 밀어냈다.

“망각이라는 건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그걸 거부하니 고통에 빠진 것이지.”

“선물? 좋은 기억마저 잃어버리는 것이 선물이라고?”

청년은 천마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증오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영지에서 일하는 인족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다른 이들의 삶이 하찮아 보이겠지. 아주 그냥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하게만 보일 테지?”

청년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너 같이 행복에 절어 있는 인간이 뭘 안다고 감히 내게 훈수를 두는 거냐!”

“으하하하!”

천마는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근래 들어 가장 재밌는 헛소리였다.”

뚝. 웃음을 그친 천마가 무명을 바라보았다.

“이 연못을 바라보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볼 수 있다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연못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냐는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무명이 눈 센서를 반짝이며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소문에 의하면 가능합니다. 옆에서 연못을 같이 바라보면, 먼저 연못을 바라본 사람의 추억을 같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붉게 물든 눈동자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연못을 들여다볼 용기가 있느냐?”

“뭐?”

“보거라. 본좌의 기억을.”

천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연못으로 다가갔다.

“안 돼. 오늘은 내가 봐야 한다고!”

청년은 다급히 팔을 벌려 전력을 다해 힘을 쏟아냈다.

중력을 구부려 천마의 몸을 수백 배 무겁게 만들려 하는 순간,

파앙!

천마의 몸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오며 그 힘을 튕겨내었다. 천마대능력이었다.

“이럴 수가.”

지금까지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예상치 못한 천마의 막강한 힘에, 청년이 당혹성을 내뱉을 찰나,

사아악.

천마가 연못을 바라보자 투명한 유리처럼 매끈했던 연못의 수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찰랑찰랑.

물결은 점차 거세지더니 갑자기 투명한 스크린처럼 변해, 여러 가지 장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모두 천마의 과거 기억이었다.

“이, 이건…….”

수면 위에 펼쳐진 장면들을 바라보던 청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마 님.]

키리리리릭.

청년의 옆에 선 채 연못을 바라보는 무명의 머리에선 연달아 기계음이 들려왔고, 눈 센서의 빛은 점멸을 반복했다.

[어째서, 어째서…….]

무명은 더 이상 수면 위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기억?

어찌 저런 것을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못 위에 떠오른 기억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피폐한 삶이었다.

이름도 없이 버려졌다.

구걸을 하다 거지 패거리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배가 고프면 더러운 수로에 떠 있는 오물을 주워 먹거나 벌레를 씹어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런 식사는 고양이에 뜯어먹힌 들쥐를 주워 먹는 날이었다.

이러한 기억들이… 천마의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들이었다.

촤아아악.

수면 위의 화면이 바뀌어 마침내, 고금제일인의 보좌에 오른 천마의 모습이 비치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절세무학의 대종사의 삶은 아름다웠을까?

역시나, 아니었다.

외로움. 그 속에 접혀 있는 또 다른 외로움, 또 고독…….

천하만물의 정점에 도달한 천마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번뇌와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으으.”

청년은 더 이상 연못을 바라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것이 좋았던 기억이라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지독한 고통이다.

숨 한번 편히 쉬지 못할 만큼 치열했으며 홀로 망망대해에 떨어진 것만큼 고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어졌기에, 한편으론 처절할 만큼 아름다웠다.

“미안하다.”

연못에 떠오른 기억을 바라보던 청년이 천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사과하도록 하지.”

그제서야 청년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심호흡을 한 청년은 연못을 힐긋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이젠 자신의 기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다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우니 먼저 돌아가겠다.”

그리고 출구가 있는 숲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나르시스 궁전의 연못에는 잠시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 흘렀다.

-망각은 자연이 내린 선물이다.

무명은 비로소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남들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삶을 즐거움으로 기억하는 천마다.

그렇다면, 천마가 담고 있는 괴롭고 힘든 기억들은, 망각이란 선물이 애써 지워주었을 테니까.

[망각은 정말 신이 주신 선물이군요.]

무명은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감내할 수 있는 인내심은 저마다 다르다.

칼에 찔려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바늘에 찔려도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본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신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경중을 따질 수 없다.

하지만 무명은 천마의 기억을 보자, 대다수의 인간이 얼마나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망각이 없다면,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덤덤히 서 있던 천마가 연못에서 시선을 돌렸다.

“인간은 많은 걸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걸 잊고 살아가지.”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다양한 일이 떠오르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열흘 전 저녁에 뭘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은 추억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천마의 말을 곱씹던 무명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천마 님은 타인에게 받은 은혜는 잊지 않으시는군요.]

청년이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떠나서야 무명은 깨달을 수 있었다.

타인에게 눈곱만큼도 관심 없던 천마가 굳이 청년의 삶에 끼어들었던 이유.

그것은 위기의 순간 유사를 멈추어 주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본좌에게 호의를 베풀 기회는 매우 드물지.”

천마는 그답지 않게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천하를 오시하는 무학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룩할 수 있는 모든 명예와 부를 축적한 천마.

누군가 그를 도와줄 수 있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천마 님을 우연히라도 도울 수 있다는 건,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을 것 같습니다.]

무명의 말에 출구 쪽으로 몸을 돌린 천마가 엄숙하게 말했다.

“물 한 모금의 호의도 우물을 파서 보답하는 것이 본좌니라.”

[아주 바람직한 가치관인 것 같습니다.]

어깨에 올라탄 무명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수다를 늘어놓았다.

어느새 천마의 그림자 역시 출구가 있는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데 그때.

찰랑. 사라라라락.

돌아가는 천마의 등 뒤로 연못에 또 다른 물결이 생겨났다.

그곳에는 무명과 함께 시장통에서 떡볶이를 먹는 천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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