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스터디룸 던전 (2)
“이상하군.”
그 상황을 지켜보던 천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마물들이 왜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맴도는 거냐.”
[그러게 말입니다. 라르바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특성이 있지만, 이렇게 특정 장소에 몰려들어 각성자를 공격하는 상황은 없습니다. 그나마 있다면 유일한 것이…….]
말을 하던 무명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문득 천마의 오른쪽 소매에 붙어 있는 까만 액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0.2퍼센트 확률로 나오는 라르바의 유물인 ‘망자의 눈물’ 같은 걸 몸에 지니는 것이죠.]
무명의 눈 센서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결국 이곳에 갑자기 라르바 군단이 등장한 이유는 천마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처음에 천마 님에게 달려들었던 라르바의 몸에서 유물이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천마 님의 주먹이 워낙 센 탓에 유물까지 박살 난 채로, 소매에 묻은 것 같군요.]
“무슨 말이냐.”
무명은 한숨을 쉬며 천마의 소매를 가리켰다.
[망자의 눈물은 일종의 라르바를 불러내는 핫스팟(몬스터를 불러내는 마도구) 같은 겁니다. 그걸 소매에 묻히고 다녔으니, 라르바가 몰려온 거죠.]
라르바는 망자의 눈물을 가진 천마를 추적했으나, 은신잠영술을 펼친 탓에 그 주변만을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 천마가 초홍의 전장에 바짝 붙어 있자 이쪽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그녀는 정신력이 소모되어 기절한 것이다.
“그랬나.”
이 모든 위기 상황을 만들어냈음에도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천마 님.]
그런데 윙윙거리며 연신 주위를 살펴보던 무명이 눈 센서를 반짝였다.
[이건 무슨 실험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냐.”
[보십시오. 방송국에서 던전 탐험할 때나 쓰는 나노드론이 이 상황을 찍고 있지 않습니까?]
무명의 말에 천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날파리만 한 작은 비행체가 특수대응팀 주변으로 날아다니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노드론은 협회의 허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방송국 출입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나노드론을 보낼 정도라면, 협회 소속의 각성자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데…….]
두 손을 뽑아 둥그런 얼굴에 갖다 댄 무명이 다시 말했다.
[왜 영상을 찍는 데만 열중할까요? 상황에 따라 지원을 해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알 게 뭐냐.”
그 사이 아래쪽에선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라르바는 미사일처럼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고, 외눈박이들은 강력한 불줄기를 쏘아내었다.
쿠웅.
한만재가 강력한 에너지 결계 스킬을 펼치자 종 모양의 금빛 물결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은호야! 팀장님 먼저 세이프던전 지역에 데려다 놓고 와!”
강력한 에너지 결계를 펼친 한만재가 소리치자 유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금방 다녀올 테니 기다려요.”
에너지 결계 속에서 초홍을 안아 든 유은호의 발아래에서 투명한 광점들이 솟구쳤다.
육체 계열 스킬 중에서는 최고봉이라고 알려진, 초고속 이동 스킬을 다시 사용하려는 것이다.
“어, 어라?”
스킬을 발휘하려던 유은호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초고속 이동을 하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스킬을 펼치자, 유은호는 주변을 떠다니는 나노드론을 발견한 것이다.
‘어떤 자식들이 이런 걸?’
슈우우욱. 콰지직.
번개처럼 이동한 유은호가 주변에 떠 있는 나노드론을 모두 부수었다.
“형님!”
다시 스킬 발동을 멈춘 유은호가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이번 일 끝내면 오징어나 먹으러 가요!”
순간 한만재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것은 팀원들끼리 미리 정해놓은 암호로, ‘감시 당하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끝나면 실컷 먹자.”
한만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무렵, 초홍의 곁을 지키던 신채영의 안색이 변했다.
“이럴 수가…….”
기절한 초홍의 몸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오더니, 감겨 있던 눈에서도 강렬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팀장님이… 또 폭주하는 것 같아요!”
채영의 다급한 외침에 한만재가 고개를 돌렸다.
“뭐?”
어느새 쓰러져 있는 초홍의 몸이 빛처럼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스킬 ‘링크 필드’가 폭주하면, 100미터 주변의 생물들은 육체가 마비되거나 혹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이상 행동을 시작한다.
“빨리 기절시켜!”
한만재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신채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안 돼요.”
굳어 있는 몸을 보니 신채영은 벌써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은호가 소리쳤다.
“제가 할게요!”
그 순간, 초홍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강해졌다.
그 빛을 바라본 유은호의 몸도 서서히 마비되었다. 초홍의 관자놀이에서 손이 멈춰 있는 상태로.
“으윽!”
신음성을 낸 초홍의 눈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광채가 마침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무렵.
“마화열극지!”
치이이익.
허공에 녹광이 번뜩이는 불줄기가 그어지더니, 주변을 날아다니던 라르바 무리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졌다.
동시에 붉은 그림자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천마였다.
“어쩔 수 없군. 본좌의 심령까지 파고들려 하니.”
초홍의 스킬 폭주로 인해, 그 영향력이 천마의 심령까지 도달해 있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직 제대로 힘을 다룰 줄 모르는군.”
초홍을 내려다보던 천마가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날렸다.
팍팍 소리와 함께 혈도를 짚인 초홍의 몸에선 흘러나오는 빛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마비되었던 유은호와 신채영의 몸이 거뜬해졌다.
“천마 님!”
마비가 풀린 유은호가 반갑게 외칠 무렵.
지잉.
짧은 진동음과 함께 천마의 몸뚱이가 십여 미터 밖으로 쭈욱 밀려났다.
어느새 돌아온 불가사리가 외눈박이들을 조종해 초고열의 입자광선포를 쏘아낸 것이다.
치이이이.
몸을 숙인 천마가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는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금강지체에 이르렀다고 하나, 쇠도 물처럼 녹일 수 있는 불줄기에 맞아도 끄떡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흠.”
하지만 천마의 가슴팍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천마가 입고 있던 광마혈투의가 초고열의 빛을 튕겨낸 것이다.
“상당한 열기군.”
광마혈투의는 어지간한 외부의 힘은 모두 튕겨내 줄 뿐만 아니라, 손상이 되면 자체적으로 형태를 수복한다.
마치 이 세계에 있는 우리옷처럼 말이다.
“흥.”
웃음을 띤 천마가 가슴을 탁탁 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불가사리 형태의 몬스터와 외눈박이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감히 본좌에게 암습을 시도하다니.”
순간, 천마의 눈동자에선 지옥의 불길과도 같은 혈염광휘가 치솟았다.
“저, 저기 천마 씨. 이곳은 위험하니…….”
그 모습을 본 한만재가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천마가 손을 휙 저었다.
“가라. 이곳은 본좌가 처리할 터이니.”
한만재는 민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비가 풀렸다지만 유은호와 신채영은 지쳐 있고, 초홍은 아직도 의식이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뒷정리를 천마에게 맡기는 것이 나은 판단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한만재는 초홍을 안아 들고 신속하게 퇴각했다.
천마를 바라보던 유은호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천마 님.”
옆에 있던 신채영은 천마를 빤히 바라보다 몸을 홱 돌려 사라졌다.
“저저, 인사도 안 하고.”
신채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입을 삐죽이던 유은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담에 봬요.”
유은호마저 떠나자 공터의 하늘에는 라르바들이, 땅에는 불가사리와 외눈박이들이 남아있었다.
놀랍게도 불가사리 몬스터는 천마의 위용을 보고도 도망가기는커녕, 더욱 전의를 불태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천마 님. 사실 저는 지금까지 저 외눈박이 몬스터들이, 재구축된 스터디룸 던전이 천마 님에게 복수를 하려는 계획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엉뚱한 무명의 말에 천마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던전? 저 건물이 복수를 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일각에선 던전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의견이 있거든요. 던전 내에서 서식하는 수많은 몬스터와 재료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사라지면 다시 재구축…….]
점차 목소리를 낮게 흘리던 무명이 다시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활동과 꼭 닮아 있지 않습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군.”
천마도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의 말은 허황된 것 같지만, 늘 일리가 있었고 이치에도 맞았다.
[하지만… 오늘 일은 던전의 복수 따윈 아닌 것 같군요.]
천마는 황당한 눈으로 무명을 내려다보았다.
실컷 던전에 대한 의견을 설파하던 녀석이 갑자기 그게 아닌 것 같다니?
[아, 던전에 관한 건 예전부터 천마 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고요. 지금 상황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천마의 짙은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그냥 감입니다.]
“본좌를 흉내 내고 싶었나.”
천마가 코웃음을 치자 무명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누군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고, 천마 님께서는 그저 우연히 이 상황에 끼어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천마는 외눈박이 무리들, 뒤에 버티고 있는 불사리 모양의 거대한 몬스터를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웃기는군. 이런 짓을 해서 얻는 이익이 뭐란 말이냐.”
코웃음 치는 천마의 목소리에 무명이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겠죠.]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천마의 눈엔 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천마가 모르는 비밀들과 법칙이 있다. 아직 생김새도 모르는 마물들이 수없이 쌓여 있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한 일을 꾸미는 자들도 있었다.
“재밌군.”
천마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을 향해 시꺼먼 손을 뻗는 운명의 손아귀를 느꼈다.
운명. 그것은 아직까진 처리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였다. 천마는 문득 그것을 부수고 싶다는 맹렬한 열망이 샘솟았다.
-쿠우우우!
-투르르르릇!
어느새 시뻘건 불줄기와 라르바들이 미사일처럼 쏟아졌다.
천마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뜨거운 열망과 열기를 두 주먹에 담았다.
파앙!
폭발음과 함께 천마의 두 주먹이 강렬한 힘에 의해 붉게 타올랐다.
“자, 오너라!”
그 힘은 내공도, 천마대능력도 아닌 순수한 싸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 * *
오늘은 특수대응팀의 회식 날.
하지만 출퇴근이 따로 없으며, 일터와 보금자리가 일체가 된 탓에, 회식 역시 대부분 빌라 안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배달 왔습니다.”
십 분 간격으로 배달용 차량이 빌라 앞에 도착하고, 그때마다 두툼한 음식 봉투를 내려두었다.
유은호가 초홍의 법인카드로 온갖 오징어 요리를 배달시킨 것이다.
“젠장. 사실 나 오징어 싫어하는데.”
빌라 앞에서 음식 봉투를 받아들던 유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징어’라는 암호를 들키지 않기 위해, 그 암호를 사용하는 날엔 어김없이 오징어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은호야, 뭘 이렇게 많이 시켰냐? 잔치라도 하게?”
빌라 앞 평상에 앉아 있던 한만재는 배달된 음식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오징어 통찜, 회, 무침, 부침개 등등…. 오징어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모조리 시킨 것 같다.
“이 정도는 시켜야죠. 양이 크실 것 같은데.”
“양이 크시다니? 누가?”
유은호는 씩 웃으며 낡은 건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하얀 이불이 걸려 있는 옥탑방이 보였다.
“오징어를 좋아하셔야 할 텐데요. 괜히 주고도 욕먹는 거 아닌지 몰라.”
“차라리 다음에 회식 한번 하는 게 낫지 않겠냐? 팀장님 일하시는 곳 단골이라며?”
한만재가 자연스럽게 대꾸하자 초홍의 안색이 변했다.
“됐어요. 저 양반이 얼마나 말술인데.”
“네?”
“거기다 왔다 하면 그 비싼 삼복구만 마셔댄다고요. 밥 한번 잘못 샀다가 자칫하면 1년치 회식비가 나올 수도 있을걸요.”
“그래요? 그래도 한번 꼭 해야죠. 뭐, 우리 사비를 털어서라도요.”
한만재의 말에 유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 아!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밥을 한번 같이할 텐데요.”
“뭐 따로 좋아하는 게 있겠어? 얼굴만 보면 돌도 씹어 먹겠더만.”
“어? 형님. 그 말 나중에 천마 님한테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자 초홍이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어이구. 은호 넌 그저 입만 열면 천마 님, 천마 님. 속도 없냐?”
어느새 특수대응팀은 천마라는 주제가 나오면 스스럼없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동네 반상회처럼 시끌시끌 떠드는 팀원들 모습을 바라보던 신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홍어, 잘 먹더라고요.”
“어?”
그 말에 초홍과 유은호, 한만재가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끝까지 천마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신채영. 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천마의 회식 참여를 승낙한다는 뜻이 아닌가?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실수였을까? 아니면 내심으론 천마를 인정한 걸까?
몸을 홱 돌려 빌라 안으로 들어가는 신채영을 바라보던 팀원들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