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던전 소풍 (3)
콰앙!
몬스터를 향해 천마가 주먹을 휘두르자, 또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고 폭음 소리가 퍼져나갔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멀리서 폭음이 터져 나오자, 황장훈이 두려움에 떨며 소리쳤다.
“호조야. 또 몬스터가 있나 봐. 우린 여기서 갇힌 채로 끝난 거야.”
“걱정 마.”
전능시야를 발휘해 천마를 바라보던 한호조가 활짝 웃었다.
“나갈 방법을 찾은 것 같으니까.”
* * *
지하 50미터 부근, 화망지룡(火網地龍)의 서식지.
“권마칠식, 승풍항룡!”
맹렬히 회전하는 천마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붉은 유성이 땅 위를 뚫고 솟구쳤다.
“꽤나 질긴 녀석이었군.”
천마의 발아래에는 몸체가 30미터는 넘어 보이는 몬스터가 쓰러져 있었다.
바로 깊은 땅속에 서식하는 생물들을 몬스터로 변화시킨다는, 악룡(惡龍) 화망지룡이었다.
[일전에 설녀 님의 발아래서 잡았던 것과는 매우 다르군요.]
화망지룡의 거대한 시체를 유심히 살피던 무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기는 이번 개체가 더 작은데… 일전의 것보다 두 배는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것이 암놈일 게다. 대부분 영물들은 암컷이 더 강하니까.”
위잉위잉.
천마의 말에 무명이 둥그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낱 몬스터도 제 짝이 있는데… 천마 님의 짝은 어디 있을까요.]
활활 타오르는 천마의 붉은 눈빛과 마주친 무명은 있지도 않은 입을 황급히 가렸다.
[죄송합니다. 언어 시스템에 오류가 있었나 봅니다.]
“이상하군.”
[왜 그러십니까]
“뭔가 시선이 느껴지지 않나.”
[시선이요?]
사방이 막혀 있는 땅속을 바라보던 무명이 센서를 확장시켰다.
[너무 자의식 과잉이 아닙니까.]
“그게 뭐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겁니다.]
천마는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확실하다. 누군가 본좌를 주시하고 있다. 매우 또렷하게.”
[설마요. 이 아무도 없는 수십 미터 땅속에서 천마 님을 보는 시선이 있다뇨. 있다면 그야말로…….]
천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자 무명은 입을 꾹 다물었다.
둥그런 무명의 머리통을 바라보던 천마는 쯧 소리를 내었다.
“하긴, 네놈은 쇳덩어리로 된 머리통을 하고 있으니… 느낄 수 없겠지.”
[정말 천마 님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고요?]
무명의 말을 무시한 천마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희미하게 느껴졌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천마는 다시 한번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렸다.
파앙!
육체의 능력이 몇 배로 활성화되자, 천마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순간, 100미터 부근에서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뚜렷한 파장을 포착했다.
“어떤 쥐새끼냐!”
벼락같은 노성을 지른 천마가 진기가 응축된 오른팔을 내밀었다.
콰우우우우!
순간 팔뚝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더니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권마칠식, 망아동쇄!”
천마의 오른팔에서 쏟아진 나선형의 빛이 정면의 암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르!
“거기냐!”
텅 빈 구멍을 노려보던 천마가 왼손을 내뻗자, 강력한 허공섭물이 발휘되었다.
“어어어어?”
순간 낮은 비명과 함께 구멍에서 작은 무언가가 쏙 튀어나왔다.
바로 맞은편 연못에 있던 황장훈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천마의 흡자결에 빨려 들어온 황장훈이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발아래 붉은 눈을 번뜩이는 도깨비와 같은 거구의 사내, 천마를 보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으아아! 몬스터야!”
황장훈이 허공에서 버둥거리자, 천마는 무명을 향해 말했다.
“이건 또 뭐냐? 몬스터냐?”
“장훈아!”
그때 천마가 뚫어놓은 구멍에서 작은 그림자 두 명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바로 한호조와 이진솔이었다.
“으아아아! 호조야! 살려줘!”
“꺅? 몬스터잖아?”
이진솔도 울먹이더니 한호조의 등 뒤로 숨었다. 뛰어나온 아이들을 발견한 천마는 짙은 눈썹을 모았다.
* * *
한호조는 무사히 귀가했다.
-한 번만 더 징징거리면 엉덩이를 한 개로 만들어주겠다.
송곳니를 드러낸 채 혈염광휘를 내뿜는 천마가 내뱉은 말이다.
그 한마디로 황장훈과 이진솔은 단번에 기절했다. 천마는 어쩔 수 없이 한호조를 포함한 아이들을 지상으로 올려 보내주었다.
지상으로 올라가자 이미 과수원 던전은 엉망이 되었고, 세 명의 초등학생이 가진 휴대폰은 모두 망가진 상태였다.
[학교 관계자들은 모두 퇴거했지만…….]
한호조에게 사정을 들은 무명이 통신망을 이용해 위치 검색을 시도했다.
[한호조 군의 아버지가 던전에 진입했군요. 지금 이곳으로 오는 것 같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무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엉망이 된 과수원 던전 안으로 유은호와 한만재가 동시에 도착했다.
“당신은!”
한만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늘 과수원 던전에 나타난 히든몬스터 때문에 한호조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그런데 왜 천마와 자신의 아들이 함께 있단 말인가?
“설마, 천마 씨. 당신이 히든몬스터를 부른 겁니까?”
한만재가 소리치다가, 순간 헛 하는 소리를 내었다. 천마의 뒤에 가려져 있던 한호조와 아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아빠!”
“호조야!”
얼싸안은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자 무명이 말했다.
[천마 님께서 땅속에 갇힌 아이들을 발견하셨습니다.]
공치사를 좋아하는 무명이기에, 보통이라면 ‘구했다’ 등의 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천마를 추적한 화망지룡에 의해 과수원 던전이 난장판이 되었다.
무명은 천마와 달리 양심이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기에, 차마 그 말은 쓰지 못했다.
[천마 님께서도 히든몬스터를 우연히 발견하셨습니다.]
무명을 집어 올린 천마가 묵묵히 몸을 돌렸다.
“그럼 본좌는 가겠다.”
그러자 부들부들 떨고 있던 한만재가 천마의 앞을 막아섰다.
“천마 씨.”
천마를 바라보던 한만재는 허리가 부서져라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사내는 도저히,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이자는 결코 미등록 각성자가 따위가 아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들을 두 번이나 구해준 천사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천마뿐만 아니라 특수대응팀의 운명을 바꿀, 중대한 결심이었으나,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천마 님.”
뒤에 서 있던 유은호도 코끝을 쓰윽 훔치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흠.”
아무 대답 없이 우뚝 서 있던 천마는 이내 신법을 펼쳐 사라졌다.
‘구해준 게 아니다.’라는 말을 꾹 삼킨 채.
* * *
한호조 등은 다시 평화로운 생활로 돌아왔다.
물론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한동안 학교와 협회에선 난리도 아니었다.
-도망가다 보니 얼레나무에 갇혀 있었어요.
하지만 과수원 화원의 식물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한호조가 대충 둘러대었다.
거대 얼레나무 속에 들어 있는 액체는 사람에게 환각을 보여준다. 게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나뭇가지로 꽁꽁 묶어버리니, 휴대폰이 박살 난 것도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협회나 학교는 던전 관리에 소홀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협회 각성자인 한호조의 아버지, 한만재가 가장 먼저 발견한 탓에 이 일은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호조야. 오늘 끝나고 뭐 해?”
하지만 황장훈의 태도는 그날 이후, 180도로 달라져 있었다.
“오늘 나랑 떡볶이 먹으러 가자.”
늘 장난만 치던 황장훈은 이제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생각 없는데.”
“아! 실수!”
한호조가 손을 젓자 황장훈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미래의 협회장님께서 떡볶이 따위를 먹겠습니까. 같이 돈까스나 한 접시 하시죠.”
잽싸게 다가온 황장훈이 생글생글 웃으며 두 손을 비볐다.
“대신 나중에 꼭 저도 협회에 취직시켜 줘야 합니다.”
“야아, 무슨 소리야.”
“에이, 아버님께서 3급 각성자라면서요.”
“근데?”
“그럼 호조 님께서도, 나중에 협회에 요직으로 들어갈 거 아니십니까요.”
“무슨 헛소리야.”
한호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가방을 들자 황장훈이 잽싸게 뺏었다.
“이런 건 제게 맡기시죠. 헤헤.”
“장훈아. 그런다고 취직이 될 거 같아?”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이진솔이 픽 웃으며 핀잔을 주자 황장훈이 발끈하며 말했다.
“흥, 나중에 협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울면서 후회하지 말라고.”
“난 필요 없어.”
고개를 새침하게 돌린 이진솔이 차갑게 말했다.
“난 어차피 호조랑 결혼할 거니까.”
“뭐, 뭐?”
한호조가 펄쩍 뛰자, 황장훈도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벌렸다.
“진솔이, 네가 호조랑…….”
심각하게 고민하던 황장훈이 ‘가능성이 있어’라는 말과 함께 눈을 번뜩였다.
“그럼, 사모님도 같이 가시죠. 헤헤.”
“좋아. 그럼 난 스파게티 먹을 거야.”
“헤헤. 물론입니다.”
도도하게 걷는 이진솔과 두 손을 싹싹 비벼대며 걸어가는 황장훈을 바라보던 한호조는 눈을 감았다.
* * *
한가한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운공을 마친 천마는 교자상 앞에 단정히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최근 천마가 가장 즐겨보는 ‘세기의 미스터리’라는 오락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루미나티는 정치인, 군대, 과학자, 유명인 등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세계의 정치·경제를 조종하는 비밀결사 조직으로…….
적절한 음악 배치와 성우의 긴박감 있는 설명이 이어진다.
사실상 에피소드 자체는 초등학생도 비웃을 만한 허술한 음모론에 관한 것이었으나, 천마는 더없이 흥미진진하게 시청하고 있었다.
땡그랑.
그런데 바깥에서 양은 냄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찌그러졌다. 새 건데.”
“거봐, 형이 들어준다고 했잖아?”
천마는 애써 신경을 끄려 했지만, 귓바퀴 안으로 자꾸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괜찮을까요? 갑자기 찾아오면 싫어하실 거 같은데.”
“괜찮아. 이런 건 어른들도 좋아한다고.”
TV 화면에 집중하던 천마는 참다못해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뭐냐.”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천마의 눈앞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는 한호조와 유은호가 나란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천마의 물음에 한호조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안, 안녕하세요?”
“무슨 볼일이냐 물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유은호가 웃으며 말했다.
“천마 님. 혹시… 달고나 좋아하세요?”
“그게 뭐냐.”
“아, 맞다. 천마 님은 외국에서 오셨죠. 달고나는 그러니까, 우리나라 전통 간식… 은 아니고 꽤 유서 깊은… 음, 그러니까…….”
유은호가 들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설명하려는 찰나, 무명이 떼굴떼굴 굴러 나왔다.
[설탕과 베이킹소다를 섞은 것을 불로 가열하여 만드는 아이들 간식입니다. 일종의 즉석 사탕이라고나 할까요?]
“즉석 사탕?”
천마가 눈썹을 찌푸리자 유은호가 보따리 속에서 가스버너와 국자를 꺼내 들었다.
“한번 해보실래요? 이게 은근히 맛있고 또 뽑기 하는 게 꽤 재밌거든요.”
천마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한호조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구봉산 맛과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이게 약간 태우면 그 맛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또 천마 아저씨가 뽑기도 좋아할 것 같아서요.”
속삭이듯 말하는 한호조가 천마는 몹시 성가시게 느껴졌다.
TV에선 일루미나티라는 비밀결사의 조직에 대해 한창 설명 중이다. 이딴 간식 놀이를 할 겨를이 없다.
“관심 없다.”
탁. 천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무명은 닫히는 문틈 사이로, 생기 넘치던 한호조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짐을 느꼈다.
[천마 님. 한호조 군의 성의도 있는데, 잠깐이라도 같이 해보시죠. 만드는 게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무명이 앙상한 손을 모으며 말했지만, 천마는 손을 휘저었다.
“관심 없다.”
하긴 그렇다. 한호조의 다리가 부러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천마다.
갑자기 들이닥쳐 달고나를 같이 만들자니,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요구다.
[제 생각입니다만… 한호조 군은 일전에 천마 님이 구해준 걸 보답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달고나라는 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식문화라고 할까요? 요새 다시 유행하는 복고풍의 간식을 소개해 주고 싶었던 것…….]
“시끄럽다. 중요한 부분이다. 말 시키지 마라.”
팔짱을 낀 채 매우 진지한 얼굴로 TV를 보는 천마를 보며, 무명이 팔다리를 쑥 뽑아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현관문 밖으로 나가, 아직도 서 있는 유은호와 한호조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한호조 군. 천마 님께서 애청하는 프로가 방영 중이라서요. 괜찮으시면 다음 기회에 하시는 게 어떨까요?]
“네에.”
한호조가 눈물을 글썽이자, 유은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것 봐. 갑자기 찾아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다음에 내가 다시 약속 잡아줄게.”
“알겠어요.”
TV를 보는 천마의 귓가엔 한호조의 실망 섞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지만, 그의 표정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