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천마, 동원과 술을 마시다 (1)
월요일 아침.
천마는 반짝반짝 세차를 한 라마스를 타고 복복 인테리어에 출근했다.
“아이고, 우리 도시의 영웅. 천마 님! 출근하셨습니까?”
내당에서 매장으로 출근한 장채원은 양손을 들고 반겼다.
“조금 더 쉬지 그랬어?”
“몸은 다 회복됐다.”
“그래? 어차피 매장도 요새 한가한데.”
장채원이 텅 빈 스케줄표를 슬쩍 가리키자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매장이 한가하다면 더욱 좋지.”
씩 웃은 천마는 인테리어 서적을 잔뜩 가져와 응접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당장이라도 독파해 버릴 기세로.
“그럼 수고하라.”
저녁 무렵. 모든 업무를 마친 천마는 복복 인테리어를 나와 라마스에 올라탔다.
달칵.
키박스에서 금속이 맞춰지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 것을 확인한 천마는, 열쇠를 비틀어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릉.
소형 승합차에서 뿜어나오는 소리라곤 믿어지지 않는, 낮고 중후한 배기음이 울려 퍼진다.
껍데기만 배달용 승합차일 뿐, 천마의 라마스엔 엔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고성능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끼익.
수동기어를 2단으로 넣은 천마가 액셀을 가볍게 밟자, 차량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간다.
“흠.”
하품 같은 침음을 내뱉은 천마가 나직이 말했다.
“매번 같은 길을 가려니 지루하군.”
그러자 대시보드에 앉아 있던 무명이 대답했다.
[다른 경로를 안내해 드릴까요?]
“다음에 하도록 하지.”
어느새 라마스는 실드경계지역으로 들어와 있었다.
특수대응팀이 머무는 빌라를 지나, 옥탑방이 있는 건물에 주차하자 무명이 말했다.
[엄마손 백반으로 바로 가실 겁니까?]
“흠.”
잠시 고민하던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도록 하지.”
그리고 옥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입구로 들어갈 무렵.
슈욱.
공기 방울이 솟구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천마의 등 뒤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등장했다. 그림자가 움직이자, 미묘한 파동과 빛이 뒤섞이며 천장의 센서등이 켜졌다.
그렇게 드러난 그림자의 모습.
단정히 빗은 머리, 깔끔한 정장 차림의 미청년이다. 바로 동원이었다.
“천마 님! 이제 퇴근하셨나요?”
동원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자 천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좌에게 볼일이 있나.”
신계의 공무원 나으리께서 우연한 일로, 혹은 심심해서 이곳에 오진 않았을 테다.
천마의 직설적인 질문에 동원이 민망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갑작스럽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천마 님을 뵙고 싶어서요.”
“본좌를 말인가?”
“네. 시간도 딱 좋고 해서.”
헛기침을 한 동원이 묘한 미소를 머금고 천마에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저녁 어떠세요?”
“저녁?”
“네.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오늘은 저녁 생각이 없군. 그냥 여기서 말하라.”
“네?”
입을 벌리고 있던 동원이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좀 그런데…….”
건물 주변을 둘러보던 동원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면 소주 한잔하시는 건 어떨까요?”
“소주?”
소주라는 말에 천마의 배 속이 요동쳤다. 사실 그는 술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오고 나선, 취향이 조금 달라졌다.
이곳에는 무림의 명주를 능가하는 다양한 술과 그 풍미를 더해 줄 맛있는 음식들이 있다. 특히 소주는 품질은 낮지만 어떤 음식에 마셔도 어울리는 훌륭한 술이었다.
“그거 좋겠군.”
시원한 천마의 대답에 동원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근방에 괜찮은 술집이 있나요?”
“없다.”
“그럼 가시죠. 제가 분위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손님을 낚은 점소이처럼 동원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 *
천마와 동원이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내 번화가 근처에 있는 한식당이었다.
내부는 모두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으로 되어 있어, 식사를 하기에도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다만, 빛 좋은 개살구라. 손님이 가득 찬 탓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천마 님. 지금 시기가 딱 인사철이라… 회식 손님이 많은 걸 깜빡했네요.”
다시 밖으로 나온 동원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됐다. 본좌가 아는 곳으로 가지.”
“네?”
“이 근방에 괜찮은 술을 파는 곳이 있다.”
천마는 카운터에서 술을 말고 있는 장금선을 떠올렸다.
사실 소주도 훌륭한 술이었으나, 노병에서 파는 삼복구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가격은 헛웃음이 나올 만큼 비싸기는 하지만… 그건 공짜 술을 얻어먹을 천마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혹시 그곳은 조용한 편인가요?”
천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동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좋은 술이 있는 곳도 좋지만, 오늘은 사람들이 많은 곳은 좀 피하고 싶어서요.”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아무래도 오늘은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평범하게 소주나 한잔하자는 뜻은 아닌 듯하다.
어딘가를 떠올리는 듯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일반인이 없는, 손님이 없는 술집이라.”
“아시는 데가 있으신가요?”
동원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팔짱을 낀 천마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본좌를 따라와라.”
번화가와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골목, 굴다리 밑 포장마차.
인적이 드물고 너무나 외진 곳에 있는 탓에 근방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포장마차가 있는지조차 모를 법한 곳이다.
게다가 한 번 방문한다면, 다시는 찾지 않을 만큼 괴식 안주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마는 주저 없이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오, 괜찮은데요.”
천마를 따라 포차에 들어온 동원이 탄성을 질렀다. 황량한 굴다리 분위기와 달리, 따스한 전구가 걸려 있는 내부는 호젓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서 오십…….”
식재료가 담긴 테이블 뒤에 서 있던 주인이 고개를 숙이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뭡니까.”
쌍심지를 돋운 주인은 천마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어쩐 일이냐니.”
천마는 포장마차 주인, 고은진을 보며 덤덤히 말했다.
“술집에 손님이 뭘 하러 들어왔겠나.”
“여기서 술을 마시겠단 말입니까?”
“그렇다. 소주 다섯 병. 미지근한 것으로.”
자리에 앉은 천마의 주문에 고은진이 퉁명스럽게 다가와 손을 저었다.
“다른 데로 가십쇼. 근처 번화가에 좋은 술집 많지 않습니까?”
“이곳이 좋다.”
“…잘 못 들었는데요?”
“이곳이 좋다고 했다.”
순간 고은진이 멈칫했다.
‘설마, 그때 일로?’
불현듯 공생 던전에서 천마에게 수없이 음식을 갖다 바쳤던 일이 떠오른다.
설마하니 그때 먹었던 음식들이 기억이 난 걸까? 아니면 내가 만든 음식이 먹고 싶어진 걸까?
댄스댄스 게임을 하며 흥겹게 춤을 추던 일까지 떠오르자 괜히 두 볼이 붉어진다.
“좋, 좋습니다.”
천마의 시선을 슬쩍 외면한 고은진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제가 만든 안주를 먹고 싶다면… 못 해줄 것도 없지 말입니다.”
“안주는 필요 없다.”
“무슨 소립니까, 그게.”
“조용히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다.”
황당한 천마의 말에 고은진이 흥 소리를 냈다.
“이야기할 거면 카페나 가지. 뭣 하러 포장마차에 옵니까?”
“여기만큼 한적한 곳이 없질 않나.”
고은진이 얼척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손님이 하나도 없으니까 여길 왔다는 겁니까?”
“물론이다.”
포차 내부를 덤덤히 살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뒷골목, 굴다리 밑에 천막을 대충 둘러 만든 탓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잖나. 이런 곳이라면 사자후를 터뜨려도 들을 만한 사람도 없겠지.”
“천, 천마 님.”
동원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천마가 무심히 말했다.
“내어주는 안주는 꼬치 외에는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본좌처럼 시궁창에서도 콩나물을 건져 먹을 수준의 입맛이 아니라면.”
고은진의 정수리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 시비 걸려고 여기에 온 겁니까……?”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천, 천마 님. 이제 그만 하시죠.”
동원이 진땀을 흘리며 천마를 제지했다.
식칼을 쥔 채 부르르 떠는 고은진의 회색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십쇼! 너 같은 손님 안 받습니다!”
버럭 소리친 고은진을 보자 천마가 눈을 껌벅였다.
“손님을 내쫓다니. 미친 건가.”
“아, 됐으니까 딴 데 가십쇼! 술 안 팝니다!”
“뭐, 주인장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리에서 순순히 일어난 천마는 고은진을 보며 픽 웃었다.
“후임자로서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수고하라.”
“무슨 개소리십니까? 내 가게 운영하는 거랑 그거랑 상관이 있습니까?”
“아, 몰랐나.”
씩씩거리는 고은진을 바라보던 천마는 씩 웃으며 동원을 가리켰다.
“이쪽은 신지관리팀의 고위 관리, 동 차장이다. 영지의 등급과 직원들을 관리, 감독하고 있지.”
“신, 신지관리팀?”
동원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깔끔한 용모 뒤로 신령스러운 빛이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동 차장. 이 요괴는 얼마 전, 본점의 직원으로 들어온 자다.”
천마가 고은진을 가리키자, 동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지관리팀의 동원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누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일을 참 잘하신다고…….”
“보고 있나. 영지의 직원이라는 자가, 제 기분대로 손님을 가려 받는 몰상식한 짓을 하고 있다.”
“그, 그런가요.”
억지로 미소를 지은 동원이 슬쩍 뒷걸음질 쳤다.
식칼을 들고 있는 고은진이 금세라도 천마의 머리통을 내려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천마 님과 평범하게 술 한잔 먹기 힘들군요.’
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천마는 본래 남의 속을 뒤집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무림에서도, 적이 아닌 정사지간의 고수들까지 천마라면 이를 뿌드득 갈 정도다.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 궁금하군.”
“괜찮습니다, 천마 님. 여긴 영지가 아니잖아요.”
“영지의 직원이 손님에게 폭언을 내뱉고 미친개 쫓듯 내쫓았는데 말인가.”
“그건…….”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지의 직원이라면, 그에 걸맞은 품위 유지의 의무가 있다고 들었다.”
“그, 그렇긴 하지만.”
이마에 땀을 닦은 동원이 천마를 향해 말했다.
“천마 님. 그냥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타앙!
동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식칼로 나무 도마를 내리친 고은진이 이를 깨물었다.
“부디!”
하얗게 눈이 뒤집힌 그녀는 선홍빛 잇몸을 훤히 드러내며 말했다.
“…편히 앉아서 드십쇼.”
테이블에는 신선한 던전 식재료로 만든 꼬치구이와 육회, 탕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하얗게 눈이 뒤집힌 상태였지만 고은진은 정성스럽게 안주를 만들어주었다.
물론 그것은 천마가 이뻐서가 아니라, 신지관리팀의 공무원, 동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크으, 좋군요.”
소주를 쭉 들이켠 동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정말 좋은 곳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접시에 있는 꼬치구이를 집어 들고는 고은진에게 말했다.
“앞으로 여기 단골이 될 것 같은데요?”
“내어주는 안주는 꼬치 외에는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본좌처럼 시궁창에서도 콩나물을 건져 먹을 수준의 입맛이 아니라면.”
천마의 말을 기억한 동원은 꼬치만 열심히 시켜 먹은 것이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던전 재료를 손질하고 있던 고은진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안면이 흉기인 선임몬만 데려오지 않는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회색 눈깔 요괴를 조심하라. 술에 취하면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으니.”
“취한 각성자들이 손님으로 오지 않을까 걱정이나 하시지 말입니다. 몬스터인 줄 알고 사냥할 수도 있으니.”
“주둥이만 산 회색 눈깔 요괴가 더 귀하지.”
활짝 웃던 동원이 고개를 떨구며 속삭였다.
“그, 그만 싸우세요. 체하겠어요.”
노란 전구 빛이 따스하게 쏟아지는 포차 내부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동원은 기분 좋게 취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신도 취기를 느끼나.’
천마는 양복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젖힌 채 술을 마시는 동원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몸에 흐르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없다면, 퇴근 후 한잔 꺾는 직장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마 님.”
천마 앞에 놓인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준 동원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뭐가 말이냐.”
“이번에 이 도시를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조심스럽게 소주병을 내려놓은 동원이 나직이 말했다.
“천마 님께서 부비스톤을 처리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구한 게 아니다.”
잔을 들어 술을 쭉 들이켠 천마는.
탁.
덤덤히 술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천마 님께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천마의 잔에 술을 채운 동원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선 올해의 영지로 당장 복복 인테리어를 선정하고 싶습니다.”
다시 술병을 내려놓은 동원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누님께서 거절하시겠지만요.”
“이상하군.”
술이 채워진 소주잔을 바라보던 천마가 다시 동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에선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인간이 어떻게 되든 말든 신계에선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제 입들로 말했었다.
심지어 천마가 편의점 소녀, 김혜원을 살리는 것조차 질서를 어지럽혔다며 처벌을 가하려 하지 않았는가?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동원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신들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의미심장한 천마의 물음에 동원이 잔에 담긴 맑은 술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신들도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