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천마, 일 갑자 내공을 채우다
먼동이 틀 무렵.
옥탑방 평상 위에 단정히 앉아 운기조식을 하던 천마는 천천히 눈을 떴다.
평소와 달리 붉은 눈동자에 신광이 번뜩였고, 몸에는 희미한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신뢰로 얻은 내공이 55년…….”
지금까지 복복 인테리어에서 부단히 신뢰를 해결하여 얻은 내공이다.
“영지에서 일하고, 아침저녁으로 부단하게 운기조식을 해 얻은 내공 수위는 1년 남짓.”
현재 천마의 내공 수위는 56년.
이제 4년의 고련한 진기만 더 얻으면 일 갑자(60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좋군.”
몸을 천천히 일으킨 천마의 눈에선 붉은빛이 번뜩였다.
오늘은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천마의 예감은 적중했다.
출근하자마자 신뢰가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신지관리팀의 공무원, 동원의 소개로, 신계청사 아래 세워진 정자의 서까래를 보수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신계청사는 모두 한옥 풍으로 지어져 있는 탓에, 타일뿐만 아니라 모든 시공에 도통한 김찬원이 같이 투입되었다.
주변에 지나가던 공무원들은 굵은 신령목을 한 팔로 든 천마를 보며 입을 벌렸다.
“저 사람, 정말 인족이 맞는 거야? 신령목을 젓가락처럼 잡네.”
그리고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와를 걷고 있는 김찬원을 보며 또다시 탄성을 터트렸다.
“저 옆에 있는 건 상급요괴 같은데… 막일을 하네.”
“에잉, 난 원래 신뢰 같은 거 안 하는디.”
김찬원은 쑥덕거리는 소리와 따가운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지붕에서 기와와 흙을 걷어내었다.
작업을 마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온 그는 천마를 보며 낭패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 씨 부탁이니 특별히 하는 거여. 절대 두 번은 안 할 것이여.”
“앞으론 고려하지.”
“자자, 이제부터 보수를 할 거니께 잘 봐둬.”
김찬원은 부서진 한옥 정자의 서까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렇게 세월이 지나면 기와가 노후되어 아래로 밀려부러. 그리고 밀린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면, 처마 끝단의 서까래와 평고대(추녀와 추녀를 연결해 주는 목부재)가 상하게 되는 겨.”
신령목에 먹줄을 튕긴 김찬원의 앞엔 여러 가지 목공구들이 놓여 있었다.
일반 공구상에서 구할 수 있는 공구들이었으나, 신계의 은총을 일시 주입해 지구에서 가장 무거운 금속인 신령목을 가공할 수 있도록 했다.
“목공 작업은 첫째도 섬세함, 둘째도 섬세함이여. 잘 보라고.”
모처럼의 목수 노릇을 하는 게 즐거운지, 김찬원은 신이 난 듯 보였다.
위잉. 철컥철컥.
상한 서까래를 잘라내고 신령목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김찬원은 일하면서도 쉬지 않고 천마에게 설명했고, 천마는 보조로 일하면서도 열심히 김찬원의 설명을 들었다.
“자아, 이제 끝이여!”
거무튀튀한 신령목은 지붕에 부착되자 고색창연한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보수를 끝낸 김찬원이 보수된 지붕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일반 목재가 아니니께 페인트 작업 같은 건 필요 없겠구먼.”
“수고했다.”
“천 씨도 고생 많았어.”
손을 탁탁 턴 김찬원이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자자, 얼릉 정리해. 철수하고 한잔 꺾자고. 장 사장이 일 끝나면 바로 퇴근하라고 했응께.”
“오늘은 곤란하다.”
“응? 왜, 뭔 일 있어?”
높다란 한옥 풍의 건물 위에 걸린 시계탑을 바라보던 천마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좌가 즐겨보는 <나의 어사님> 마지막 회다.”
다음 날.
천마는 라마스를 타고 복복 인테리어로 출근했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가는 천마의 표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어딘가 몹시 불편해 보이기도 했고, 눈동자엔 싸늘한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천마 님.]
어깨에 올라탄 채 천마의 눈치를 보던 무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단순한 드라마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본좌도 알고 있다.”
짧게 내뱉은 천마가 두 주먹을 쥐며 말했다.
“하지만 그 간악한 변사또 놈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군. 조만간 그놈의 행방을 추적하여, 본좌가 창안한 마함지옥수형(魔喊地獄囚刑)을 두루 맛보게 해주겠다.”
[네, 네에.]
어차피 극 중 변사또는 어린 시절, 화재로 인해 극심한 화상을 입은 설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변사또로 분한 배우는 1화부터 얼굴에 화상을 입은 분장을 한 채 등장했다. 설령 배우를 찾는다고 해도 천마가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아, 아니… 천마 님이라면 알아보실 수도 있으려나요.]
“무슨 말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후로도 천마는 연신 구시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매장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머리에 말끔한 양복을 입은 청년이 장채원과 나란히 서 있다. 동원이었다.
“천마 님.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어쩐 일인가.”
천마가 묻자 동원이 활짝 웃으며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제 일하신 보수 드리러 왔죠. 때마침 근방에 볼일이 있어서요. 하하.”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장채원이 픽 웃으며 말했다.
“원래 관공서에선 월말쯤에 보수를 지급해 줘. 근데 천마 네가 눈알 빠지게 보수를 기다리는 걸 알고선, 동원이가 먼저 가져온 거야.”
“그랬나. 수고했군.”
천마는 덤덤하게 동원이 내민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겉봉투가 장채원이 흔히 받던 붉은색이 아니라 까만 봉투였다.
아무래도 발주처에 따라 봉투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흠?”
천마가 봉투를 열어보니 홀로그램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금빛 꽃 한 송이가 내부를 밝혔다.
“이건 또 뭐냐. 은색이 아니군.”
“아, 모르셨나요? 은총 꽃은 은, 금, 오색으로 나뉘어 있어요. 은색은 하나, 금색은 다섯 개, 오색빛은 열 개…….”
동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빛 꽃이 사라지며 천마의 몸으로 신력이 들어왔다.
그 수위는 5년이었다.
순간 천마의 눈에서 강렬한 혈염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마침내, 일 갑자…….”
그렇다. 56년의 내공에 5년이 더해졌으니, 천마는 일 갑자(60년) 이상의 내력을 쌓은 것이다.
쿠쿠쿠쿠.
순간 땅이 흔들리더니 천마의 몸 주변으로 강렬한 바람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쩌쩌적.
핏줄이 솟고 피부가 갈라진다.
파앙!
갑자기 눈이 하얗게 뒤집힌 천마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사자 갈기와 같은 천마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자, 흘러나오던 빛이 번개처럼 뭉쳐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야?”
화들짝 놀란 장채원이 천마에게 달려가려 하자 동원이 재빨리 제지했다.
“누님, 잠시만요!”
“왜?”
“아무래도 나쁜 일 같지 않아요. 저거 보세요.”
빠지지지직!
요란한 소리를 내는 빛은 천마대능력과 달리 노란색이었고, 그 기운이 매우 부드러웠다.
그것은 순수한 진기가 만들어낸 빛이었다.
[천마대능력… 아, 아니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명이 고개를 저었다.
천마의 몸에서 쏟아지는 빛은 활활 타오르는 붉은빛이 아니라, 전구 색처럼 노란빛이었다.
“끄아아아아!”
커다란 사자후를 터트린 천마의 몸이 허공에서 한 자(尺:30센티미터) 정도 떠올랐다.
일 갑자의 공력이 채워지자, 신비스럽게 끊어졌던 기혈 한 군데가 회복된 것이다.
웅웅웅.
다시 땅으로 내려온 천마의 몸에선 고요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상계의 신들에서나 뿜어내는 신령스러운 빛이었다.
“저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기운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으음.’
천마를 바라보는 동원의 표정은 싸늘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장채원과 무명의 시선은 천마에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후우.”
마침내 눈을 뜬 천마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내 일 갑자를 달성했군.”
일 갑자.
60년 동안 쉬지 않고 진기를 축적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 수위이자, 무림인으로서 성명할 수 있는 내공 수위다.
“정말? 그럼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장채원이 탄성을 지르며 묻자 천마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고작 돌아갈 수 있는 계단의 십분지 일을 내디딘 것뿐이다.”
원래 천마의 공력은 1,000년 이상.
하지만 십 갑자(600년)에만 도달해도 무림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천지무극통령을 실행할 수 있으니, 십분지 일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이, 뭐야. 한참 멀었잖아.”
장채원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줄곧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천마가 준다는 100억 원어치의 금덩이에 아주 마음이 없진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응? 뭔데?”
기혈을 점검한 천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쓰지 못했던 무공 하나를 더 개방해 사용할 수 있다.”
“응? 무공?”
“지금까지 본좌는 권마칠식과 마화열극지 같은, 끊긴 기혈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학이나 음유, 또는 양강의 무학을 하나만 사용했다. 물론 교양 차원 수준으로 익힌 잡다한 무학이라든가 섭심술은 제외하고도 말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본좌의 반극신공은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천고의 무학이다. 한마디로 끊어진 기혈 한 가닥이 탄탄하게 이어졌으니, 이 경맥을 통해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본격적인 독문무학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천마는 신이 나서 말을 했지만, 장채원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아아, 그래. 그렇구나.”
아니, 오히려 장채원의 눈은 가자미처럼 작아졌다.
그녀의 시선으로 봤을 땐 현재 천마가 사용하는 권마칠식도 충분히 험악하고 강력했으니까.
“괜한 기술이 추가되는 것보다 차라리 낯설지 않은 무공이 나을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장채원이 말했다.
“그냥 와따따뚜겐이나 계속 쓰는 게 어때?”
“그게 뭐냐.”
“네가 자주 쓰는 어류겐이랑 아도겐이랑 한 세트인데, 몰라?”
“모른다.”
“그렇구나. 그럼 됐어.”
장채원이 관심 없는 듯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자 동원도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축하드려요, 천마 님.”
“덕택이다. 앞으로도 좋은 일감, 기다리지.”
“하하하, 네에. 천마 님, 그럼 다음에 봬요. 누님, 저 이만 가볼게요.”
동원은 미소 지으며 천마와 장채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살짝 몸을 돌린 채 안개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지기 전 돌아선 동원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천마 님. 축하드립니다.]
“음.”
[그럼 저도 창고 방에 가 있겠습니다.]
“맘대로 하라.”
무명이 떼굴떼굴 굴러가든 말든, 두 손을 내려다보던 천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넘실거렸다.
이 열린 기혈을 어떤 무학의 통로로 사용할까?
원거리에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신마전단지(神魔剪斷指)의 통로로 사용할까? 아니면 다양한 장상제령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귀문의 마령종사대법(魔靈宗師大法)을 써볼까.
“뭐 해?”
미소 짓는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픽 웃었다.
“아직도 기쁨의 세리머니를 하는 거야?”
“열린 기혈에 적응시킬 무공을 고심하는 중이다.”
“그래? 그럼 매장 청소를 하면서 선택해 보는 건 어때? 꼭 지금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장채원의 덤덤한 목소리에 잠시 흥분했던 천마는 냉정을 되찾았다.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겠지.’
일 갑자를 모으는 데 걸린 시간은 6개월 남짓.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언제 어느 때에 다시 이 갑자의 공력을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개방해야 할 무공 역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러지.”
덤덤히 대답한 천마는 천천히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과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