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면 요리 투어 (4)
살얼음이 가득 낀 차가운 동치미 육수에 메밀 향이 그윽하게 풍기는 면이 올려져 있었다.
면이 뚝뚝 끊어지는 메밀면을 한입 베어 문 천마는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독특한 맛이로다.”
일전에 먹었던 평양냉면과 함흥냉면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특히 치아마저 얼려 버릴 것만 같은 동치미 막국수의 맛은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듯했다.
[어떻습니까.]
무명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천마는 대접에 담긴 막국수를 내려다보았다.
“무더운 날엔 생각날 법한 면 요리로군. 어째서 점주는 본좌에게 이 음식을 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더 없는 극찬이다.
그거야 짜장면만 고집하셨으니까요, 라는 말을 삼킨 무명이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국수는 흔한 음식이니 담부턴, 시공 현장에서도 한번 시켜 드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후룩. 후루룩.”
천마의 옆에선 소녀가 정신없이 막국수를 흡입하고 있었다.
고기 고명과 깨소금이 잔뜩 올라간 감칠맛의 비빔 막국수를 단숨에 비운 소녀는 천마에게 말했다.
“나도 그거.”
[알겠습니다. 여기 11번 테이블. 동치미 막국수 한 그릇, 아니 세 그릇 더 추가해 주세요!]
무명이 소리높여 주문하자 천마가 말했다.
“본좌도 비빔 막국수를 먹겠다.”
[11번 테이블. 비빔 막국수도 한 그릇 추가입니다!]
“후룩. 후루룩.”
추가로 나온 동치미 막국수가 테이블 위에 올려지자 소녀는 또다시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경쟁하듯 비빔 막국수를 먹는 천마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무명은 문득 내부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있는 걸 깨달았다.
-우와, 저 나노봇 언어팩 끝내준다.
-저 나노봇, TV에서 종종 광고하는 그 차세대 언어팩 쓴 거 아냐?
-저 사람, 근육을 보니까 상위 랭커인가 봐.
-옆에 앉아 있는 건 딸인가? 너무 귀여워.
희미하게 쑥덕이는 목소리를 들은 무명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어디를 가든 천마를 빤히 바라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천마의 험악한 얼굴과 몸에서 풍기는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기운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다름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라.”
천마는 대접 그릇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입에 국수를 들이붓는 소녀를 보며 말했다.
“뺏어 먹지 않는다.”
“맛있어.”
소녀가 나직이 대답하자 천마가 혀를 찼다.
“조금 있다 다른 곳에도 갈 거다. 그렇게 배불리 먹어선 다음에 갈 요릿집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테지.”
그제야 무명은 사람들의 시선이 왜 달라졌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딘가 닮아 보이는 천마와 소녀의 눈매. 거기다 무뚝뚝하면서도 은근히 신경 써 주는 천마의 모습이, 여느 부녀지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아.]
평생 보지 못할 광경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을 눈에 담자, 무명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무명은 행복합니다.]
“무슨 헛소리냐.”
[아닙니다. 많이 드십쇼.]
“나, 더 먹을래. 이번엔 차가운 거.”
소녀의 말에 벅찬 감동을 억누른 무명이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11번 테이블. 동치미 막국수 한 그릇 추가입니다!]
점심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국도변에 있는 파스타 전문점 ‘천사의 정원’이었다.
일요일이었다면 몰려든 손님들 때문에 상당히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월요일인데다 늦은 점심인 만큼 내부는 매우 한산했다.
[이곳은 파스타가 매우 맛있을 뿐 아니라, 야외에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산책로로 유명한 곳입니다. 원래는 웨이팅을 생각하고 이곳을 구경하려 했으나…….]
무명은 말끝을 흐렸다.
이 작은 소녀는 대식가에다 먹는 것에 진심이었다.
파스타 한 그릇을 더 먹으면 먹었지, 여러 가지 꽃과 식물들이 있는 정원을 거닐려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볼래.”
하지만 놀랍게도 소녀는 정원을 가리켰다.
“쓸데없는 말을.”
천마가 귀찮은 듯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자 무명이 작게 속삭였다.
[장채원 님도 손님으로 대접하라고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헛소리 마라. 본좌는 귀찮다.”
하지만 후드를 뒤집어쓴 소녀는 꽃들이 피어 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천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손님입니다, 손님. 응대 업무를 배운다고 생각하세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천마가 이를 깨물며 혈염광휘를 쏟아내자 무명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자, 저를 따라오십쇼. 이 무명이 안내를 하겠습니다.]
팔다리를 뽑아낸 무명이 점소이처럼 앞장서자, 소녀는 응 하는 소리를 내며 천마의 옷깃을 다시 잡아당겼다.
“흥.”
무명을 노려보던 천마는 송곳니를 드러낸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천사의 정원이라는 이름답게, 산책로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꽃들의 축제 속에 들어온 것처럼 꾸며진 길은 마치 천사가 걷는 축복스런 길처럼 꾸며져 있었다.
십만 팔천 종의 서적을 머릿속에 집어넣었으며, 무공과 대법이 고금제일의 경지에 이른 천마.
하지만 아쉽게도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다 똑같은 길이 아니냐.”
산책로를 걸을 때마다 천마는 툴툴거렸다.
하지만 정원의 꽃들에 둘러싸인 채 배시시 미소 짓는 소녀의 옆얼굴을 보자 천마는 어쩔 수 없이 정원의 길을 따라 걸었다.
[자, 이제 배도 꺼졌으니 맛있는 파스타를 맛볼 시간입니다.]
정원을 한 바퀴 걸은 탓에 소화도 되고 입맛도 살아난 상태였다.
천마와 소녀가 테이블에 앉자 무명이 미리 주문한 파스타 요리가 하나둘씩 올려졌다.
[이곳의 명물인 오징어 먹물 파스타와 트러플 파스타, 그리고 매콤 게맛살 파스타입니다. 트러플 파스타는 다진 소고기와 노른자, 크림, 치즈를 푹 끓여낸 소스에 트러플이 올라갔으며, 오징어 파스타는 토치로 불향을 입혀…….]
주절주절 설명하는 무명의 설명을 뒤로 한 채 천마와 소녀는 눈앞의 파스타들을 먹기 시작했다.
“호오.”
면을 먹는 천마의 눈은 조금씩 커졌다.
이 파스타라는 면 요리는 지금까지 천마가 먹었던 요리들과 궤를 달리했다.
진한 버터의 풍미가 느껴지는 오징어 파스타에선, 씹으면 쫄깃한 오징어의 식감이 혀를 감쌌다.
트러플 파스타에선 녹진한 소스가 면발 사이에 배어들어 깊은 맛이 느껴졌고, 매콤 게맛살 파스타의 매콤한 맛이 식욕을 돋우고 느끼함을 없애주었다.
[천천히 드십시오. 더 추가 주문을 해놓았으니까요.]
이번에 무명은 ‘맛이 어떻습니까?’라는 말은 생략했다.
농후한 맛에 놀란 천마의 표정과 생기있는 표정으로 파스타를 먹는 소녀의 얼굴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니까.
더욱이 산책을 한 탓에 천마처럼 늘 굳어 있던 소녀의 얼굴이 훨씬 더 밝아 보였다.
무명은 왠지 그 점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자자, 마지막 요리는 면 요리의 처음이자 끝이라 할 수 있죠. 바로 잔치국수입니다.]
해가 저물고 까맣게 물든 하늘이 보일 무렵.
무명이 마지막으로 안내한 곳은 바로 잔치국수를 파는, 시내의 포장마차 거리였다.
[사실 이 포차거리는 잔치국수 명인이 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맛집도 없습니다.]
소녀에게 안겨 있는 무명이 포장마차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찬바람이 도는 쌀쌀한 밤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포차에서 잔치국수 한 그릇. 이것은 대한민국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식이라고나 할까요?]
무명의 유도광선은 십여 미터 떨어진 ‘우동집’이라고 적힌 포장마차를 향해 있었다.
[이 잔치국수를 면 요리 투어에 넣은 건, 천마 님께서 국수의 맛보다 우리나라 고유의 분위기나 정서를 즐겨주십사 하는 마음에 택한 겁니다.]
장황한 무명의 말에 천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소녀와 함께 포차 안으로 들어갔다.
비좁은 포차 안으로 들어가자 낮은 백열등 조명에 파란색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천마와 소녀가 구석 자리에 앉자 무명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모, 여기 잔치국수 두 개, 우동 두 개 주세요!]
“응? 으응.”
웬 둥그런 나노봇이 손을 흔들며 친근하게 주문하자, 포차 이모는 황당한 표정을 삼키고 국수를 삶기 시작했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고 있는 포장마차. 그 분위기는 마치 늦은 밤 무림인들로 가득 찬 무림의 노점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흠.”
천마는 흥미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술 한잔 걸치며 고된 하루를 풀어내는 사람들. 한잔 술과 안주에 속상함을 털어내는 사람들.
이 포장마차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술집이자, 그날그날의 애환을 푸는 휴식처이기도 했다.
“국수 나왔습니다.”
옆자리에 홀로 앉은 남성의 테이블에 국수가 올려지자, 그는 그릇을 통째로 들어 국물부터 마셨다.
“크어.”
걸걸한 소리를 낸 남성은 나무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자, 국수랑 우동 나왔습니다.”
천마의 테이블에도 국수와 우동이 올려졌다.
소녀와 천마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릇을 들어 국물을 들이켰다.
“카.”
소녀가 억지로 신음성을 내자 천마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평생 꼬마 아이들에게 동정이나 관심을 보인 적이 없건만, 어째서 이 작은 소녀에겐 희미한 감정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후루룩.”
천마와 소녀는 기분 좋게 국수와 우동을 먹었다.
포차의 분위기와 차가운 공기가 맞물려서인지, 색다른 맛은 없었지만 너무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 * *
포차에서 나온 천마는 소녀와 나란히 걸었다.
복잡한 시내에서 벗어나 한적한 주차장에 도착하자 천마가 라마스의 문을 열었다.
철컥.
그런데 무명을 들고 있던 소녀는 조수석에 타지 않고 멍하니 천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타십니까?]
이상함을 느낀 무명이 묻자 소녀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어둠을 밝히는 듯, 환한 소녀의 미소를 본 천마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건가.”
고개를 끄덕인 소녀는 무명을 높이 들더니 꼭 안고 뺨에 얼굴을 비볐다.
[왜, 왜 이러세요. 부끄럽습니다.]
“음식, 맛있었어.”
작게 속삭인 소녀는 조심스레 무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린 채 천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다. 거절하겠다.”
천마가 손을 휘휘 저었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고 다가왔다.
그리고 천마를 꼭 안아주었다.
“으음.”
키가 작은 탓에 천마의 다리를 안은 형국이었으나, 소녀는 개의치 않고 천마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또 올게.”
소녀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지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맑아지고, 청량한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크흠.”
견디지 못한 천마가 헛기침을 하자, 소녀는 천마의 두 다리를 조심스레 놔주었다.
살짝 손을 흔든 소녀는 빛이 닿지 않은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커다란 후드를 입은 소녀의 작은 그림자는 점차 어둠 속으로 녹아들더니,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져 있었다.
* * *
다음 날, 복복 인테리어.
오늘따라 웬일인지 매장은 더욱 깔끔하고 화려해지고 조명도 더 밝아진 것만 같다.
아침 일찍 출근한 천마는 장채원에게 소녀의 정체를 들을 수 있었다.
“이면귀 어르신의 말을 빌리자면 말야. 아주아주아주 높은 신이래.”
“신이라.”
소녀의 미소를 떠올린 천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점주가 모르는 신도 있단 말인가?”
“당연히 모르지. 그쪽 신을 내가 어찌 알아?”
“그쪽?”
천마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장채원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알 거 없어. 매장 청소나 해.”
천마는 군말 없이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무슨 신이 있든,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선 장채원의 말에 천마에겐 상관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참, 종종 찾아온다더라.”
“무슨 말이냐.”
불길함을 느낀 천마가 고개를 돌리자 장채원이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꽤나 미식을 즐긴다나 뭐라나. 유구한 세월 동안 미식을 즐기는 인간들 중에서 맘에 드는 사람을 선택해 왔대.”
“미식을 즐기는 인간?”
“그래. 이번엔 천마, 네가 선택된 거지.”
굳어버린 천마를 바라보던 장채원은 허탈한 미소를 보였다.
“덕택에 우리 매장은 강제로 영지 등급이 올라갔어. 단숨에 7등급 매장으로. 어마어마한 신과 거래를 튼 거니까.”
그래서 매장이 더 반짝거리고 빛이 나는 것이었나.
천마가 황당한 표정을 참지 못할 무렵,
[그거 잘된 일이군요.]
창고 방에 누워 있던 무명이 튀어나와 말했다.
[그분께서 오시면 천마 님께서도 종종 미식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장채원 님이 식비도 지원해 주고요.]
“아암. 식비 정돈 당연히 지원해 주지. 밥만 먹어주는 걸로 우리 매장은 엄청난 광고효과를 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장채원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 신지 관리팀에 못 박아두었어. 홍보가 되는 건 좋긴 한데, 더 이상 영지 등급을 올려주는 건 사양이라고.”
장채원은 복복 인테리어의 영지 등급을 일부러 간당간당하게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갑작스런 등급 상승에 오히려 불만을 갖는 듯했다.
“여하튼 담에도 잘해봐.”
장채원의 말에 천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은 없다. 앞으론 찾아와도 거절하겠다.”
“무슨 소리야? 그냥 밥만 먹어주면 매장에 엄청난 광고효과를 볼 텐데.”
“귀찮다. 그런 일을 해서 본좌가 얻는 이득은 뭔가?”
“어머머, 무슨 그런 말을. 넌 우리 매장 직원 아니냐?”
[앞으로 미식 코스를 잘 짜둬야겠군요.]
천마는 좌절했으나 팔짱을 낀 무명은 환한 목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