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암격(暗擊) (2)
“그럼.”
휘익.
예리한 단분자 커터가 공기를 가리며 웅크리고 있는 천마의 목을 갈랐다.
아니, 갈라야 했다.
“어떻게…….”
쇠도 두부처럼 자르는 단분자 커터가 천마의 식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 있다.
“꽤나 낡은 수법을 사용하는군.”
웅크리고 있던 천마가 허리를 꼿꼿이 펴자, 손가락에 끼어 있던 단분자 커터가 단숨에 두 동강 났다.
채앵.
맑은소리와 함께 두 조각난 단분자 커터를 내려다보는 남현욱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코끼리도 단번에 쓰러뜨리는 맹독, 생사향(生死香)을 맡고도 힘을 쓰다니.”
“촌스러운 이름이군.”
연신 뒷걸음질 치는 남현욱을 향해 천마가 오른손 식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잘 봐라.”
천마가 내공을 사용하자, 갑자기 식지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시꺼멓고 까만 액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똑똑.
손가락 끝의 시꺼먼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역겨운 냄새와 함께 치이이 하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어기집독(御氣集毒).
절정의 내공을 사용해 혈맥에 퍼진 독기를 한곳으로 몰아넣는 수법이다.
일 갑자 내공을 가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해독법이었으나, 남현욱는 귀신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림에서도 독공(毒功)은 한물간 무학이지.”
어처구니가 없던지 천마가 혀를 찼다.
“천추만독인(千秋萬毒人)이라 불리는 만독법왕(萬毒法王)도 본좌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거늘. 고작 이런 독공 따윌 믿고 시건방을 떨었던 거냐.”
남현욱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호흡기뿐만 아니라 피부로 침투하는 맹독 스킬 생사향. 이는 아무리 강한 힘과 스킬을 가진 각성자라도 막을 수도, 견딜 수도 없는 것이다.
“뭐, 고작 독으로 본좌의 만독불침을 깬 것 하나는 인정해 주지.”
천마는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는 남현욱을 바라보며 하품을 했다.
“이제 재주는 다 부린 것이냐?”
“흐흐흐. 하하하하!”
낮게 웃음을 터뜨리던 남현욱은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찾았어. 생사향에 견디는 각성자를 찾았어! 흐흐하하하!”
양팔을 벌린 그의 눈동자에선 시퍼런 광기가 번들거렸다.
“드디어 쓸 수 있겠군요. 드디어. 히히히히!”
입가에 허연 침을 흘리던 남현욱이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갑자기 나노슈트 가슴팍에 부착되어 있는 금속 보호대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콰직. 지지지직.
금속이 으스러지자 퍼런 불꽃이 튀어 오른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주는 보호대가 아니라 정밀한 기계였던 것이다.
“참으로 지루한 놈이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마가 또다시 하품을 할 무렵.
“……!”
갑자기 눈앞에 있던 남현욱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어딜 보시나요.”
어느새 천마의 등 뒤에 우뚝 서 있던 남현욱이 음침한 목소리를 내었다.
“허어.”
천마는 탄성을 내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하나, 떨어지는 벼락도 피할 수 있는 자신의 이목을 잠시나마 속일 수 있다니.
“남은 수가 있었나.”
등을 파고드는 남현욱의 수도(手刀)와 그것을 막아낸 천마의 주먹이 부딪치자.
콰앙!
폭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흐흐흐흐!”
어느새 남현욱의 키는 1미터 정도가 더 커져 있었고, 몸집 역시 천마의 두 배 이상으로 부풀었다.
그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근육으로 이루어진 몬스터처럼 보였다.
“더 즐겁게 해주시죠!”
누런 눈을 번들거리는 남현욱이 다시 한번 주먹을 크게 치켜들었다.
천마는 재빨리 지풍을 날렸지만, 울퉁불퉁한 근육에 닿자 경력(勁力)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마치 강마연옥공(降魔煉獄功) 같군.”
강마연옥공은 십대마존 중 강마가 창안한 외문무학으로, 근육을 풍선처럼 부풀려, 쏟아지는 경력을 모두 튕겨낼 수 있다.
격산타우의 수법에 취약한 철포삼이라든가, 소리 내어 말을 하면 공력이 흩어지는 소림의 금강불괴체 신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절정마학(絶頂魔學)이기도 했다.
콰앙! 퍼엉!
거대한 괴물로 변한 남현욱은 단단한 몸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스피드도 월등히 올라갔다.
쾅쾅쾅쾅!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남현욱과 천마의 손이 연달아 부딪치자, 천지가 뒤집히는 폭음과 함께 사방에는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하하! 역시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시간이 지날수록 남현욱의 스피드는 더욱 빨라졌고, 육체도 점차 풍선처럼 부풀었다.
완연한 몬스터였다. 남현욱은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괴물이 된 것이다.
콰웅!
또 한 번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자, 남현욱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천마가 십여 미터 바깥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약해! 약해! 너무 약해!”
또다시 달려와 미친 듯이 주먹을 퍼붓는 남현욱은 광기 그 자체였다.
눈을 제외한 모든 부위가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그는, 이제 인간의 모습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잘난 각성자란 놈들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이지!”
콰앙!
계속되는 주먹끼리의 격돌. 그럴 때마다 뒤로 밀려나기만 하는 천마.
“이런 놈들 때문에…….”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낮고 괴이한 음성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버럭 소리치는 그의 육성엔 어딘가 모르게 한과 억울함이 맺혀 있는 듯하다.
“이런 놈들 때문에! 이런 놈들 때문에!”
거대한 바위와 같은 주먹이 비처럼 쏟아진다.
남현욱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처음엔 뒤로 밀리기만 하던 게, 이젠 땅에 다리가 푹 박힐 정도였다.
하지만 엄청난 위력의 공격을 우뚝 서서 받아내는 천마의 눈빛은 오히려 적막함이 감돌았다.
‘다를 바가 없나.’
몬스터와의 전투는 단순하다. 그저 전력을 다해 단단한 몸뚱이를 부수면 그만이었으니.
하지만 인간 대 인간의 전투는 다르다. 팔과 다리뿐만 아니라, 눈과 손가락 등 미세한 움직임으로도 허점을 유도할 수 있다.
파괴력보다 정밀하고 오묘한 동작을 사용하며, 간결하면서도 번개와 같은 동작으로 급소와 약점을 노린다. 이것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근육질 괴물로 변한 남현욱은 던전에서 봐왔던 몬스터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괜한 기대를 했군.”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린 천마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천마. 그는 남현욱이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현욱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여유 부리지 마!”
샤앗.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남현욱의 두 주먹이 천마의 머리통을 내리치려는 순간.
“권마칠식…….”
낮게 웅크린 천마의 두 주먹에선 붉은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승풍항룡!”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풀쩍 뛰어오른 천마의 주먹이 남현욱의 거대한 아랫배와 단단한 턱을 후려쳤다.
“웃기지 마, 이딴 것…….”
그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지금까지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던 천마의 태도를 보고, 그의 공격이 자신에게 큰 대미지를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대로 받아주지!”
남현욱은 팔을 교차하여 천마의 일격을 막았다. 아니, 막아내려고 했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괴음과 함께, 승풍항룡의 권력(拳力)이 남현욱의 두 팔을 파고들었다.
“어억.”
양팔이 부러지는 고통에 신음을 쏟아낼 무렵.
파아!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듯한 타격음과 함께 남현욱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쿠웅.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남현욱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푸우!”
쓰러진 채 피를 토하자, 거대했던 남현욱의 근육들이 서서히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보랏빛으로 물든 그의 혈액을 보니, 천마에게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독공을 펼친 게 아니라 독인(毒人)이었나.”
독인.
비방의 약물과 독을 강제로 주입해 신체 능력을 증강시키고, 독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를 뜻한다.
독인이 되면 단시간에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으나, 생식능력이 사라지고 수명도 단축된다.
“약물과 독에 절여진 상태였군.”
천마가 혀를 차자, 쓰러져 있던 남현욱이 피를 줄줄 흘리며 웃었다.
“…안 그러면 너희 같은 각성자들과 어찌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
묘한 말이다. 그렇다면 남현욱, 이자는 각성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끄으.”
신음을 내뱉은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졌는지 몸에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말 대단해. 힘을 모두 사용하고도 져버린 건 처음이야.”
낑낑대며 몸을 일으키던 남현욱은 이내 체념한 듯, 후우 숨을 내뱉었다.
“염동력에 근력증강 스킬에, 음속돌파에 가까운 이동 능력… 이 모든 스킬을 한 번에 사용하다니.”
남현욱은 감탄 섞인 눈빛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당신도 ‘그자’의 밑에 있는 거겠군요.”
“그자?”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천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의 남성은 자신의 신분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탓인지 남현욱은 또다시 말이 많아졌다.
“이런 날이 오기를 바라왔지. 당신처럼 강한 각성자의 손에 죽기를.”
하지만 남현욱의 수다에 질려 버린 천마는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죽여. 어서.”
뭉글뭉글 피를 흘리던 남현욱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런 거였나? 이런 기분이었나?
죽음의 공포라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선 즐거움과 광기가 될 수도 있는 거였다.
“끝없이 고통받으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남현욱이 후련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 느낌이 없다. 이상함을 느낀 그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여전히 인상을 쓴 채 우뚝 서 있는 천마의 모습이 보였다.
“왜 손을 쓰지 않는 거지?”
“무슨 말이냐.”
“어서 손을 쓰시지.”
“다 썼다.”
“그게 무슨…….”
남현욱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동정을 베풀겠다는 건가?”
“웃기는 소리군.”
눈썹을 찌푸린 천마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단분자 커터날을 발로 차주었다.
“죽고 싶으면 스스로 목을 그어라.”
“뭐라고?”
“다 죽어가는 벌레를 굳이 눌러 죽일 필요는 없지.”
천마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남현욱이 다급히 소리쳤다.
“당신이 쳐낸 일격 때문에 전신의 뼈가 으스러졌어. 어떻게 스스로 죽으란 말이지?”
“본좌가 알 바 아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천마가 낮게 중얼거렸다. 몸을 돌리는 천마를 바라보자, 남현욱은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대로 저자를 보내면 안 된다!
남현욱의 기술. 아니, 그의 몸뚱이 자체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는 최고 수준의 기밀 정보와 같다.
“잠, 잠깐만!”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있는 남현욱이 소리쳤다.
“알겠어. 내가 다 말해주겠어! 가지 마!”
“무슨 말이냐.”
천마가 고개를 돌리자 남현욱은 환호성을 지를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모든 걸 알려줄 테니 가지 마. 다 말해줄 테니까…….”
천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현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반 사람 같으면 팔다리가 으스러진 고통으로 인해 이미 쇼크사했을 수준이다. 하지만 그는 마치 마취에서 덜 깬 사람처럼 빙긋 웃고 있었다.
“내가 두려운 건 죽지 못하는 거야. 전신의 뼈만 으스러졌을 뿐,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알잖아? 일이 잘못된다면… 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될 수 있으니 말야.”
‘머릿속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군.’
천마는 천하 마인들의 우두머리다.
눈앞의 남현욱의 태도는 그저 어리숙하게 장난감을 숨기는 갓난아이처럼 보일 뿐이다.
“좋다.”
땅에 떨어진 단분자 커터를 집어 든 천마가 남현욱에게 다가갔다.
사실 천마는 그가 떠벌리는 이야기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의 간자(間者:첩자)들이 어떤 식으로 자멸을 시도하는지는 궁금했다.
“너희들도 예상했지만, 우리도 이미 어느 정도는 성공했어. 다만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건…….”
천마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자, 남현욱은 잔혹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근육질의 거인으로 변한 남현욱은 천마의 몸을 움켜쥐었다.
“흐흐흐.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겠지.”
온 힘을 다해 천마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은 남현욱이 다시 말했다.
“너는 나와 같이 죽는 거다!”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던 그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을 거야. 이제 곧… 세상은 지옥으로 바뀔 테니까.”
묘한 말을 속삭인 남현욱은 입 안에 숨겨두었던 가짜 치아를 힘껏 깨물었다.
치익. 콰앙!
한낮을 어둠 속에 빠뜨릴 만큼 강렬한 섬광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천마와 남현욱을 집어삼켰다.
쿠우우우…….
폭발 지점엔 시뻘겋게 불타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고, 그 부근의 땅은 뭉글뭉글 녹아버렸다. 그 위력은 가히 부비스톤 서너 기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우우웅.
폭발 사이로 투명한 빛을 내는 구체. 그 안에 천마가 우뚝 서 있었다.
전설상의 무학, 호신강기(護身罡氣)가 펼쳐진 것이다. 천마는 자신이 펼친 호신강기를 보며 팔짱을 끼었다.
“흠.”
호신강기. 본래 삼 갑자 이상의 내력이 있어야 간신히 펼칠 수 있다. 아직 그만큼의 내력을 회복하지 못한 천마였다.
“이것 때문인가.”
일전, 호광에게 새로 얻은 우리옷에는 특수한 기운이 덧씌워져 있었다.
반극진기를 일으켜 그 기운을 확산시키면, 잠시 동안 강기와 비슷한 성질의 힘이 퍼져나가는 것이다.
원리를 이해한 천마는, 다시 남현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잔해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그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죄다 낡은 수법이군.”
가짜 치아와 폭발물을 이용한 동귀어진. 이런 것들은 갓 투입된 무림의 초보 살수도 하지 않는, 한물간 수법들이다.
천마는 입맛을 버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괜한 기대였나.”
이 세계에 와 처음으로 벌인 인간 대 인간의 전투였다.
천마는 이곳의 인간들 중에서, 자신과 겨룰 수 있는 고수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내심 품고 있었다.
그리고 광기 어린 남현욱의 태도는 그런 기대를 잠시 동안이나마 충족시켜 주기도 했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제 곧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테니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점을 빤히 바라보던 천마는 문득 남현욱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관계없는 일이다.”
천마는 낮게 중얼거렸다.
“본좌의 세상 또한 지옥이었으니.”
차갑게 돌아선 천마는 안개와 같은 신법으로 폭발 지점을 벗어났다.
* * *
-‘순응인’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각성자임에도 던전 관련 직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직업을 얻어 조용히 살아가는 각성자들을 뜻하는 건데요.
-최근 잇달아 출몰하는 히든몬스터라든가 던전 지역의 사고 때문에 순응인이라 불리는 각성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던전에서 한바탕 싸움을 하고 돌아온 천마. 그는 무명과 함께 작은 교자상 앞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마치 동네 슈퍼라도 갔다 온 것처럼 평온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보는 천마였다.
남현욱의 입장에선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전투였을지 몰라도, 그의 입장에는 맛있는 술을 마시다 중간에 그만둔 듯한 찝찝한 느낌이었다.
‘왜 이곳의 인간들은 무공을 갈고 닦지 않는 것인가.’
사실 근육질로 변신한 남현욱의 힘은 일 갑자 내공을 갖고 있는 천마와 비등한 수준이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혔더라면, 이처럼 쉽게 패배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천마 님.]
무명은 말없이 TV만 바라보고 있는 천마를 불렀다.
[그 남성의 정체라도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본좌도 모른다.”
무명은 천마가 옥탑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애원해도 그저 ‘본좌도 모른다’, ‘관심 없다’, ‘그런 것 따윈 물어보지 않았다’ 등의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쨌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천마의 옆 모습을 바라보던 무명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앞으론 어떤 일이든 함께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망감을 참지 못한 무명이 조심스레 충전스테이션에 들어가 몸을 뉘려는 순간.
“그러지.”
아주 작고 낮은 대답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대신 너도 점주에게 오늘 일을 말해선 안 된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천마가 못 박듯 말했다.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를 본좌의 즐거움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 암습을 당한 천마. 공격을 당한 영문조차 모르고 있음에도, 그는 이것을 위협이 아닌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자포자기한 무명은 아주 작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