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천마, 동원과 술을 마시다 (2)
“의미를 모르겠군.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많다면, 애당초 관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닌가.”
“많건 적건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역시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의문 가득한 천마의 시선을 받은 동원이 술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저야 뭐 힘없는 말단 공무원이라, 천마 님께서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드릴 순 없습니다만… 단순히 관여를 한다, 안 한다의 문제는 아닙니다.”
알쏭달쏭한 대답에 천마는 오히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인간과 요괴, 신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에게 극도로 무심하다.
무학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현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던 천마. 그에겐 이 세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알든 모르든, 많든 적든 달라지는 것도 없고요.”
“그것은 ‘세계의 법칙’을 말하는 건가.”
천마에게 속내를 들킨 듯한 동원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소주잔을 쭉 들이켠 동원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답답한 이야기만 늘어놓았군요. 이러려고 청한 자리는 아니었는데.”
“상관없다. 술자리란 모든 근심을 털어버리는 자리니까.”
“천마 님께선 원래 계시던 곳에서도 술을 자주 즐기셨나 봅니다.”
“주객(酒客)이 어디 따로 있겠나.”
“그렇군요. 그럼 한잔 더 하시죠.”
동원은 흥이 나는지 웃으며 소주병을 들었다.
“좋은 사람과 만나 술 한잔 들이켜는 건, 보약을 먹는 것보다 더 몸에 좋은 일이라고 하더군요.”
천마의 잔을 가득 채워준 동원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천마 님과 밤새 술 한잔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주병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동원은 취기가 올랐는지 하얀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천마는 딱히 내공으로 주독을 태우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멀쩡했다.
“천마 님은 정말 술이 세시군요. 알코올이 몸에 아예 안 듣는 거 아닙니까?”
“글쎄.”
깊은 한숨을 내쉰 동원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술이 많이 약합니다. 그나마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이 는 상태지요.”
“억지로 마실 필요가 있나.”
“하하. 모든 직업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이쪽 세계는 술자리를 가지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죠.”
허공을 응시하는 동원이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술을 마셔보니 장점이 많더군요. 친구나 연인을 사귈 수도 있고, 사람들과 빨리 가까워질 수도 있지요.”
동원은 묵묵히 앉아 있는 천마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천마 님께선 술에 취하시지 않으니, 이러한 장점을 모르시겠군요.”
“취하지 않아야만 알 수 있는 장점도 있지.”
“정말요? 그게 뭡니까.”
“상대방의 속내를 떠보기 쉽다는 것.”
동원의 입가에 있는 미소가 살짝 얼어붙었다.
천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히 말했다.
“아무리 또렷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말실수도 하게 되니까.”
“이 자리가 천마 님의 속을 떠보기 위한 술자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하하하.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구를 바라보던 천마가 동원을 바라보았다.
“영지의 직원이라면, 신조차 생각을 읽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혈염광휘가 맴도는 천마의 눈동자에선 유성과도 같은 빛이 번뜩였다.
“연신 술을 받아 마실 때마다 마음속에 있는 방벽이 해제되는 느낌이 들더군. 소주는 원래 이렇게 독한 술이 아닌데 말야.”
“천마 님.”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말하라. 뭐든 관계없으니.”
동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도 천마를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천마 님.”
정중히 고개를 숙인 동원이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었다.
“이번 부비스톤의 사건으로 신계에선 천마 님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상관없다.”
“아니요. 인간들에게 무관심한 신들이 아닌, 인간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신들 쪽에서 말입니다.”
“어째선가.”
동원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인간이신 천마 님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다는 걸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와 번영이니까요.”
곰곰이 동원의 말을 음미하던 천마가 피식 웃었다.
“웃기는 말이로군. 신이라는 자들이 고작 본좌가 낡은 건물 하나 부쉈다고 호들갑을 떨다니.”
“지금 보이신 것이 천마 님이 가진 능력의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포차 내부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동원이 천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계에선 천마 님의 무한한 잠재력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왜 그런 걸 걱정하지.”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니까요.”
동원은 천마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불안한 존재가 큰 힘을 갖게 된다면, 그리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면… 세계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동원의 말에 천마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천마의 광소(狂笑)는 밤하늘의 구름을 쓸고, 땅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듯했다.
-으하하하하!
“천마 님.”
“정말 웃기는 소리로군.”
웃음을 뚝 끊은 천마가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이런 촌극을 벌인 것이냐. 본좌의 정신머리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얼음장 같은 천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동원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설원에 있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저희 세계에선 천마 님과 같은 힘을 가진 인간은 없었습니다. 천마 님을 경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동원을 빤히 바라보던 천마는 팔짱을 끼며 엉뚱한 말을 했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네?”
“높으신 나으리들에게 휘둘리는 인물이 아니잖나. 자네는.”
“천마 님.”
“진짜 본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
순간 동원의 입가에선 묘한 미소가 터져 나왔다.
천마라는 인간은 자신을 똑바로 봐주고 있다. 무심한 듯하나 언제나 그 사람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다.
“높으신 나으리들에게 휘둘리는 인물이 아니잖나.”
이것은 동원이라는 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실은 휘둘릴 수도 없지만.
“하하.”
동원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신력을 동원해 천마의 정신에 침투하려 했으나 오래전에 실패했다. 오히려 천마가 대화를 이끌며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관찰하고, 떠보고 있는 셈이었다.
‘참으로 무서운 인물이구나.’
천마.
처음에는 그저 다른 세계에서 온 독특한 성격의 무인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무공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마문대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란 존재를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망설이던 동원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이 일로 천마 님뿐만 아니라, 누님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이 됩니다.”
“뭐가 말이냐.”
“천마 님의 등장으로… 누님까지 모난 돌이 될까 봐서요.”
눈을 껌뻑이는 천마를 바라보며 동원이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누님은 영지를 운영하면서 극도로 노출을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마 님 때문에 자꾸 주목을 받는 게 걱정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잔에 담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동원이 천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님께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실까 봐 두렵습니다.”
“과거?”
“그렇습니다.”
쓴웃음을 머금은 동원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천마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사실 누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알고 있다.”
천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채원에겐 천마조차 헤아릴 수 없는, 단순히 강하다든가 하는 힘 외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도의 하늘, 아니.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절대 초인, 천마를 시공자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저는 그저 천마 님의 행보가 누님에게 영향을 끼칠까 두려웠을 뿐입니다.”
“알아듣게 설명하라.”
“실례되는 표현이긴 합니다만, 직설적으로 말해, 천마 님과 누님 모두 폭탄처럼 느껴집니다. 폭발력을 장담할 수 없는 핵폭탄이 나란히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동원의 말에 천마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폭탄 옆의 폭탄이라.”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터지면… 같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두렵습니다. 일전에 미노타우로스 사냥으로 징계받은 사건처럼 말입니다.”
그제야 천마는 동원의 말이 이해가 갔다.
당시 장채원은 천마와 무명을 위해 노골적으로 신계에 대항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 당시 푸른빛에 둘러싸였던 그녀의 모습에, 신들조차 당황하지 않았던가?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다.”
“죄송합니다. 천마 님.”
“괜찮다. 어디 맘 편히 마실 수 있는 술자리가 흔하더냐.”
천마의 말에 뼈가 있음을 느낀 동원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천마 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온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꼭 술 한잔도 하고 싶었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동원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고은진에게 다가가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 부탁드립니다. 일시불로 부탁합니다.”
“저희 포차엔 카드 결제가 불가능하지 말입니다.”
“왜요?”
“카드기가 없으니깐요.”
카드를 내민 동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카드기가 없다고요?”
“네.”
머리를 긁적이는 동원이 어어 하는 소리를 내었다.
“요, 요샌 포차도 다 카드 결제되지 않나요?”
“저흰 없습니다.”
울상을 지은 동원은 지갑을 뒤적였다.
하지만 신계의 공무원이 현금다발 따위를 가지고 다닐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저…….”
“외상은 사절이지 말입니다.”
단호한 고은진의 말에 동원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휴대폰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그때 천마가 나서서 손을 휘저었다.
“이곳은 본좌가 계산할 테니, 가라.”
“아,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괜찮다. 일전에 본좌의 일도 해결해 주고, 얼마 전엔 좋은 신뢰도 주지 않았나.”
“절대로 안 됩니다.”
“다음에 비싼 술을 사면 되잖나.”
한사코 거절하려던 동원이 멈칫했다. 그 말뜻은 다음에 또 한잔하자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되겠군요.”
빙그레 웃은 동원이 천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천마 님, 잘 먹었습니다. 다음엔 꼭 제가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하지.”
동원은 활짝 웃으며 포차 밖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백만 개의 광점이 되어 하늘 위로 사라졌다.
“이거 한잔하시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은진이 소주 한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일반 소주가 아닌, 가격이 제법 나가는 증류식 소주였다.
“이게 뭐냐.”
“서비습니다.”
고은진이 코를 쓱 훔치며 말했다.
“아까 이야기 들었습니다. 부비스톤 화재 사건을 해결한 거… 선임몬이었다는 거 말입니다.”
“해결한 게 아니다.”
“그냥 드십쇼.”
소주병을 턱 두고 돌아간 고은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신계의 공무원이 경계할 정도면, 제법 힘이 대단하신 것 같지 말입니다.”
“글쎄.”
“아까 들어보니 힘을 되찾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천마가 눈을 껌뻑이자 고은진은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엄청 강하잖슴까. 대체 얼마나 잃었길래 그런 겁니까?”
“얼마나.”
천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마나 잃어버렸냐고?”
잃어버린 건 내공뿐이다.
하지만 그 물음을 듣자, 천마는 내공 외에도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말입니다.”
고은진의 말에 천마는 낮은 코웃음을 쳤다.
“삼십분지 일 정도겠군.”
“잘 못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쯤 될 것이다.”
연록 빛으로 물든 증류식 소주병을 딴 천마가 소주잔이 아닌, 글라스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그저 예상일 뿐이다. 본좌의 내공 수위는 오래전에 1,000년을 돌파했으니까.”
고은진은 입을 벌렸다.
내공 수위가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선임몬은 얼마나 강한 겁니까?”
“얼마나 강하냐고?”
알콜 도수가 40도에 달하는 증류식 소주를 단숨에 비운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좌도 모른다.”
탁.
투명한 글라스를 내려놓은 천마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도를 창안하신 신마대제조차 본좌와 같은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무림 역사상 본좌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인물 자체가 없었다.”
무학의 끝자락에 도달한 천마.
그럼에도 여전히 마고에서 책을 뒤적거렸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수많은 책 중에서… 천마가 도달한 경지를 표현한 것이 있을까, 이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좌는 이러한 경지를 무량이라고 명명했지.”
무량(無量:헤아릴 수 없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이른 천마는 자신이 이룩한 새로운 경지를 무량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헤아릴 수 없단 말입니까.”
심각하게 듣고 있던 고은진이 갑자기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취하셨습니까? 선임몬의 허풍은 정말 알아줘야 하지 말입니다.”
“멋대로 생각하라.”
낄낄대며 웃는 고은진을 바라보던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얼마냐.”
“계산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고은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부비스톤 근방엔 제가 좋아하는 맛집이 많았지 말입니다. 그 맛집을 지켜준 약소한 보답이라 생각하십시오.”
보통 사람 같으면 사양이라도 했겠지만,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있는 호의는 거절하지 않는 법이니.
“그랬군. 잘 먹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하라.”
재료를 손질하고 있던 식칼을 내려놓은 고은진이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부터 절대 제 포차에 손님으로 오지 마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