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15화 (115/285)

제115화. 교부신의 신뢰 (2)

“후우.”

고민 끝에 결국 천마는 자세를 풀어버렸다.

아무래도 신마멸천장으로 현관문만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천마는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통상적인 공격은 모두 흡수해 버린다. 유일하게 먹히는 신마멸천장의 힘은 집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

결국 천마가 사용할 수 있는 팻감은 모두 막혀 버린 셈이다.

“곤란하군.”

천마가 신음을 내뱉듯 낮게 중얼거렸다.

“방법이 없나.”

“그래?”

그때 어디선가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채원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그렇구나. 어쩌지?”

표정과 말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

걱정스러운 것처럼 말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은 천마의 실패를 경축하고 있었다.

“이를 어쩐담. 결국 실패해 버렸네.”

파도처럼 씰룩이는 입가를 보아하니, 조금 있으면 흥겹게 춤이라도 출 기세다.

천마가 침묵하자 장채원이 바싹 다가와 말했다.

“천마가 책임진다고 했는데. 그래서 허락한다고 한 건데.”

“…….”

“수락한 신뢰를 실패하면, 앞으로 신뢰를 받는 데 있어서도 불이익이 생기는데.”

입술을 내민 채 애교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다. 표정만 보자면 남자친구에게 애교를 부리는 여성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얼음보다도 차가웠다.

“큰소리 빵빵 친 덕에 은총까지 모조리 선불로 받았는데, 어쩌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천마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장채원의 안면에 주먹을 날릴 뻔한 것이다.

“후우.”

자신의 자제력이 무섭도록 강하다는 걸 느낀 천마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걱정 마라. 책임은 진다.”

“어떻게?”

“어떻게든 한다.”

“그래? 그렇구나.”

활짝 웃은 장채원이 독사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근데 더 큰 문제가 있어.”

“뭐냐.”

“생각해 보니 신주갑이 설치된 조명은 반드시 둘 이상, 영지의 직원이 설치해야 하거든.”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김 씨가 있잖나.”

“김 기사님은 신뢰 더 이상 안 맡는다고 했어.”

순간, 천마는 신계청사에서 일했던 김찬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 씨 부탁이니 특별히 하는 거여. 절대 두 번은 안 할 것이여.

“그렇군.”

“미안하지만 내일부턴 은소 아파트 공사가 들어가. 견적 의뢰도 밀려 있고. 널 도와줄 시간이 없어.”

장채원은 약 올리듯 말했다.

“뭐, 원한다면 은진 씨를 불러줄 순 있어.”

‘은진 씨랑도 친해지고, 천마의 성격을 고칠 수도 있으려나?’

내심 음흉한 미소를 지은 장채원이 쾌재를 불렀다.

일전, 삼겹살 회식으로 인해 분위기가 예전보다 살벌한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교부신의 신뢰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도, 영지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도 모두 각오한 터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천마의 오만한 성격을 조금 누른다면?

거기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면?

그 나름대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됐어. 더 이상은.”

속마음을 숨긴 장채원이 천마의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하듯 말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실패는 누구나 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실패라는 게, 그렇게 괴로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듯이.

“대신 다음에 잘하면 돼. 교부신 님께는 내가 잘 말해둘게.”

“본좌가 실패했다고?”

“그래.”

장채원은 고개를 돌려 천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자라면, 깨끗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포기?”

“응. 포기.”

초점이 없던 천마의 눈동자에서 혈염광휘가 솟구쳤다.

포기. 천마 앞에서 그따위 단어는 결코 사용해서는…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점주.”

천마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장채원을 바라보았다.

“본좌는 천마다.”

“어쩌라고.”

“포기라는 말은 본좌의 사전엔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이제 곧 추가되겠네.”

빠직.

천마의 눈동자에선 전깃불과 같은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천마대능력이 아닌, 내공으로 쏟아내는 반극진기의 빛이었다.

우두둑.

동시에 천마의 몸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육은 파도처럼 흔들리고 피부는 끓는 물처럼 들썩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장채원의 물음에 천마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능하겠군.”

“뭐가?”

“이 신뢰, 본좌가 처리하겠다.”

“어떻게?”

이를 꽉 깨문 천마가 장채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일.”

“내일?”

“내일!”

천마의 눈동자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회색 눈깔을 불러라.”

* * *

이튿날, 교부신의 돌담집 앞.

끼익.

하얀색으로 물든 소형 승합차가 돌담집 앞에 멈춰 섰다.

철컥 소리와 함께 운전석에선 거구의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천마였다.

그리고 조수석에선 청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은 늘씬한 여인이 문을 열고 내렸다. 일이 있을 때만 자유롭게 출퇴근을 하는 고은진이었다.

“끄응.”

차에서 내린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사장님하고 일하는 줄 알았는데.”

어젯밤, 고은진은 갑작스럽게 장채원에게 연락을 받았다.

신뢰. 그것도 시외에 있는 대지유신의 집 조명을 달아줄 일이 생겼다고 했다.

그동안 줄곧 신뢰를 경험해 보고 싶었던 그녀는 당연히 승낙했다.

하지만 현장에 대지유신은 없고, 천마와 단둘이 해야 하는 노가다일 줄이야.

“아, 하기 싫지 말입니다.”

고은진이 피곤한 듯 목을 움직이자 뿌드득 소리가 난다.

매장에서 교부신의 집까지 차를 타고 온 거리는 자그마치 두 시간.

두 시간 동안 고은진은 쇳덩이보다 더 무겁고, 매연보다 텁텁한 차 안의 분위기를 견딘 것이다.

“일을 가려 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관둬라. 본점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까.”

천마의 말에 고은진이 발끈했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근육몬과 일하는 게 싫은 겁니다.”

“일은 일일 뿐이다.”

엄숙한 목소리로 말한 천마는 고은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적인 감정을 일에 넣지 마라. 회색 눈깔.”

프로 정신이 듬뿍 담긴 말이다. 어느새 천마는 이 세계 전문 직업인의 마음가짐을 터득한 것일까?

천만의 말씀.

그저 포기라는 걸 죽어도 용납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 것뿐이다. 포기를 할 바엔, 차라리 고은진과 협력하는 것이 천마에겐 훨씬 나은 일이었으니까.

“이번 임무에 대해 본좌가 다시 한번 설명하지.”

교부신의 단독주택 앞으로 걸어간 천마가 말했다.

“내부에는 신계에서 만든 고가의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설치 방법은 매우 간단하지만, 신계의 조명인 만큼 두 사람이 들어야 한다고 하더군.”

“다 좋은데 말입니다.”

고은진은 앙증맞게 느껴질 만큼 작디작은 현관문을 가리켰다.

“대체 무슨 수로 저 안에 들어간단 말임까?”

“천축유가공이다.”

대답을 하는 천마의 표정은 몹시 우울해 보였다.

천축유가공.

전신의 뼈와 근육을 자유자재로 줄이고 늘릴 수 있는 세외무림의 기학(奇學)이다.

하지만 이 공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음양이기를 사용하는 신마멸천장처럼 끊어진 기혈 하나가 더 복구되어야 한다.

결국 본좌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천축유가공을 사용해야 하기에, 공력이 감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뭡니까?”

고은진의 말에 천마는 눈물을 머금고 천축유가공을 끌어올렸다.

우두두둑. 빠가가가가각.

기괴한 뼈 소리와 함께 천마의 키와 근육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피부가 파도를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몸의 핏줄이 투명하게 비쳤다.

후두두두둑. 두둑.

뼈 소리가 잦아들자 어느새 천마의 몸이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요술입니까?”

고은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축유가공이다. 극성의 경지에 이르면 축골소근(縮骨消筋:뼈를 줄이고 근육을 사라지게 만듦)이 가능하지.”

말을 하는 천마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내공이 새어 나가는 것도 우울한데,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온몸을 뒤덮은 것이다.

‘이상하군.’

뭔가 의도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어쩝니까?”

고은진의 말에 정신을 차린 천마는 팔을 뻗어 그녀의 맥문을 움켜쥐었다.

“뭡니까?”

“이 유가공은 타인에게 주입해 줄 수 있다. 맥문을 통해 주입하는 동안, 네 녀석의 몸도 줄일 수 있다는 거지.”

내공을 끌어올린 천마의 눈동자에선 노란빛이 흘러나왔다.

우두두두둑.

하지만 뼈 소리만 날 뿐, 고은진의 몸은 줄어들지 않았다.

“몸에 힘을 빼라. 저항하지 말고 본좌의 진기를 받아들여라.”

천마의 말에 고은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에 힘을 뺐다.

‘약골은 아니었나.’

진기를 주입하던 천마의 눈썹이 씰룩였다.

고은진의 몸에선 생각보다 강력한 힘이 넘치도록 흐르고 있었다. 몬스터를 잡기 싫어하는 모습과 달리 상당한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점주였다면… 실패했겠군.’

장채원의 몸에선 고은진보다 수십, 수백 배는 강력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만약 그녀에게 축골소근의 공력을 주입했다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로 튕겨 나갔을 것이다.

“으으.”

점차 키가 줄어들자, 고은진은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젠장. 겁나 아프지 말입니다.”

우두두둑.

고은진의 맥문을 잡은 천마가 전력을 다해 축골소근의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으드드득. 카카칵.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어느새 고은진의 몸도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후우.”

유가공을 주입한 천마는 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다음에 이(二) 갑자의 내공을 쌓게 되면 이 천축유가공부터 복구시켜야겠군.”

앞으로도 이런 신뢰가 안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다. 천마는 다음 무학으로 반드시 천축유가공을 선택하리라 마음먹었다.

“이제 손 놓으십쇼.”

그때 고은진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잡고 있을 필요 없지 않슴까.”

“계속 잡고 있어야 한다.”

“무슨 말임까?”

“네가 천축유가공을 익히지 않았잖나.”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공력은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본좌의 공력이 대폭 감퇴된다. 중단시키면 또다시 펼쳐야 하니 본좌가 계속 축골소근의 공력을 주입할 수밖에.”

고은진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얼마 동안 말임까?”

“일이 끝날 때까지.”

순간 매운 고추를 먹은 것처럼 고은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마디로 일하는 내내 천마와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다른 방법은 없슴까?”

“없다.”

고통스러운 빛이 떠오르는 건 천마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에서 혈투를 벌이며 별의별 험악한 상황을 다 겪어봤지만, 요괴와 손을 잡고 일을 하는 상황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시작하지.”

고은진의 팔을 붙잡은 천마가 앞장섰다.

광마혈투의를 입은 채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도복을 입은 귀여운 아이처럼 보였다.

“푸흡.”

“뭐냐.”

“작아지니까 한결 보기가 좋지 말입니다.”

실소를 흘리던 고은진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적으로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겁니까?”

“뭐가 말이냐.”

“근육이나 뼈를 줄였다는 것도 신기한데, 옷은 어떻게 딱 맞춰 줄어드는 겁니까?”

순간 천마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제야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옷도 줄었군.’

천축유가공을 펼치면 옷이 훌렁 벗겨지거나 찢어진다. 때문에 반드시 그에 맞는 옷을 준비해서 펼쳐야 한다.

천마도 이 사실을 잊은 채 천축유가공을 펼쳤건만… 놀랍게도 옷이 알아서 줄어든 것이다.

‘다른 세계라서 그런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내색할 수 없었던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듯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알 거 없다.”

끼익. 철커덕.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마침내 천마와 고은진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투박한 건물 외관과 달리, 내부는 최신식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호오.”

탁 트인 거실을 둘러보던 천마가 감탄성을 내뱉었다.

자연스러운 나무패턴이 느껴지는 원목 마루는 헤링본 스타일로 붙여져 있었으며, 북유럽풍의 러그가 거실 한가운데에 포인트로 깔려 있었다.

화사한 톤으로 꾸며진 인테리어 마감재들 사이로 심플하고 미니멀한 감성들의 집기들… 그리고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정도면 본좌가 즐겨보는 서적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실내를 살펴보던 천마가 감탄성을 내뱉을 무렵.

“우와아.”

주방을 바라보던 고은진도 입을 벌렸다. 대리석이 깔린 주방엔 전문 셰프들이 사용할 법한 도구들과 조리기구들이 즐비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 편에는 마치 오르간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기계도 세워져 있었다.

“S사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아닙니까? 유명 카페에서나 쓰는 하이엔드 급 머신을 집에 들여놓다니.”

“그게 뭐냐.”

“커피 추출 기계 말임다.”

“좋은 건가.”

천마의 물음에 고은진이 신이 나서 말했다.

“당연하지 말임다. 커피 맛은 훌륭한 원두와 훌륭한 머신이 좌우하지 말입니다.”

그녀는 천마의 손을 이끌고 머신 앞으로 가서 말했다.

“이 모델은 더 적은 수증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고, 니들 벨브를 조정해서 섬세한 추출 유량 설정이 가능하지 말입니다.”

이제 보니 고은진은 요리뿐만 아니라 커피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

그녀의 말을 흘려들은 천마는 거실 한 편에 쌓여 있는 목함을 발견했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신비한 광채를 번뜩이고 있다.

고은진의 손목을 이끈 천마가 천천히 다가가 고풍스러운 목함을 열었다.

달칵.

목함 안에는 신비한 빛을 뿜는 여러 가지 구슬들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신계용 조명인가.”

구슬들은 제각각 다른 색감과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떤 구슬은 정오의 따사로운 태양 빛을, 어떤 구슬은 해질 무렵, 은은하게 비치는 오렌지빛 노을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설명하기가 좀 어렵네. 뭐랄까, 자연스러운 빛들을 추구한다고나 할까?

“과연 그렇군.”

그제야 천마는 장채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흐음.”

아름다운 구슬들을 바라보던 천마는 집 안 곳곳을 살폈다. 천장 곳곳에는 오색 빛으로 반짝이는 둥그런 금속이 설치되어 있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네. 신주갑(神珠匣)을 미리 설치했으니까 말야.

교부신의 말을 떠올린 천마는 저 금속이 바로 조명을 넣는 신주갑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혼자 올 걸 그랬군.”

“뭐가 말입니까?”

“저 구멍에 구슬을 넣으면 되는 일이 아니더냐.”

천마는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굳이 힘들게 고은진을 불러 내공을 두 배로 소모시킬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닌가?

“흐음.”

천마는 왼손으로 목함의 구슬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묘한 냉기만 손끝에 느껴졌다.

“흐읍.”

내공을 끌어올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구슬은 미동도 없다.

오히려 힘을 주면 줄수록 알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이 손가락 끝을 파고들었다.

“소용없슴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은진이 고개를 저었다.

“대지유신이 아닌 이상, 혼자서는 이 신주를 못 만집니다.”

“신주?”

“자연 조명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 요괴들은 신주라고 합니다.”

천마가 고개를 돌리자 고은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신주는 말 그대로 자연의 빛을 담은 신령스러운 구슬입니다. 평범한 인간은 아예 만질 수도 없고, 영지의 직원이라도 해도 두 사람 이상이, 매우 정중히 받들어야 옮길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고은진은 이 자연 조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어찌 아나.”

천마의 물음에 고은진이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말했다.

“뭐, 오다가다 좀 봤지 말입니다.”

“그래서 점주가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군.”

사정을 깨달은 천마가 고은진에게 말했다.

“그럼 빨리 설치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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