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낙지다리 던전에서 생긴 일 (3)
“입구부터 진을 치고 있네요.”
중심부로 가는 통로를 바라보는 강민주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전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괜, 괜찮을까요?”
장성륜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과 눈빛으로 보아 정말로 그는 보스몬스터와 상대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입구부터 마중 나와 있는 몬스터는 오랜만에 봐서…….”
“으음.”
고글을 살짝 매만진 강윤후는 두려워하는 장성륜과 이설화를 보며 말했다.
“그냥 여기 계시는 게 어떨까요?”
“네?”
“구슬여우를 처리하고 끝나면 부르겠습니다. 굳이 따라오실 필요 없어요.”
“아뇨. 저희도 돕겠습니다.”
장성륜이 힘차게 주먹을 쥐자 강윤후가 아까 봤던 두 사람의 등록증을 떠올렸다.
‘6급이라고 했지.’
두 사람 모두 육체각성도는 70%에 근접. 장성륜은 에어실드. 이설화는 에너지 탄이라는 C급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은데요.”
강윤후의 말에 장성륜이 머리를 긁적였다.
“설화의 에너지 탄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니, 그럼 저희는 후미에서라도 지원을…….”
우르르르르.
그때 어디선가 쏟아지는 듯한 괴음이 들려왔다.
이상함에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회색빛 그림자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장성륜이 어둠을 빤히 응시하는 순간, 강민주가 크게 외쳤다.
“어서 던전 중심부 안으로!”
밀려오는 회색빛 그림자는 수백… 아니 수천 마리는 되는 듯한 꾹꾹쥐들이었다.
“으으!”
비명을 지른 장성륜 커플이 강윤후 남매를 따라 던전 중심부로 뛰어갔다.
“가능한 꾹꾹쥐를 처리하지 않고 돌파할 테니, 두 분도 알아서 따라오세요.”
강민주의 외침에 장성륜 커플이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낙지다리 던전 중심부.
그곳은 마치 중세시대의 마을처럼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지어진 집들과 마구간. 심지어 마을 중심부엔 우물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콰쾅!
그리고 마을 중심부엔 폭음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구슬을 꼬리에 달고 있는 여우가 허공을 누비고 있었다.
낙지다리 던전의 보스몬스터, 구슬여우였다.
“하압!”
그리고 구슬여우 전면에는 강윤후와 강민주가 스킬을 발휘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강윤후는 쥐고 있는 단분자 커터에서 번개를 쏘아내었다.
강민주는 양팔을 벌려 물방울과 같은 투명한 실드를, 자신과 강윤후에게 만들어냈다.
“흐으읍!”
그리고 마을 입구 쪽에선 에어실드를 쏟아내는 장성륜, 그리고 에너지 탄을 쏘고 있는 이설화가 있었다.
“젠장. 너무 많아.”
위험도 200에 불과한 꾹꾹쥐는 크게 위험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던전 중심부를 가득 채운 꾹꾹 쥐는 족히 수천 마리. 때때로 에어실드를 뚫고 들어와 장성륜의 팔과 다리를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던전에 흩어져 있어야 할 꾹꾹쥐가 여기 다 모여 있는 건데?”
장성륜의 외침에 에너지 탄을 쏘아내던 이설화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몰라. 우리 어떡하지?”
* * *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시계탑 꼭대기.
천마는 은신잠영술을 펼친 채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감상하고 있었다.
[강윤후 남매의 스킬이 매우 독특하군요.]
무명은 손가락을 뻗어 강윤후와 강민주를 번갈아 가리켰다.
[강윤후 씨가 사용하는 건 아마도 A급 스킬 ‘화살 낙뢰’ 같습니다. 강민주 양이 사용하는 건… 음, 아마도 A급 스킬인 ‘바람의 선율’인 듯하고요.]
연신 ‘아마도’를 연발하는 무명을 보며 천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확하지 않다는 건가.”
[스킬 도감과 대조했을 때 뭔가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뭐, 같은 스킬이라 해도 각성자의 개성에 따라 달리 보여지기도 하니까요.]
“전뢰(箭雷)와 풍율(風律)이라. 이름은 제법 그럴듯하군.”
[실제로도 매우 강력한 공격과 방어 스킬입니다. 또한 둘을 합치게 되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요.]
하지만 화려한 스킬을 연달아 사용하고 있음에도 강윤후와 강민주 남매는 고전하고 있었다.
구슬여우뿐만 아니라 꾹꾹쥐 수천여 마리가 끊임없이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그때 에어실드로 꾹꾹쥐들을 밀어내고 있던 장성륜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 망할 놈의 쥐새끼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무명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장성륜 커플을 가리켰다.
[아쉽게도 저 장성륜 씨 커플은 조만간 꾹꾹쥐 들에게 뜯어먹히겠군요. 수천 마리의 꾹꾹쥐를 상대하기엔 육체각성도나 스킬, 모두 약합니다.]
“버텨봤자 죽음뿐인데 어째서 피하지 않는 거지.”
천마가 비웃음을 머금자 무명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천 마리의 꾹꾹쥐가 끊임없이 달려드는데 무슨 수로 뚫고 가겠습니까?]
“그렇군.”
눈동자가 뻘게진 상태로 덤벼드는 꾹꾹쥐들을 보며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천마 님의 능력은 항상 저를 놀래키는군요. 지나가면서 던전의 벽을 후려쳤을 뿐인데… 어떻게 던전에 흩어져 있는 꾹꾹쥐를 몽땅 던전 중심부로 불러들이신 겁니까?]
낙지다리 던전에 들어온 천마는 던전 내부에 수없이 많은 쥐들이 서식한다는 걸 대번에 발견했다.
그리고 저들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던전 벽을 후려쳐 곳곳에 진동을 일으킨 것이다.
“크든 작든 쥐새끼들은 진동에 민감하지.”
덤덤하게 말했으나 사실 그도 이 정도까지 쥐들이 몰려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백여 마리의 쥐 떼들이 나올 줄 알았건만, 예상외로 던전 내에 있는 모든 꾹꾹쥐들이 천마가 있는 곳으로 몰려든 것이다.
[진동으로 쥐를 부릴 수 있는 건가요?]
무명의 질문에 오랜 과거를 떠올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과거 남만의 두목 노릇을 하던 만수존자(萬獸尊子)의 수법을 흉내 낸 것뿐이다.”
[친하셨나 봅니다.]
“친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처럼 온갖 쥐새끼를 불러놓고는 본좌에게 덤볐지.”
좋은 추억을 돌이켜 보는지 알았건만.
덤덤히 과거를 회상하는 천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도 쥐새끼의 밥으로 줬다.”
무명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말했다.
[그럼, 꾹꾹쥐가 흉포해진 것도 천마 님의 수법 때문인가요?]
모든 무학에 정통한 천마였으나, 아쉽게도 만수존자의 만수조종(萬獸祖宗)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쥐새끼가 쥐를 부리는 수법을 흉내 내었을 뿐이거늘, 본좌가 어찌 알겠느냐?’
라고 말할 수 없었던 천마는 코웃음을 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쥐들은 진동에 민감하지.”
[…그렇군요.]
다시 고개를 돌린 무명이 눈 센서를 번뜩였다.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인 것 같습니다.]
수천여 마리의 꾹꾹쥐 떼들은 보스몬스터, 구슬여우에 못지않았다. 아니, 구슬여우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저대로 놔뒀다간 네 사람 다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천만에.”
걱정스런 무명의 말에 천마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아직 진짜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군.”
[누가 말입니까.]
“저 여성 말이다.”
천마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강민주였다.
구형 나노봇 헬멧을 쓴 채 바람을 힘겹게 일으키는 그녀가 숨은 실력자란 말인가?
무명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 센서를 번뜩였다.
[그나저나 정말 이상합니다.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땐 네 사람 모두 협회의 실력자도, 강도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천마는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
* * *
에어실드를 뚫고 들어온 꾹꾹쥐 한 마리가 장성륜의 목 뒤를 물어뜯었다.
“크윽.”
비명을 지른 장성륜은 재빨리 꾹꾹쥐를 후려쳤다.
하지만 이미 살점은 뜯겨나갔고 물린 부근이 타는 듯 아파왔다.
“으으으으.”
통증이 느껴지자 집중력이 흩어졌고, 점차 에어실드도 약해져 갔다.
“성륜 씨, 실드가 깨지고 있어!”
이설화의 외침에 장성륜이 허리춤을 뒤적거려 둥그런 알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장기간 전투 시나 위급 시에 먹는 고가의 진통 각성제, 소마(SOMA)였다.
-찌익!
하지만 또다시 튀어나온 꾹꾹쥐의 공격에 장성륜은 손에 쥔 소마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 이런.”
절망감이 엄습하자 또다시 에어실드가 약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쥐들이 하나둘씩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이익!”
꾹꾹쥐의 치악력은 뼈를 씹어먹는 하이에나에 버금간다.
아무리 6급 각성자라고 해도 경질화 스킬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몸에 달려드는 꾹꾹쥐의 이빨 공격에 당해낼 순 없었다.
“이런 시펄!”
결국 장성륜은 에어실드 스킬을 포기하고, 단분자 커터를 양손으로 비틀어 쥐었다.
“이 쥐새끼들! 다 썰어버리겠어!”
“성, 성륜 씨!”
하지만 이번엔 이설화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원거리 스킬, 에너지 탄을 사용하는 이설화는 근거리 격투 실력이 부족했다.
심지어 단분자 커터 따윈 장비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런.”
강윤후가 꾹꾹쥐들에게 둘러싸인 이설화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강민주의 외침에 강윤후는 재빨리 단분자 커터를 몸 앞으로 치켜세웠다.
차앙 소리와 함께 구슬여우의 예리한 앞발에 의해 단분자 커터가 두 조각 났다.
“젠장.”
단분자 커터는 쇠도 베어낼 만큼 예리하다.
하지만 각도를 잘 맞춰 방어하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부서진다.
“이게 무슨 B급 던전이야? A급 던전에서도 이렇게 몬스터가 한꺼번에 몰려오진 않아!”
단분자 커터를 바닥에 집어 던진 강윤후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민주야. 후퇴하자! 더 이상 안 되겠어.”
“저 사람들은?”
“알 게 뭐야. 분명 책임 못 진다고 했잖아.”
“그게 말이 돼?”
헬멧의 잠금장치를 매만진 강민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잠시 몬스터들을 진정시킬 테니까, 오빠가 저들을 데리고 우선 피해.”
“미쳤어? 너 그걸 인족 앞에서 쓸 거라고?”
“어쩔 수 없잖아. 어차피 저들은 봐도 잘 모를 거야.”
장성륜 커플을 바라보던 강윤후가 고개를 저었다.
“꾹꾹쥐들이 너무 많아! 저걸 다 어쩌려고?”
“괜찮아. 어차피 위험도가 낮은 꾹꾹쥐일 뿐이야. 가능해.”
강민주는 헬멧을 천천히 벗었다.
그러자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얀 피부에 은빛 눈동자를 가진 강민주의 모습은 마치, 정령이 사람으로 탈바꿈한 듯한 모습이다.
“젠장.”
두 주먹을 꽉 쥐던 강윤후가 낙뢰를 사용해 강민주를 보호했다.
샤아아아아.
그 순간, 강민주의 눈동자에선 금빛 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천천히 허공에 떠오른 그녀의 눈동자에서 신비한 빛이 퍼져나갔다.
번쩍!
마치 섬광탄이 내부에 터진 것 같다.
순식간에 던전 내부는 하얀빛으로 물들었고, 미친 듯이 덤벼들던 꾹꾹쥐와 구슬여우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꾸우우우.
낮게 울어대는 구슬여우는 배를 까고 누웠고,
-찍찍.
꾹꾹쥐는 잠시 기절한 것처럼 신음성을 내며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뭘 멍하게 있어!”
강윤후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장성륜과 이설화를 향해 소리쳤다.
“빨리 나가! 시간 없으니까!”
“네. 네!”
그제서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출구 쪽으로 뛰어갔다.
“역시 저 사람들…….”
이상 행동을 보이는 몬스터들, 그리고 그 위에 천사처럼 떠 있는 강민주.
도망가는 와중에서도 장성륜의 시선은 강민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샤아아아.
신비한 소리와 함께 강민주의 눈에 맺힌 빛이 점차 사라지자,
-꾸우우우우?
-찌지지직?
정신을 차린 구슬여우와 꾹꾹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툭.
허공에 떠 있던 강민주가 의식을 잃고 떨어지자 강윤후가 재빨리 그녀를 안아 들었다.
“민주야, 괜찮아?”
“으응.”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강민주가 힘없이 말했다.
“어서 도망가야 해. 몬스터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아, 알았어.”
강민주를 안아 든 강윤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구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체… 저게 뭐였을까요?]
시계탑 아래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생소한 힘의 파동은… 저 역시 생전 처음 보는 스킬이었습니다.]
“본좌가 어찌 아나.”
천마의 말에 무명이 약간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면 천마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린 걸 깨달은 것이다.
‘천마 님이 오시고 나서부터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맞는지조차 의심된단 말이지.’
위이이잉.
강민주의 스킬을 분석하기 위해 무명이 복잡한 연산을 시작하는 순간,
-쥐를 한꺼번에 부른 게 김민준 씨였나요?
갑자기 천마의 눈앞에서 밝은 빛과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정신을 잃고 있던 강민주의 목소리였다.
[우왓, 천마 님. 이게 뭡니까?]
놀란 무명이 펄쩍 뛰자, 천마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신기한 기술이군.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빛에서 강민주의 수줍은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제 능력은 심안(心眼)이거든요. 오래 사용하진 못하지만.
천마가 침묵을 지키자 강민주가 다시 말했다.
-심안으로 보는 김민준 님의 모습은 너무나 신비하군요. 차가운 얼음과 불꽃이 같이 있어요. 세상을 모두 얼릴 것 같은 냉기와 모두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불꽃이…….
천마의 마음을 빗대어 이야기한 것일까?
강민주의 말에 천마는 덤덤히 대꾸했다.
“본좌가 익힌 한령빙백신공과 마화열극지의 형상이겠지.”
그때 샤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천마의 눈앞에 떠오른 빛이 점차 약해졌다.
-깨어날 시간이 된 것 같군요. 민준 씨, 죄송하지만 거래를 제안드리고 싶은데…….
“거래?”
-부탁은 절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 어디까지나 제 느낌이지만.
놀랍게도 강민주는 정확히 천마의 성격을 꿰뚫고 있었다.
천마는 눈치가 빠르고 뛰어난 인물을 좋아한다.
“거래라.”
눈앞에 떠오른 빛을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나 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