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96화 (96/285)

제96화. 천마, 세차를 배우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어느 깊숙하고 은밀한 밀실.

끼익.

원목으로 된 밀실의 문을 열자, 남성은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쾌적한 공기가 흐르고 있지만, 천장에선 쇳덩이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가 전신을 압박하는 느낌. 180센티미터의 키가 절반으로 작아진 듯한 기분이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고급스러운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는 까만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의 일이라는 건 정말 알 수가 없군요.”

그림자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비스톤을 은닉했던 상점이 불타 버리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밀실 내부의 공기가 차갑게 응결되는 것만 같다. 뒤이어 귀청을 찢는 폭발음이 터져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감이다.

“오히려 이번 일로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협회의 승인과 더불어 미뤄두었던 던전 내 실험을 강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의자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며 말을 이었다.

“이게 당신의 목이 온전히 붙어 있는 이유입니다.”

“…….”

남성은 저승사자가 뻗어낸 기다란 낫이 목에 걸려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너무 의외의 사건이어서요. 다음번에는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의자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그림자는 남성이 서 있는 쪽이 아닌, 캄캄한 어둠이 깔린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소방관이 부비스톤으로 인해 각성자가 되었다. 그리고 300개의 부비스톤은 공중에서 터져 버렸다… 는 게 말이죠.”

“…….”

“당시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남자의 머릿속에서 하얀 나노봇을 어깨에 인 한 거구의 남성이 떠올랐다. 떡 벌어진 우람한 근육으로 보아, 근력증강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분명했다.

설마 그자가 각성한 소방관과 함께 부비스톤을 허공으로 날려 버린 걸까?

‘하지만 그 나노봇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발원지를 단숨에 찾아 자외선 센서를 꺼내든 나노봇. 그 정도 기술력이라면 협회와 군부대에서 사용하는 차세대 나노봇, 혹은 그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개조한 것이 분명했다.

“제 말, 못 들으셨나요?”

그림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남성은 상념에서 깨어나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고 있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별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뒷짐을 쥔 채 서 있던 그림자는 남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때때로 모든 일을 쉽게, 그리고 단순하게만 본단 말이죠.”

“죄송합니다.”

“나가보세요.”

“…예.”

살짝 고개를 숙인 남성은 몸을 돌려 밀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냥이 끝나면 칼은 칼집에, 사냥개는 솥에 삶아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목숨 따위엔 미련은 없다.

다만.

‘재밌겠어.’

남성은 일부러 근육질의 각성자를 봤다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보고하는 순간, 먹잇감은 단숨에 빼앗길 것이 분명하니까.

협회의 각성자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냥 지나가던 평범한 각성자?

‘찾아나 볼까…….’

짧은 생을 사는 사냥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사냥이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거린 남성은 어둠 속에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반면, 밀실에 남아 있는 그림자.

그는 남성이 나가버린 문을 빤히 바라보다 혀를 찼다.

“쯧, 이제 갓 살아남은 것들이란.”

흐릿한 어둠 속을 바라보는 그림자의 눈동자에선 칼날 같은 빛이 번뜩였다.

“이제 곧… 완성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 * *

일요일 오전.

새벽부터 운공을 마친 천마는 모처럼 단정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꾸준히 운공하고 좋은 음식을 먹은 탓에 몸은 어느새 구 할 이상 회복이 되었다. 내일부터는 출근하겠다고 장채원에게 이야기도 해놓은 상태.

“으음.”

진지하게 화면을 바라보는 천마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침음을 내었다. 천마의 곁에 앉아 있던 무명은 그 모습이 신기한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밌으십니까?]

“신기하잖나.”

화면 우측 상단에는 ‘호랑이 vs 사자’라는 제목이 찍혀 있었다. 동물 다큐멘터리의 단골 소재이자 명확한 답이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혹시 천마 님이 계신 곳에는 사자나 호랑이가 없었나요?]

“무림에서 말이냐?”

시선은 TV에 고정한 천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랑이는 많이 봤지. 하지만 사자는 돌로 만든 것밖에는 못 봤다.”

[그렇군요.]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 님이 계셨다는 곳은 무림. 주 사용자인 장채원 님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옛 중국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고 했다.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서식하는 사자는, 중국에서는 다른 왕국의 사절들이 선물로 보내야 볼 수 있는 귀한 맹수다. 워낙 귀한 데다 악재를 피하는 신의 짐승으로 추앙받은 사자. 그 때문에 송나라 전까지는 황실에서만 돌사자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천마 님이 계신 곳은 중국의 과거 모습과 비슷하군요. 혹시…….]

무명의 질문이 이어질 찰나.

-사자와 호랑이, 승자는 누구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TV에서 진지하고 엄숙한 성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환경과 개체의 차이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좌를 희롱하는 건가!”

흥미진진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천마는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자 결국 화를 참지 못했다.

“괜한 시간만 낭비했군.”

탕탕탕.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 씨, 안에 있는 겨?”

천마가 문을 열자 작업복을 입고 있는 김찬원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어쩐 일인가.”

“으응, 심심해서 또 놀러 왔지. 몸은 좀 어뗘?”

“완벽히 회복했다. 그만 좀 물어봐라.”

쉬고 있는 동안 장채원과 김찬원은 하루가 멀다 하고 줄기차게 방문했다. 올 때마다 부담스러울 만큼 푸짐한 먹거리와 갖은 생활용품을 사다 주는 통에, 천마는 오히려 귀찮음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렇구먼. 뭐 하고 있었던 겨? 쉬고 있던 겨?”

“아니, 시간 낭비를 하는 중이었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떠올린 천마가 주먹을 불끈 쥘 무렵, 김찬원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플라스틱 상자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뭔가. 어디 시공을 가는 중이었나.”

“아아. 이거?”

김찬원은 히죽 웃으며 상자를 가리켰다.

“세차 도구여. 천 씨에게 필요할 것 같아, 가져왔지.”

“세차 도구?”

상자를 열어보니, 욕실에 흔히 비치하는 샴푸통 같은 것과 수건들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겉면의 포장조차 뜯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마를 위해 일부러 산 것이 분명했다.

“이걸로 뭘 하는 건가.”

“허허허.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김찬원은 씩 웃으며 바깥을 가리켰다.

“모처럼 일요일잉께 나가자고. 내가 가르쳐 줄 테니.”

천마의 옥탑방 건물은 필로티 구조(기둥을 세워 건물 1층을 주차장으로 활용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어차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아무 곳이나 주차해도 되지만, 천마는 항상 건물 안에 있는 주차장에 라마스를 세워두었다.

“이게 차량이여, 탱크여.”

주차장에 있는 흙구덩이 라마스를 바라보던 김찬원이 놀라워했다.

하얗게 물들어 있어야 할 라마스는 물때와 먼지로 자욱하게 덮여 있었다.

만약 유리창이 깨끗하지 않았다면 버려진 차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천 씨. 차 관리는 전혀 안 하는 거여?”

“무슨 소리. 병기를 손질하는 건 무인의 의무지.”

천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라마스를 가리켰다.

“매일매일 차량 점검을 실시하고, 바퀴 상태도 확인한다.”

“에잉, 차량 관리에는 세차도 포함되는 거여.”

“세차?”

“차를 닦아야 한단 말이여.”

혀를 찬 김찬원이 라마스 트렁크에 세차 용품을 실었다.

“우선, 출발하자고. 저짝 동네에 셀프 세차장이 있응께.”

차량이 들어오는 입구 위에 김이 피어오르는 만두처럼 생긴 구조물이 걸려 있었다.

만두 세차장.

한꺼번에 서른 대의 차량이 셀프 세차를 할 수 있는, 대형 셀프 세차장이었다.

이용료가 저렴하기 때문에 실드경계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차량 동호회 사람들이 단체로 오는 곳이기도 했다.

“자자, 저짝으로 가자고.”

조수석에 탄 김찬원이 비어 있는 셀프 세차장 기계를 가리켰다.

“오늘은 내가 가르쳐 줄 테니, 잘 지켜봐아.”

카드를 내밀어 세차 이용료를 결제한 김찬원이 물 호수를 뽑아 들었다.

“자, 이렇게 카드 결제를 하면, 세차가 시작되는 거여.”

촤아아악.

호스와 연결된 레버를 꽉 쥐자 세찬 물줄기가 쏟아지며, 라마스의 먼지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이렇게. 저기에도 호스가 있으니 한번 따라 해봐.”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김찬원을 따라 물줄기를 쏟아내어 차량의 먼지를 걷어냈다.

타이어까지 꼼꼼히 물을 뿌린 김찬원이 세차 기계에서 ‘하부 세차’라는 버튼을 눌렀다.

쏴아아아!

바닥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차량 하부에 쏟아졌다.

“이건 뭐냐.”

“하부 세차여. 바닥에도 오염물질이 많응께, 이렇게 하부 세차도 해주는 것이 좋아.”

치이이익.

하부 세차가 모두 끝나자 김찬원이 트렁크에서 가져온 상자를 꺼냈다.

“자, 이젠 샴푸칠을 해야 혀.”

상자 속에서 작은 양동이와 샴푸를 꺼낸 김찬원이 양동이에 물을 받아와 샴푸를 풀었다.

하얗게 보글보글 거품이 일어난 작은 솔을 천마에게 내밀었다.

“이제 이걸로 차량 구석구석 닦아보자고.”

자동차 마니아인 김찬원은 드라이빙 스킬뿐만 아니라, 차량 관리 실력도 일류였다.

꼼꼼히 샴푸 후에 헹굼까지 마친 김찬원은 다시 용품 가방에서 극세사 타월을 내밀었다.

“자, 이제 물기를 싹 닦으면 돼야.”

타월을 집은 천마가 물기를 휙휙 닦아내자 김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를 닦는 것에도 방법이 있는 거여. 잔 기스가 나지 않게 한 방향으로.”

걸레질을 다 한 김찬원은 타이어의 분진 청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꼼꼼히 왁스까지 발랐다.

“어때? 할 수 있겠지?”

김찬원은 천마가 기억력과 이해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예상대로 천마는 모든 것을 한 번에 터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기억했다.”

“다행이구먼. 그럼 앞으로도 시간 날 때나 쉬는 날에 세차를 혼자서 해봐. 알겄지?”

김찬원의 말에 천마는 광이 나는 라마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응?”

“닦는 건 물청소까지만 해도 깨끗해진다. 차량 청소로 지금처럼 1시간 이상을 잡아먹는 건, 조금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천마의 말에 김찬원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사실 이렇게 깨끗이 닦는 건 취미의 영역이긴 하지.”

“취미?”

“그려. 이렇게 차를 닦는 것도 하나의 취미가 될 수 있거든. 취미.”

김찬원은 씩 웃으며 라마스를 가리켰다.

“차량이 깨끗해지는 모습을 즐긴다고나 할까? 반짝이고 유려한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 자체를 취미로 즐기는 것이제.”

열심히, 정성스레 왁스칠을 먹인 라마스의 겉면은 갓 구운 유리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단순히 깨끗해졌다기보다, 차주의 애착과 정성이 만들어낸 결실이라 할 수 있었다.

“취미라.”

“그려. 이런 취미가 있다는 걸 천 씨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일요일에 TV만 보면 왠지 답답할 때도 있을 테니 말이여.”

김찬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는 얼마 전, 천마 때문에 오랜 친구이자 아픈 기억을 가지고 살아왔던 김광욱과 해후했다.

뿐만 아니라 그때, 괴로워하는 자신을 위해 천마가 이런저런 신경을 써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던 찰나, 부비스톤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김찬원은 천마의 몸이 회복되고 나서야 은근슬쩍 찾아와 세차 용품을 선물해 준 것이다.

“천 씨에겐 별로 재미없었나? 상의도 없이 데려와 세차를 시킨 것 같아 괜히 미안하구먼.”

“미안할 일은 아니다.”

반짝이는 라마스를 바라보던 천마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외관을 닦으니 유려한 모습이 살아나는군.”

그러곤 김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좌는 차량 관리라는 것이 차량 내부 부품의 점검, 수리, 조정이라고만 생각했다. 세차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

천마는 커다란 팔을 들어 김찬원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배웠다. 김 씨.”

“허허허. 그리 말해주니 보람이…….”

흐뭇하게 웃던 김찬원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근데 이게 무슨 냄새여?”

코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문득 천마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광마혈투의를 입은 천마의 겨드랑이 부근은 땀과 세차 거품 등으로 푸욱 젖어 있었다.

“으음.”

원인을 찾은 김찬원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뿐만 아니라 땀으로 번들거리는 팔뚝 위로 밀려난 시꺼먼 때를 보자, 그의 눈동자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천 씨.”

“말하라.”

“혹시 때는 밀어?”

“때?”

“천 씨의 팔에 덕지덕지 붙은 거 말여. 이거 미냐고.”

김찬원이 팔에 붙은 때를 가리키자 천마가 눈을 껌뻑였다.

“이건 외부의 미세먼지 같은 것이 본좌의 땀과 뭉쳐, 피부 표면에 덮인 것뿐이다.”

“그려, 그게 때라는 거여.”

“그렇군. 하지만 이걸 밀고 자시고 할 일은 아니지.”

“어째서?”

두 팔로 원을 크게 그린 천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밀어도 계속 나온다.”

세차장 내부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김찬원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 씨.”

천마의 겨드랑이에서 흘러나온 구린내로 인해 코를 잔뜩 찌푸린 김찬원이 말을 이었다.

“그럼 목욕탕은 안 가본 겨?”

“목욕탕?”

“몸을 씻는 곳 말여.”

“집에 있다.”

“안 가봤구먼.”

김찬원은 입맛을 다셨다. 순서가 틀렸다. 지금은 라마스의 세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어.”

김찬원은 라마스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참에 목욕탕이나 가보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