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면 요리 투어 (3)
“밥은 사줬다. 이제 따라오지 마라.”
밥집에서 나온 천마가 매몰차게 돌아섰다.
무명이 여러 번 집과 부모님, 사는 곳 등을 물어봤지만 소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무명은 실종신고 기록과 더불어 각종 기관의 전산망을 해킹해 소녀에 관한 기록이나 정보를 찾아봤지만, 역시나 나오는 건 없었다.
[정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도깨비일까요?]
무명이 힘없이 중얼거리는데, 소녀가 양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졸려.”
무명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시계는 10시가 넘은 상태였다.
[천마 님. 우선 밤이 늦었으니…….]
“절대로 싫다.”
천마가 단호히 거절하자 무명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바깥에 내버려 둔단 말인가요.]
“이곳에는 보호소 같은 곳이 있지 않나. 그곳에 연락해라.”
놀랍게도 천마는 이 세계에 퍽 적응한 듯 그럴싸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요괴라는 존재에 대해선 잘 모르는 상태였다.
[요괴는 아직 인간들에게는 생소한 존재입니다.]
무명은 눈을 비비는 소녀를 가리켰다.
[게다가 소녀는 그 희귀하다는 도깨비입니다. 아마 저 뿔을 발견하면 사람들이 난리를 치겠죠. 어쩌면 협회로 잡혀가 생체실험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본좌와는 상관없는 말이다.”
엉덩이 가방에서 차량의 키를 꺼낸 천마가 몸을 돌리려 할 무렵,
“너무… 졸려.”
두 눈을 비비던 소녀가 두툼한 천마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은 부서질 듯 매우 작았고, 또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무리 요괴라도 해도 찬바람이 도는 밤바람을 낡은 옷으로 다 받아내고 있으니 몸이 싸늘할 만했다.
“으으.”
천마가 자신의 손을 끌어안고 있는 소녀를 보며 앓는 소리를 내자, 무명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천마 님. 밤바람이 쌀쌀합니다. 우선 집으로 복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불 꺼진 옥탑방은 고요했다.
천마는 방 안에 꼿꼿이 정좌한 채 운공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더러운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잔뜩 쌓아 올린 이불 위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천천히 눈을 뜨자 곤히 잠든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세상의 때는 한 터럭도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이다. 하지만 소녀를 바라보는 천마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천마 님.]
그때 충전스테이션에서 몸을 일으킨 무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제 고집을 모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명은 알고 있었다.
설령 소녀의 머리에 벼락이 내리친다고 해도, 천마는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무명의 억지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흥.”
천마는 그저 낮게 코웃음을 쳤다.
무명은 어젯밤 음식점을 밤새 검색하고 자신이 좋아할 만한 드라이브 코스를 뒤지고 또 뒤졌다.
그리고 잠깐이라도 지루할 틈이 없도록 사이사이 명승지나 풍광 좋은 곳을 휴식처로 삼았다.
배터리가 다 소모될 만큼 밤새 고생한 무명의 노고를 알고 있기에, 천마도 오늘 하루쯤은 무명의 고집을 들어준 것이다.
[내일 출근하는 대로 장채원 님께 도움을 구하면 해결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다. 자라.”
[알겠습니다.]
무명은 기분 좋게 충전스테이션에 몸을 뉘었다.
라마스에 몸을 구겨 넣은 채, 한적한 도로를 따라 즐겁게 드라이브를 하던 천마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 * *
“뭐, 뭐야.”
기분 좋게 출근한 장채원은 들고 있던 커피를 떨어뜨릴 뻔했다.
매장은 전과 다름없고, 천마는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있었다.
하지만 장채원의 시선은 천마가 아닌 그 옆에 고정되어 있었다.
응접 테이블.
그곳엔 헝클어진 머리에 꾀죄죄한 천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깡마른 소녀가 둥그런 무명을 끌어안고 있었다.
“천마… 너 이곳에 딸도 데려왔어?”
“본좌의 딸이 아니다.”
“그럼 누군데? 친척이야?”
“친척이라니.”
“왠지 모르게 너랑 닮았는데. 아냐?”
감정이라곤 한 올도 보이지 않는 딱딱한 표정. 어딘가 서늘하면서도 오만해 보이는 눈빛.
그것은 영락없이 천마를 꾹 찍어 닮아 있었다.
“안녕?”
소녀 앞에서 허리를 굽힌 장채원이 생긋 웃었다.
“언니는 장채원이야. 넌 이름이 뭐니?”
장채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소녀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소녀의 팔에 안겨 있던 무명이 눈을 반짝이며 대신 대답했다.
[아마 도깨비인 것 같습니다.]
“도깨비?”
팔다리를 폴짝 뽑은 무명은 소녀의 어깨에 올라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자, 여기 이렇게 뿔이 있지 않습니까.]
“파란 뿔…….”
장채원은 눈썹을 찌푸렸다.
“도깨비 뿔은 붉은색이잖아. 그리고 저렇게 모양이 작지 않다고.”
[하지만 S급 은신 스킬에 준하는 완전 투명화를 사용하던걸요. 음파탐지와 전파탐지 시스템을 동시에 가동시켜야 간신히 형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게 말이죠…….]
무명은 어젯밤 소녀와 만났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묵묵히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장채원은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소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뿔이 있고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 라.”
잠시 고민하던 장채원이 내당으로 가는 문을 열고 휘파람을 삐익 불었다.
“제비야! 잠깐 이리로 와봐.”
그 순간 휘익 하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장채원의 어깨에 하얀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최강의 신수라는 불가사리이자, 그녀의 애완동물 제비였다.
“제비, 너 도깨비 싫어하지?”
-뀨!(두말 하면 섭하다냥.) 뀨우뀨!(맛있는 쇠를 쓸데없는 금덩이로 만드는 놈들이다냥.)
“그럼 저 아이가 도깨비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니?”
장채원이 소녀를 가리키자 제비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휘익.
갑자기 하얀 빛줄기가 된 제비가 소녀의 목을 하얀 몸으로 휘감았다.
“제비, 너 뭐 하는…….”
“간지러.”
제비가 목을 휘감자 굳어 있던 소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흘렀다.
그 미소는 너무나 천진하여 어두운 매장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듯했다.
-뀨우우웅 뀽!(도깨비가 아니다. 엄청엄청 좋은 냄새가 난다냥!)
“그런가?”
제비의 울음소리를 들은 천마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깨비가 맞다는군.”
-뀨뀨….(넌 제발 귓구녕 좀 파라냥.)
“아니라잖아. 도깨비였으면 저렇게 제비가 몸을 부비겠냐고.”
고개를 가로저은 장채원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하긴 하네. 아니면 기억을 잃은 건가?”
“무슨 말인가.”
소녀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던 장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텅 비어있잖아. 눈이.”
“무슨 말인가.”
“본능과 순수함으로만 가득 차 있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요괴처럼 말야.”
천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점주는 그런 것도 알아본단 말인가.”
“뭐, 일단은.”
그제서야 천마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장채원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매우 특이한 존재라는 걸.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무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괴인지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꼬마 숙녀분은 천마 님을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천마를? 왜?”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눈을 깜빡이던 장채원은 천마를 바라보았다.
생긴 건 저 지경… 아니, 좀 험악하지만 천마는 엄연히 인족이다.
그런데 왜 이 소녀는 저 험상궂은 천마를 같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확실히 골치 아픈 일이네.”
장채원이 이마를 매만지자 천마가 덤덤하게 말했다.
“골치 아플 게 뭐가 있나. 인간은 확실히 아닌 것 같으니 요괴를 맡아주는 곳에 보내면 되겠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냐.”
장채원은 푸른빛으로 빛나는 소녀의 뿔을 바라보았다.
“분명 요괴 쪽에서는 요괴가 아니라고 판단할 거야. 그렇다고 저렇게 이마에 뿔이 떠억 하니 달려 있으니 인족들에게 맡길 수도 없겠지.”
[뿔도 달렸고, 투명화 스킬도 사용하고. 어떻게 봐도 요괴인 것 같은데요.]
무명의 중얼거림에 장채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괴를 판별하는 건 외모나 능력이 아니라 순수하고 온전한 요괴의 피야. 즉 순수한 요력을 지니지 않으면 아무리 외모가 닮았다던가,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요괴로 인정하지 않아.”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천마가 턱을 쓰다듬었다.
“한마디로 외모나 능력은 요괴의 판별 기준이 되지 않는단 말이군.”
“그래. 무조건 순수한 요괴의 혈통을 지녀야 해.”
장채원의 말을 들은 천마는 앉아 있는 소녀를 빤히 응시했다.
소녀의 눈동자는 가을 하늘을 비추는 호수처럼 깨끗하고 투명했다.
만약 뿔만 없다면 예쁜 인족의 소녀와 다름없는 용모였다.
“인간들처럼 스킬이라는 걸 발휘하지만, 인간이 아니다. 이마에 뿔이 달린 요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요괴도 아니다.”
장채원의 이야기를 단번에 정리한 천마가 두 눈을 껌뻑거렸다.
“결국 이 꼬마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란 말인가.”
“으응. 일단 내가 보기에는.”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마가 눈을 번뜩였다.
“그럼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나.”
“글쎄. 그렇다고 시설엔 맡기면 절대 안 될 테고…….”
곰곰이 생각하던 장채원이 다시 말했다.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겠지만, 요괴들 중에서 편견 없는 독지가(篤志家)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딸랑.
그때 문이 열리며 인자한 얼굴을 한 할아버지가 휘적휘적 매장으로 들어왔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는 요신, 이면귀였다.
“장 사장, 안에 있는감?”
“어르신!”
이면귀를 바라보는 장채원이 활짝 웃었다.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편견 없는 독지가가 나타난 것이다.
“우선 어떻게 된 사정인지 확인을 해보자고.”
장채원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이면귀.
그는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소녀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한참 동안 손가락을 갖다 대던 이면귀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떼어냈다.
“어헉!”
창백해진 안색으로 뒷걸음질 친 이면귀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 이런 실례를…….”
“네?”
장채원이 두 눈을 깜빡이며 입을 벌릴 무렵, 이면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속삭였다.
“장 사장. 잠깐 나 좀 보자고.”
이면귀는 장채원과 함께 창고 안쪽에서 한참 동안 쑥덕였다.
잠시 뒤, 창고에서 나온 이면귀는 헐레벌떡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장채원은 환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딱히 일도 없고 매장도 굉장히 한가하네?”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온 그녀는 천마의 몸에 바짝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일찍 퇴근해. 그리고 국수 먹으러 가.”
“무슨 소리냐.”
미간을 찌푸린 천마를 보던 장채원이 입술을 다물고 복화술을 시도했다.
“면 요리 투어 말이야. 담주에도 무명이랑 가기로 했다며. 그러지 말고 오늘 다녀와. 한가하니까.”
“갑자기 무슨 말이냐.”
“특별 휴가야. 오늘 딱히 할 거 없으니까 갔다 오라고.”
장채원은 매우 정중한 자세로 응접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저, 저분도 모시고 말야.”
천마는 매우 걱정스런 표정으로 장채원을 내려다보았다.
“점주. 어디 아픈가.”
천마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관심을 보인 것이었으나, 장채원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입 다물고 그냥 갔다 와.”
이를 깨물고 속삭인 장채원은 천마의 손에 카드를 찔러주었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자.”
천마는 장채원이 준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갑작스런 휴가와 음식비 지원을 마다할 성격이 아니다.
딸랑.
그때 매장 밖으로 뛰어나갔던 이면귀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들고 있던 종이백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자자, 별거 아니지만 신발과 입을 만한 옷을 좀 사왔네.”
“제가 할게요.”
종이 봉투에 들어 있던 예쁜 샌들을 꺼내어 소녀의 발에 신겨준 장채원이 소녀를 창고 안으로 이끌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소녀는 모자가 달린 커다란 후드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천마는 이게 무슨 귀신놀음인가 싶어 멍하니 서 있었다.
“자자, 다 됐다. 어서 출발해.”
“대체 무슨 말인가. 정말 지금 본좌더러 국수를 먹으러 가란 말인가.”
“그래. 뭐, 썩 내키지는 않지만. 우리 매장도 어쨌든 영지니까.”
장채원은 재촉을 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절하게 대해. 매장에 온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 * *
[자, 갑작스러운 천마 님의 특별 휴가로 면 요리 투어, 제2탄이 오늘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천마의 애마, 라마스의 대쉬보드에 올라선 무명이 공갈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했다.
[자, 그리고 오늘은 특별 손님도 계십니다. 꼬마 숙녀님. 반갑습니다.]
조수석에 멍하니 앉아 있던 소녀에게 손을 가리킨 무명이 천마에게 말했다.
[천마 님. 박수 한번 주세요!]
“계속 헛소리를 늘어놓을 거면 본좌는 집으로 가겠다.”
무명은 내비게이션처럼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삼백 미터 앞 우회전입니다.]
“국수, 먹으러 가?”
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소녀가 말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그 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그렇다.”
운전대를 잡은 천마가 덤덤히 대답하자 소녀는 다시 작게 말했다.
“좋… 아.”
그 목소리는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대에 차 있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유도선을 무심히 바라보던 천마는 자신도 모르게 액셀을 꾹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