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41화 (141/285)

제141화. 나르시스 던전 (1)

세이프던전, 동쪽 7.5킬로 지점 A급 던전. ‘모래섬.’

광활한 사막이 펼쳐진 던전 중심부. 달궈진 모래사장에 우뚝 서 있는 천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그의 발 아래엔 까맣게 물든 거대한 형체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단검 같은 돌기가 무수히 돋아난 형태의 곤충형 몬스터다. 무리를 짓고 돌아다니며, 모든 개체가 사라져야 소멸되는 군집형 몬스터, ‘모래 쿵쿵이’였다.

[이번 일은 정말 무리였습니다. 천마 님.]

호흡을 조절하는 천마를 보며 무명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었다.

[어제부터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런데 굳이 달려드는 몬스터를 일일이 상대하시다니요.]

천마가 말이 없자 무명이 소리 높여 말했다.

[만약 운 좋게 유사(流沙)가 잠시 멈추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쓰러진 건 모래 쿵쿵이가 아니라 천마 님이었을 겁니다.]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린 무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래섬 던전의 중심부 바닥모래는 강한 흡입력이 있는 유사로 되어 있었다.

모래 안쪽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거나 아예 허공에 떠 있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천마는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우뚝 선 채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모래 쿵쿵이를 처리하고 유사를 빠져나오려는 것이다.

“큿.”

하지만 유사의 흡입력이 천마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숨을 한번 들이쉴 찰나, 턱 아래까지 유사가 차오른 것이다.

[천마 님!]

어깨에 있던 무명이 놀라 허둥댈 찰나,

-카앗!

모여 있던 모래 쿵쿵이들이 총공세를 펼쳤다.

이 상태라면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속수무책,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웅.

그런데 그때, 기묘한 파동이 울려 퍼지더니 갑자기 유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파앙!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천마가 유사를 뚫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권마칠식, 천수공파!”

극한의 천마대능력을 발휘한 천마의 권력이 사막을 뒤덮자, 모여 있던 모래 쿵쿵이들이 피떡이 되어 쓰러져 버렸다.

그렇게 천마는 운 좋게 위기 상황을 넘길 수 있던 것이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A급으로 분류된 던전은 가변던전에 준할 만큼 위험한 곳이라고요. 심지어 이 모래 쿵쿵이는 위험도 3만에 육박하는 고위험군 몬스터였단 말입니다!]

무명의 목소리엔 원망이 담겨져 있었다.

천마는 강하지만 천하무적은 아니다.

던전 지역엔 이 이상 위험한 S급 던전들이나 가변던전이 부지기수로 널려 있으며, 천마 단독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몬스터들도 존재한다.

만약 지금처럼 무모한 시도를 했다간, 언젠가 천마 역시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앞으론 참고하지.”

천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탁탁 털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음성과 태도였으나, 무명은 오늘따라 그런 천마의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천마 님. 저는 매일매일 고심하며 천마 님이 던전에서 매장으로 무사 복귀할 수 있도록…….]

“알겠다. 잔소리는 그만하도록.”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

서운함에 눈 센서를 흐릿하게 만들던 무명은 순간 무언가를 발견했다.

‘…무리하신 거였군요.’

천마는 덤덤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손끝을 살짝 떨고 있었다.

천마대능력.

육체의 한계를 돌파시켜 힘을 끌어오는 이 천고의 무학비결은 양날의 검과 같다.

끌어올린 힘이 결국, 맹렬한 반력(反力)이 되어 다시 몸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만약 천마가 금강지체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미 그의 육체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어보려던 무명은 입을 다물었다.

생체 정보를 측정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천마는 매우 지쳐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럴수록 천마는 어깨를 더 펴고 걸었다. 지칠수록 허리를 더욱 꼿꼿이 폈고 눈빛과 걸음에 당당함을 유지했다.

그것이 절세무학의 대종사. 마도의 하늘이라 불리는 고금제일인의 자세이니.

휘이이잉.

그때 사막 한가운데에 강풍이 불어왔다. 폭풍처럼 강렬하고 거친 바람이었다.

터벅터벅.

모래를 휘감은 돌개바람이 천마의 몸 주변을 감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막을 횡단하는 순례자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라?]

그때 앞을 살펴보던 무명이 눈을 반짝였다.

저 멀리 보이는 모래산 아래 신기루처럼 펼쳐진 아주 작은 궁전이 보였다.

순간 무명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환호성을 내었다.

[천마 님. 모래섬 던전의 히든 맵, 나르시스 궁전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뭐냐.”

[히든 맵은 던전 내에 숨겨진 지역이나, 희박한 확률로 나타나는 비밀 공간을 뜻합니다. 저 나르시스 궁전은 이 모래섬 던전의 히든 맵입니다.]

천마는 멀리 보이는 궁전을 자세히 살폈다.

마치 양탄자를 탄 요정이 날아다닐 것 같은 궁전의 아래쪽에선, 모래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사막이란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조각 쓸쓸한 나룻배와 같은 모습이다.

“황량한 성이로군.”

천마가 낮게 중얼거리자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풍경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궁전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니까요.]

“무슨 말이냐.”

[저 던전 중심부에는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못을 바라보면, 살아오면서 겪었던 즐겁고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모처럼 설명 거리가 생긴 무명은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그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든 각성자들이나, 불우한 기억이 있는 각성자들이 이 연못을 찾아 하염없이 바라보았죠. 마치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신화 속의 나르시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궁전의 이름이 나르시스가 된 것이죠.]

“시답잖군.”

무명은 천마의 말을 멋대로 해석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름다운 기억은 언제나 머릿속에 있으니, 굳이 던전까지 들어가서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흥.”

낮게 코웃음을 친 천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이 나르시스 궁전이 아니라, 던전의 출구 쪽이라는 걸 깨달은 무명이 말했다.

[궁전엔 안 들어가실 겁니까?]

“안 간다.”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오자 무명이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천마 님. 제 몸은 미세한 먼지에 매우 취약합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무명의 몸은 방진 기능은 물론, 물속에서 24시간 잠겨 있어도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완벽한 방수 처리가 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 무리하게 빠져나가다, 저에게 심각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잠시 바람이 멈출 때까지만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어떨까요?]

“흠.”

천마가 불만스러운 듯 침음을 내자 무명이 두 손을 모았다.

[천마 님.]

잠시 침묵하던 천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르시스 궁전이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히든 맵, 나르시스 궁전.

궁전 안으로 들어가자, 외부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아름다운 숲이 펼쳐져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따스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렸고, 낮은 새소리가 곳곳에 들렸다.

눈 센서를 반짝이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무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 기왕 들어오셨으니, 숲 안쪽을 조금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요?]

무명의 내심을 훤히 들여다본 듯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관심 없다.”

[아뇨. 제가 보고 싶어서요.]

무명은 신이 난 음성으로 말했다.

[천마 님은 그 연못이 인간에게만 환각을 보여주는지, 아니면 저와 같은 기계도 환각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자 천마는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호기심마저 메마른 그였으나, 무명이 말한 내용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으음.”

결국 무명을 어깨에 올린 천마는 숲길을 따라 걸었다.

길목마다 다채로운 꽃과 식물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어디선가 맑은 새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황량한 사막이 펼쳐진 던전 내부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싱그럽고 상쾌한 풍경이었다.

[천마 님. 저곳입니다.]

무명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연못을 발견했다.

[어라?]

그런데 그 연못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긴 머리칼에 전투 형태가 아닌, 평상복처럼 커스텀이 된 나노슈트를 입고 있는 젊은 청년이다.

그는 마치 연못 안에 무언가를 빠트린 것처럼,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명이 인사를 건네자 연못을 바라보던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긴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오뚝한 콧날, 그리고 어딘가 슬픔에 젖어 있는 호수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용모의 청년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사이한 기운이 흘렀다.

시선을 마주하자 무명은 청년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괴였군.”

무명이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천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번에 요괴라는 걸 알아채자 청년의 시선이 천마에게 슬쩍 고정되었다.

“영지의 직원?”

놀랍게도 청년은 천마가 영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위장병에 걸린 환자가 독이 든 술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시선을 연못에 고정했다.

[저어, 혹시 괜찮으신가요?]

청년의 모습을 보다 못한 무명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청년의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보다 전신에는 암울하고 어두운 색채가 흘러나왔다.

그냥 놔두면 당장이라도 연못에 몸을 던져 버릴 것만 같았다.

“…….”

무명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일까?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오직 연못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어…….]

무명이 다시 말을 걸려 하는데,

쩌적.

갑자기 연못의 표면이 얼어붙었다. 더 이상 청년에게 들여다보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자 청년은 갑자기 한 손을 내뻗었다.

우웅.

그 순간 알 수 없는 강력한 파동이 뻗어 나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파동은 탁한 얼음처럼 변해 있던 연못의 표면을 다시 매끄럽게 바꾸어놓았다.

동시에 모래 위를 떠다니던 나르시스 궁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건…….]

출렁출렁 움직이던 궁전의 움직임이 멈추자, 무명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천마가 모래 쿵쿵이에게 포위당했을 무렵, 유사의 흐름이 멈췄던 것은 이 청년의 힘 때문이라는 것을.

[아까 유사를 멈추어주신 분이셨군요!]

무명이 반갑게 소리치자 연못을 바라보던 청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착각하지 마.”

[네?]

“유사의 흐름을 멈춰야 연못 상태가 다시 리셋이 되는 것뿐이니까.”

‘연못도 리셋을 해야 하나?’

무명이 둥그런 머리를 긁적이는데, 천마가 말했다.

“슬슬 지겨워지는군.”

[아, 네.]

천마의 어깨에서 내려온 무명은 머쓱한 표정으로 청년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도 연못을 한번 들여다봐도 되겠습니까?]

“안 돼.”

청년은 연못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내가 보고 있잖아.”

시건방진 대답이 돌아오자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찌 되었건 무명은 천마의 부하다. 부하를 무시하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천마 님.]

불편한 천마의 기색을 발견한 무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찌 되었건 천마 님께 도움을 주신 분이 아닙니까.]

천마의 귀에 가까이 간 무명이 다시 속삭였다.

[요괴들은 대체로 나이도 많고 괴팍하기도 하고요.]

“그럼 돌아가도록 하지.”

천마가 몸을 돌리려 하자, 무명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 온 것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안 될까요? 천마 님께서 다시 이 나르시스 궁전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천마는 다시 연못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년은 비켜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청년은 연못을 바라보다 표면이 흐려지면 힘을 써서 되돌리고, 또 흐려지면 힘을 써서 되돌리는 걸 반복할 뿐이었다.

“이젠 그만 비키도록.”

보다 못한 천마가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봤잖나.”

사실 그의 입장에서 이 정도면 크게 양보를 해준 것이다.

무명의 말대로 어찌 되었건 도움을 받은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청년은 천마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진 놈이로고.”

청년인 시선조차 주지 않자, 천마를 단단히 묶어놓았던 인내심이란 밧줄이 모두 끊어졌다.

내공을 끌어올린 천마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슈우우.

부드럽지만 막강한 반극진기의 힘이 청년의 몸을 가볍게 밀어내었다.

우웅.

그러자 청년 역시 우뚝 선 채 강력한 진파를 쏟아내 천마의 진기를 막아내었다.

“호.”

청년이 무형의 힘으로 대항하자 천마의 입가엔 미소가 넘실거렸다.

그는 강자를 좋아했으며, 여러 가지 수법을 파훼하는 걸 즐긴다.

줄곧 피곤하고 몸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으나, 신기한 힘을 쓰는 청년을 보자 오히려 기운이 났다.

“이것도 한번 막아봐라. 뇌인파멸!”

흥이 난 천마가 벼락같은 일격을 쏟아내었다.

다섯 줄기의 예리한 권력이 쏟아지자 청년은 왼팔을 힘껏 내밀었다.

핑!

예리한 파고음과 함께 뇌인파멸의 권력이 회오리치더니, 도로 천마의 몸으로 쏟아졌다.

“호오, 차력회선(借力回旋)의 수법인가.”

가볍게 권력을 피한 천마가 손가락을 튕길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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