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97화 (97/285)

제97화. 천마, 목욕탕에 가다 (1)

파라오 목욕탕.

황금빛으로 물든 가면을 쓴 조각물에 손을 대자,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열렸다.

이집트풍의 벽화가 그려진 통로를 지나니 금박을 씌운 듯 번쩍이는 카운터가 보였다.

“성인 둘이오.”

김찬원이 카드를 내밀자 천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돈을 내고 씻는단 말인가.”

“아무렴. 여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여.”

천마의 손을 이끈 김찬원은 재빨리 목욕탕 안으로 몸을 이끌었다.

“자, 받아.”

“이게 뭔가.”

“목욕탕에서 쓸 물건이여.”

김찬원이 내민 목욕 바구니에는 세신 용품과 면도기, 때수건 등이 들어 있었다.

“자아, 어뗘?”

김찬원이 보물창고 문을 열 듯 목욕탕의 문을 열자, 김이 피어오르는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천마가 생각했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신기하군.”

목욕탕의 내부를 둘러보는 천마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몸을 닦는다.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행위를, 이 세계에선 매우 복잡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마치 아까 전에 봤던 세차처럼.

“몸을 닦는 것도 취미 영역에 들어가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여?”

“그저 몸 하나 씻는 것뿐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복잡하게 씻을 필요가 있나.”

김찬원은 헛 하는 소리를 내었다.

“전혀 복잡하지 않어. 천 씨도 한번 이용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꺼여. 자, 이리 와.”

목욕 바구니를 내려놓은 김찬원이 거울과 대야가 놓인 곳에 자리 잡고는 손짓했다.

천마가 목욕탕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가자, 주변 남성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엄청난 근육질에 놀란 것일까?

-어억.

-콜록콜록!

남성들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거나 헛기침까지 해댔다.

천마와 시선을 마주친 남성들은 죄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천 씨.”

김찬원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천마를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참말로 사납고 용맹하구먼.”

“뭐가 말이냐.”

“아, 아무것도 아녀.”

말꼬리를 흐린 김찬원은 헛기침을 하며 샤워기를 가리켰다.

“자아, 얼른 씻고 탕에 들어가자고.”

“탕?”

“저 짝에 물 담아놓은 데 말여.”

“흠.”

천마는 멀리 보이는 온탕을 바라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뜸 뛰어올라 탕으로 몸을 날렸다.

“커허, 좋군.”

“천, 천 씨! 거기서 뭐 혀?”

재빨리 달려간 김찬원이 묻자, 천마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탕에 들어가자고 하지 않았나.”

“몸을 씻고 들어가야지!”

“여기서 씻으면 되지 않나.”

“그, 그니까… 천 씨만 들어가는 거 아니잖여.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주위를 쓱 살핀 김찬원이 천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릉 샤워부터 하자고.”

쏴아아아. 마지못해 김찬원을 따라간 천마는 샤워를 한 다음 다시 온탕에 들어갔다.

“크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기분이 좋아진다.

“어때? 좋지?”

“그렇군.”

“여기서 몸을 불린 다음에 때를 밀면 돼야.”

탕의 열기에 심취한 듯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는 김찬원에게 천마가 물었다.

“저건 뭔가.”

천마가 가리킨 것은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옥빛 탕, 일명 ‘약초탕’이었다.

“아아, 저긴 쑥탕이여. 여기 온탕과 번갈아서 몸을 불려도 좋지.”

슈욱. 풍덩!

온탕에서 냉큼 뛰어오른 천마는 반대편 쑥탕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천, 천 씨!”

화들짝 놀란 김찬원이 재빨리 달려가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뛰어들면 안 돼야! 사람들이 있잖여.”

“무슨 상관인가.”

“사람들이 불편할 수 있응께…….”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뿐만 아니라 목욕탕 주인까지 나와서 천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만 천마의 외형이 무시무시한 탓에 딱히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탕에 들어갈 땐 그냥 조심스럽게 쓱 들어가. 알겄지?”

주변의 눈치를 살핀 김찬원의 속삭임에도 천마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몸뚱이 하나 씻는데 돈까지 지불했다.”

돈을 낸 건 김찬원이었으나, 천마는 천마대로 불만이 쌓여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젠 본좌더러 출가한 비구니처럼 남의 눈치까지 보란 말인가.”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공중도덕과 예의범절의 분야로…….”

김찬원이 더듬거리자 천마가 사뭇 정색을 했다.

“그런 것 따윈 본좌가 알 바 아니다.”

마치 말 안 듣는 중2병 손자 녀석과 함께 목욕탕을 온 것만 같다.

하지만 이곳에 오자고 권유한 것은 김찬원 자신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인내심을 새삼 발견한 김찬원.

그는 천마의 옆에 앉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우물우물. 쩝쩝.”

그런데 이번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저 아저씨, 이상한 거 먹어.”

“쉬잇, 조용히 해.”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김찬원이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있는 천마가 몸을 담근 채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천 씨. 뭐 먹어?”

“누가 음식을 이곳에 버렸다.”

“뭐? 그게 뭔 소리여.”

천마는 약초탕에 떠 있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라. 여기에 있잖나.”

천마가 가리킨 것은 약초탕에 띄워놓은, 다양한 약초와 배가 썰어져 있는 약재 주머니였다.

“이 세계엔 정신 나간 놈들이 많군. 멀쩡한 곳에 음식을 버리다니.”

또다시 떠다니는 주머니를 깐 천마는 안에 들어 있는 약재를 입에 털어 넣었다.

“천 씨! 그거, 먹는 거 아녀!”

“먹을 수 있는 거다. 상한 부분도 썩은 곳도 없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먹으려고 둔 게 아니라 탕에 일부러 넣은 거여. 약효가 나오라고.”

“약효?”

“그려. 목욕할 때 좋은 성분이 나오게.”

따가운 시선을 느낀 김찬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엔 하마처럼 생긴 목욕탕 주인이 또다시 눈에 불을 켠 채 서 있었다.

“좋은 성분이라고?”

김찬원의 말을 곱씹던 천마가 다시 약초를 입에 넣었다.

“그렇담, 먹으면 더 빨리 흡수할 수 있지.”

머리가 어지럽다.

김찬원은 처음으로 천마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목욕탕에서 몸을 씻는 건 세차나 시공 기술을 가르치는 것과는 달랐다.

탕 주변의 사람들은 약주머니를 연신 건져 오물오물 씹고 있는 천마를 보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러다간 쫓겨나겄어!’

그때, 저 멀리 냉탕에 앉아 있던 무리들 중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천마의 체구에 꿀리지 않는 엄청난 근육질에 산도적처럼 생긴 남성이다.

김찬원은 한눈에 그들이 각성자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어이, 아저씨.”

성큼성큼 다가오는 근육질 남성이 천마를 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김찬원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어올라 근육질 남성의 앞으로 섰다.

“저, 무슨 일로…….”

“아니, 무슨 일이나 마나, 목욕탕에 전세 내셨어?”

말투와 눈빛을 보아하니, 각성자 중에서도 상당한 베테랑이 분명했다.

“보아하니 근력증강 스킬 각성자 같은데, 각성자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거 모르쇼?”

그 순간, 김찬원의 귓가로 쑥덕이는 음성들이 들려온다.

-저 사람, 호장(護將) 길드의 길드장, 하동석이잖아?

-저 각성자 된통 걸렸네. 호장 길드면 상위 탱커들로만 구성된 탱커 연합 길드인데…….

‘호장 길드?’

이 인상 더러운 근육질 남성이 우리나라 상위 탱커 중 한 명인 호장 길드장, 하동석이란 말인가?

‘난리 났다!’

김찬원은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동석 정도 되는 랭커가 천마의 근육과 인상에 쫄 리 없다.

시비가 붙었다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천마의 성격상 바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 이후, 파라오 목욕탕과 호장 길드는 동시에 폐업 상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 신계에서 알게 된다면, 복복 인테리어, 혹은 천마에게 엄중한 벌을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아니. 이 노인네 말 좀 들어보시구려.”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만큼은 피해야 한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은 김찬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머, 머리가 성치 않은 아이라 그렇소. 조금만 이해해 주시구려.”

“무슨 말이요. 그게.”

“저 모습을 보시오. 저게 맑은 정신을 가진 성인으로 보이시오.”

김찬원의 속삭임에 하동석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예 약초 주머니를 통째로 입에 넣은 채 우물우물 거리고 있는 천마가 보였다.

“조, 조카 녀석이 어찌어찌 각성을 하긴 했는데, 너무 근육이 커져 버린 탓에 머리에도 충격이 간 모양이오. 그 때문에 각성자 등록은 엄두도 못 내고, 이 노인네랑 같이 일용직 일을 하고 있소이다.”

행여 천마가 들을까, 김찬원은 하동석의 귀에 매달리듯 달라붙어 속삭이고 있었다.

“민폐라는 걸 알지만, 평소 목욕탕에 한 번 데려오고 싶어서 용기 내서 온 거요. 처음이라 그러니, 한 번만 이해해 주시구려. 이 노인네가 이렇게 부탁하리다.”

“뭐 하나, 김 씨.”

그때 목욕탕에 있던 천마가 김찬원을 보며 외쳤다.

“무슨 일이 있나.”

“아, 아무것도 아니여. 얼릉얼릉 약초나 빼 먹으라고.”

“김 씨?”

하동석이 눈을 번뜩이자 이마에 땀을 닦은 김찬원이 다시 속삭였다.

“같이 일용직 하는 동료들이 부르는 호칭을 따라 하는 것이라오. 온전치 않은 녀석이지만 심성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아이라오.”

말이라는 게 이토록 무섭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공공예절은 개나 줘버린, 싹퉁머리 없는 각성자로 보였던 천마였다.

그런데 김찬원의 말을 듣고 나니, 지금은 머리를 다쳐 약초 주머니나 까 먹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그때 하동석의 뒤에 슬그머니 따라온 호장 길드의 동료 한 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목욕탕에 그쪽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 됐어.”

하동석이 손을 내젓고는 김찬원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거, 모처럼 왔으니 적당히 하고 가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끼치지 말고.”

“형님. 그래도…….”

“시끄러. 오늘 조카랑 처음 목욕탕에 왔다잖냐. 너도 신경 쓰지 말고 가, 인마.”

하동석은 상위 랭커답게 호방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김찬원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하오. 감사하오.”

그리고 몸을 돌려 재빨리 천마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빨리 목욕탕을 즐겨야 한다.

“자자, 이제 탕은 됐으니 때나 밀러 가자고.”

천마를 이끌고 온 김찬원은 아까 자리를 맡아둔 곳에 앉아 때수건을 들었다.

“자자, 내가 천 씨의 때를 밀어줄 탱께, 잘 보고 이따 내 몸도 밀어줘야 혀?”

“알겠다.”

“자, 그럼 여기 앉아봐.”

천마가 쭈그리고 앉자 김찬원은 때수건을 들고 열심히 때를 밀어주었다.

써억. 써억. 써억.

때수건이 움직일 때마다 국수 가락 같은 때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보이지? 이게 전부 때여.”

“그렇군.”

“이렇게 때를 한번 밀면 몸이 개운해질 거여.”

방긋 웃은 김찬원은 열심히 천마의 때를 밀어주었다.

“…….”

하지만 천마의 몸에서 나오는 때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밀면 밀수록 굵기는 더욱 굵어지고, 양도 많아졌다.

게다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깔깔한 때수건마저 금세 매끈하게 갈려 버린다.

“천 씨. 지우개여?”

“무슨 말이냐.”

“아, 아니여.”

김찬원은 인내심을 갖고 다시 새 때수건으로 열심히 때를 밀었다.

하지만 온갖 중노동에 익숙한 김찬원조차 슬슬 팔이 저려 온다. 어느 정도 밀었다 싶었지만, 때는 여전히 분수처럼 밀려 나왔다.

“허억. 허억.”

입에 단내가 나도록 밀었지만 때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메마른 침을 삼킨 김찬원이 때수건을 내려놓았다.

“천 씨.”

“말하라.”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은 김찬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전문 세신사한테 가서 밀어야 할 것 같어.”

세신사, 김길중은 매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얼마 전, 파라오 목욕탕에 새로 고용된 세신사였다.

이제 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초보 세신사인 그는 무시무시한 육체미를 가진 천마를 보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지렁이 같은 핏줄을 머금은 근육은 손에 닿으면 베일 것만 같다. 숨을 쉴 때마다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근육에는 밀다가 만 때가 엉켜 있었다.

홀린 듯 때를 바라보던 김길중은 천마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각, 각성자이신가요?”

“아니다.”

“그러시군요. 여기 누우세요.”

김길중이 구멍 난 침상을 가리키자 천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구멍은 뭐냐.”

“아, 머리를 집어넣는 곳입니다.”

“머리?”

뚜벅뚜벅 걸어간 천마는 대뜸 구멍에 머리를 끼워 넣었다. 하지만 머리통이 너무 큰 탓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그렇게 억지로 넣으실 필요 없습니다.”

천마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얼굴이 끼인 채로 침상이 통째로 들렸다.

뽀옥.

침상을 잡아 억지로 빼낸 천마가 인상을 썼다.

“제대로 된 장비를 구비하는 게 좋겠군.”

“네에…….”

멍하게 서 있던 김길중이 때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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