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무명의 고단한 하루
나노봇의 주 임무는 단순하다.
사용자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할 것.
하지만 무명의 주 임무는 조금 달랐다.
-천마 님의 돌발적, 즉흥적 행동을 막을 것.
-던전에 들어온 각성자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게 할 것.
최근 일 갑자의 내공을 되찾는 천마.
그 때문인지, 최근 천마는 초창기 던전을 방문했을 때처럼 다시 폭주하기 시작했다.
던전에서 몬스터와 한번 마주치면 끝까지, 집요하게, 보이는 대로 때려잡으려 하는 것이다.
우르르르릉.
그럴 때마다 재구축에 들어간 던전은 진동 소리와 함께 땅으로 가라앉거나 딱딱한 큐브 모양으로 변했다.
[천마 님. 던전은 천마 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다른 각성자나, 혹은 자원이나 재료를 채취하려는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재구축 되는 던전을 바라보며 무명은 늘 이렇게 조언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야멸차기 짝이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자들이다. 생각할 필요가 있나.”
도덕과 윤리 따윈 개나 줘버린 천마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무명은 연산 회로가 불에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천마의 폭주를 반드시 말려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무슨 액운이라도 꼈는지 천마가 몬스터에 손을 댈 때마다, 걸핏하면 히든몬스터가 출현한다는 점이었다.
“으아악!”
세이프던전 지역 2.5킬로미터 지점의 휴게소, ‘구름다리.’
어느 폐건물 옥상 위에 서 있던 무명은 아수라장이 된 휴게소 부근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엔 천마가 출현시킨 위험도 3만의 히든몬스터, ‘염파(炎波) 도롱뇽’이 광란의 불쇼를 펼치고 있었다.
화르르륵.
염파 도롱뇽의 입에서 불꽃이 쏟아질 때마다, 휴게소에 펼쳐진 에너지 필드가 녹아내렸고, 건물이 무너졌고, 집기들이 불타올랐다.
천마는 잡기 귀찮거나 까다로운 히든몬스터가 있으면 이렇게 늘 휴게소 근처로 유도했다.
그러곤 놀란 각성자들이 뛰어나와 히든몬스터를 상대할 때까지, 휴게소를 은밀히 빙글빙글 돌았다.
바로 던전 생활 초창기, 무명이 가르쳐 준 ‘히든몬스터 떠넘기기’ 전법이었다.
[천마 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뭉치 몬스터를 굳이 쓸어버려야 했습니까.]
활활 타오르는 휴게소 풍경을 내려다보던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잡아봤자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히든몬스터가 출현할 수 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잖습니까.]
염파 도롱뇽의 출현 조건은 B급 던전, ‘보온병’에 서식하는 몬스터 ‘불뭉치’를 ‘일격에 얼리는 것’이었다.
보통 각성자라면 완수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천마는 한령빙백신공을 이용해 단박에 얼리고, 염파 도롱뇽를 출현시켰다.
“모처럼 몸을 좀 풀어본 것뿐이다.”
[…….]
“아아, 간만에 진기만을 이용해 무공을 펼치니 상쾌하군. 기왕 나왔으니 다른 던전에 가서 몸을 한 번 더 푸는 것이 좋겠다.”
순간, 무명의 눈에는 던전 내의 모든 휴게소가 아비규환으로 변해 불타오르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자꾸 이런 짓을 하다간 휴게소가 무너지고, 던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질 거란 말입니다!
생각 같아선 멱살을 틀어쥔 채 버럭 소리치고 싶지만, 무명은 나노봇이다.
이성을 잃고 소리를 친다는 건, 나노봇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천마 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다시 히든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고요.]
무명이 에둘러 회유하려 했으나 천마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던전 내에 휴게소는 상당히 많지 않나.”
그제야 무명은 깨달았다.
천마는 일반적인 각성자가 아니다.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논리로는 대화를 할 수 없는 광인(狂人)에 가까운 인물인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무명은 다시 연산을 시작했다. 천마를 회유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천마 님. 오늘 저녁엔 천마 님께서 좋아하는 <각성자만 할 수 있는 운전 스킬!> 5부가 방영될 예정입니다.]
“그 프로는 이제 질렸다. 더 이상 배울 기술 따윈 없다.”
[너무 늦으면 장채원 님께서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레 시공 업무가 생길 수도 있고요.]
“오늘은 김 씨와 회색 눈깔이 모두 매장에 있는 날이다. 알아서 잘 하겠지.”
무명은 파르르 떨리는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위급 상황 시 전류를 방출해 몬스터를 기절시키는 일렉트릭 건을 뽑아, 천마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었다.
[너, 너무 늦게까지 던전에 있다 보면 퇴근이 늦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시 이성을 찾은 무명이 다시 말했다.
[퇴근이 늦어지면 엄마손 백반집도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마 님께서 끼니를 거르실 수도 있습니다. 끼니를 거르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나라가 무너지고…….]
정신줄을 놓고 떠들던 무명은, 문득 천마가 구미가 당길 만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 생각해 보니 일전에 김찬원 님께서 주신 마트 상품권의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직 10만 원어치나 남았으니 오늘은 대형 마트에 잠시 들러보는 게 어떨까요?]
“마트?”
[그렇습니다. 다양한 식재료부터 생활용품까지, 없는 게 없는 상점입니다. 마침, 제
에 연결되는 케이블도 상태가 안 좋고요.]
“흠.”
무명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제발 더 헛소리는 하지 말고 귀환해 주세요. 더 이상 휴게소를 운영하는 협회 각성자들의 보험 배상 한도를 걱정하지 않도록요!
“알겠다. 돌아가지.”
해냈다! 마침내 저 고집불통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당하지 못한 무명이 두 다리를 발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았다.
제가 해냈습니다. 던전 내 각성자 여러분! 이제 안심하세요!
“뭘 하는 거냐.”
천마의 물음에, 마음속으로 기쁨의 세리머니를 하고 있던 무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귀환 경로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 * *
도심 번화가에 위치한 대형 마트.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마트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1층에 라마스를 주차한 천마가 건물 내부로 들어오자, 식당가와 의류 매장 코너가 보였다.
“필요한 물건이 있는 곳이 어디냐.”
[3층의 가전 매장입니다.]
“안내하라.”
[천마 님. 마트 내부는 사람이 많아 길 안내에 사용되는 유도선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음성 안내에 따라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알겠다.”
[먼저 앞으로 쭉 가셔서 모퉁이가 보이면 우측으로 꺾어주십시오.]
무명은 천마가 내부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도록, 일부러 마트 내부 한 바퀴를 삥 둘러 위층으로 올라가는 경로를 안내해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몇은 천마의 얼굴을 보며 흠칫 놀랐으나, 어깨에 매달린 무명을 보고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독특한 옷을 즐겨 입는 각성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2층은 식료품과 잡화 등이 입점해 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는…….]
천마가 이동하는 동안 무명은 열심히 마트 내부를 안내했다.
“신기하군.”
생각해 보면, 무명과 전통시장은 많이 다녀봤지만 대형 마트에 온 적은 처음이다.
천마의 눈동자에서 흥미 가득한 빛이 떠오르자 무명은 더욱 신이 나서 설명했다.
[3층은 가전 매장입니다. 물론 전문 가전 매장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곳에도 생활 필수 가전들은 모두…….]
콰쾅!
갑자기 폭음이 들려오더니, 천마가 타고 있던 에스컬레이터가 동작을 멈추었다.
지지직.
내부를 밝히던 조명들이 순식간에 꺼지며 내부가 암흑으로 뒤덮이자, 쿠웅 소리와 함께 예비 발전기가 가동되었다.
“고장이 난 건가.”
비상 조명 사이로 웅성대는 사람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무렵, 지지직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반(反)각성자 연합, 스카우터다. 이 마트엔 폭약이 설치되어 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폭약을 하나씩 터뜨리겠다!
“저건 또 무슨 소리냐.”
[각성자들의 활동을 반대하는 과격 무장 단체입니다. 각성자들이 영리 활동을 금지하고 오직 공익 목적으로만 그 힘과 능력을 기용하길 요구하는 곳이죠.]
“그렇군.”
천마가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코를 후비자 무명은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 지금 저들은 매장 밖으로 나가면 폭발물을 터뜨려 사람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하는 중입니다.]
“폭발물? 일전의 부비스톤 같은 건가.”
[그럴 리가요. 부비스톤 같은 건 절대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그전과 같은 양을 저장하는 곳은 군부대 정도밖에 없겠죠.]
“그럼 뭘로 터뜨린다는 거냐.”
[‘설치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플라스틱 폭탄 같은, 복합 폭발 물질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천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재미없는 짓거릴 하는군.”
그리고 멈춰 버린 에스컬레이터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서 3층 매장으로 올라갔다.
“필요한 게 어떤 거냐. 빨리 사도록 하지.”
순간 무명의 회로는 또다시 작동을 멈추었다.
천마는 과격 단체가 마트를 점거하든 말든, 폭탄을 터뜨리든 말든, 물건이나 사고 빨리 집에 돌아가려는 것이다.
[천마 님. 방금 제 설명을 못 들으셨는지요.]
“들었다.”
[한 사람이라도 나가면 마트를 폭발시키겠다는데요.]
“본좌는 천마다.”
[아.]
“어지간한 폭발 따윈 그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는 정도지.”
몸통에서 팔을 발출한 무명은 가느다란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일렉트릭 건…….]
엄청난 전류를 쏟아내는 일렉트릭 건을 뽑아 헛소리를 하는 천마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다. 하지만 그럴 만한 힘도, 능력도 없는 꼬막손이다.
“어떤 거냐.”
3층에 올라간 천마는 가전 매장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필요하다는 물건 말이다.”
무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충전 케이블이 있는 곳을 가리키면 그걸 집고 바로 나가버릴 테니까.
휘이이이잉.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천마의 태도에, 무명의 연산 회로는 또다시 지옥불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상, 상품을 검색 중입니다.]
저 과격 무장 단체는 한다면 하는, 정신 나간 놈들이다.
협회에서 사람을 보내기까지는 최소 15분 이상. 설령 지금 천마가 나선다고 해도, 폭발물을 해체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없는 거냐.”
천마의 재촉에 무명의 연산 회로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 때마침 인기리에 종영된 <나의 어사님> 뒷이야기가 방영될 시간이군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전 매장 정면에 있는 대형 TV를 조작하는 것이었다.
[오늘 방영될 내용은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방송에는 미처 방영되지 않았던 부분을 보여줄 텐데요. 줄곧 어사의 신분을 숨기고 있던 남주인공이 마침내 여주인공에게 마패를 보여주는 씬이 방영될 예정입니다.]
천마의 흥미를 끌기 위해 무명은 변사(辯士), 그러니까 신작 영화를 리뷰해 주는 리뷰어처럼 드라마 내용을 신나게 설명했다.
“…….”
바닥에 엎드린 채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황당한 시선을 보냈다.
그 집요한 시선을 애써 피한 무명은 열심히 떠들어댔다. 오직 이 방법만이 마트 안의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길일 테니.
“당신, 각성자 아냐?”
무명이 한창 TV를 바라보며 설명할 무렵, 한 중년 남성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맞네. 나노봇 들고 있는 걸 보니 각성자 맞구만.”
남성은 TV를 바라보는 천마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여기서 TV를 볼 게 아니라, 빨리 폭탄이라도 제거하든가 테러리스트를 잡든가 해야 할 거 아냐?”
불가능한 말이다.
설령 마트에 1급 각성자 수십 명이 있다고 해도, 전자기파 조작 스킬이 없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순 없다.
특히나 저 과격 무장 단체는 각성자들의 약점이나 행동 양식을 꿰고 있다. 그 누구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즉시 폭탄을 터뜨릴 것이다.
[협회에는 이미 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곧 기폭장치를 무력화하는 전자기파 조작 스킬 1급 각성자들이 이곳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무명은 기계적인 목소리를 내어 차분히 설명했지만, 남성은 짜증스럽게 툴툴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뭔가 도울 생각을 해야지. 여기서 한가롭게 TV를 보는 게 말이 돼?”
염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이 중년 남성은 본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주변인에게 온갖 민폐를 끼치며 희생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당신 같은 각성자들 때문에 저런 각성자 반대 단체들이 행동하는 거야. 던전에 들어갈 때나 열심히 하지, 사람들을 돕는 데는 도통 능력을 발휘하는 적이 없잖아?”
열심히 TV를 보던 천마 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밥을 먹으려고 하는 순간, 그릇 위에 올라온 파리를 본 듯한 표정이다.
계속 나불대다간 천마의 손에 의해 뚝배기가 두 조각이 날 수도 있다.
[실례하겠습니다.]
번개처럼 남성의 등 뒤로 다가간 무명이 몸통에서 파란빛이 도는 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줄곧 꺼내고 싶었던 무명의 호신 무기, 일렉트릭 건이다.
지지직.
“끄으으.”
30만 볼트의 전류에 노출된 중년 남성은 입에 거품을 물고 그대로 기절했다.
30만 볼트라고 하지만 실제로 흐르는 전류는 10암페어 미만. 게다가 아주 잠깐 동안이었기에 사람에게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사용하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는데.’
기절한 남성을 바라보던 무명은 남몰래 두 손을 합장했다.
“흠.”
남성이 기절하든 말든 천마의 시선은 TV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광고만 나올 뿐 본 방송이 시작하지 않자, 천마는 결단을 내렸다.
“그냥 집에 돌아가서 보는 게 낫겠군.”
천마의 중얼거림에 무명의 눈 센서가 크게 번뜩였다.
[천마 님! 이건 스포일러, 그러니까 이번 뒷이야기의 핵심 줄거리인데 말입니다.]
목청을 가다듬은 무명은 갑자기 드라마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오늘 미방영분 내용의 핵심은 남주인공이 보여줄 마패가 위조품이라고 합니다. 저잣거리에 나갔다가 소매치기를 당했거든요. 그 때문에 여주인공에게 마패를 보여주었다가 오히려 몽둥이찜질을 당합니다.]
열심히 방영될 내용을 설명했지만, 결국 얼마 안 가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방송국에 있는 컴퓨터를 해킹해 다른 드라마 대본이라도 찾아 읽어줘야 할 판이다.
쿠쿵.
그때, 낮은 진동음과 함께 마트의 조명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스피커에서 맑은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폭발물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마트에 계신 고객님들은 안전에 유의하시어, 밖으로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끝난 건가.
무명의 예상보다 5분이나 더 빨리 상황이 종료되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마트 밖으로 빠져나왔지만, 천마는 여전히 매대에 선 채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무 감정이 없는 차갑고 단단한 기계 인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안 되는 건가? 아니야. 지금까지 천마 님께선 종종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셨잖아?
무명은 줄곧 생각했다.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타인에게 무감각한 천마의 쇳덩이 같은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세상 무심한 천마의 행동을 보고 나니, 왠지 자신감이 떨어져 버렸다.
“으음.”
그때, 천마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선을 돌리니, 화면 속에서 여주가 감정을 누른 채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모조품 마패라는 것이 들통난 탓에 보란 듯이 남자 주인공을 두들겨 팼지만, 그것은 거짓된 행동.
행여라도 남자 주인공에게 이끌린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장면이었다.
“솔직하지 못하군.”
화면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반짝임이었다.
[아니, 분명 가능성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천마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무명이 힘차게 대답했다.
[천마 님.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해내 보이겠습니다.]
사고를 안 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매일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천마 님도 변화될 거야.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고장 난 거냐?”
천마가 인상을 쓰자 무명은 눈 센서를 반짝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마 님의 돌발적, 즉흥적 행동을 막을 것.
-던전에 들어온 각성자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게 할 것.
오늘도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한 무명의 고단한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