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91화 (91/285)

제91화. 천마, 모델이 되다

따르르릉.

신뢰 전용 데스크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트북으로 견적서를 뽑고 있던 장채원이 수화기를 들었다.

“복복 인테리어입니다. 아, 네에. 그럼요. 별고 없으셨죠?”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조심스레 듣던 장채원이 눈썹을 매만졌다.

“지금요?”

응접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 천마를 슬쩍 본 그녀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우선 스케줄을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장채원은 턱을 괸 채 허공을 빤히 응시했다.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다. 천마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장채원이 답했다.

“아아, 조명 시공 의뢰야.”

“방금 신뢰 전화기로 온 것 같은데.”

“맞아. 아주 비싸고 무거운 거라고… 시공비를 줄 테니 지금 와서 달아달라고 하시네.”

“그런가.”

책을 내려놓은 천마가 반색했다.

“드디어 터주신의 공구점에서 구매한 본좌 전용 드릴을 사용해 보겠군.”

하지만 턱을 괸 장채원이 이마를 매만지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천마를 정말 보내야 하나.”

“무슨 말이냐. 본좌 말고 갈 사람이 또 있나.”

“그게 아니라… 뭐랄까. 좀 독특한 요신님이거든.”

“무슨 상관인가.”

“너랑 부딪칠까 봐 그러지. 솔직히 말해, 독특하다 못해 괴팍하신 분이거든.”

망설이는 장채원을 바라보며 천마가 덤덤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만 잘하고 신력을 받으면 그만이다.”

“음.”

장채원은 흔들림이 없는 천마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노인공경 따윈 개나 줘버리고 언제나 고압적인 말투를 사용하지만, 신이라고 하면 꽤나 정중하게 응대하는 편이었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신뢰도 완수하고 내공이란 것에 목을 매고 있으니… 신이 좀 괴팍하다고 해도 발작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조명 설치 안 해봤잖아?”

“설치하는 건 많이 봤다.”

“뭐? 그럼 안 돼. 무슨 트집을 잡히려고.”

천마는 대답 대신 창고 안으로 스윽 들어갔다.

이내 전동 드릴이 들어 있는 파란색 공구통을 집어 들고 나온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본좌의 임기응변은 따를 자가 없으니. 현장에 가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으음.”

자신감 있는 천마의 말투에 장채원은 또다시 걱정이 앞섰다.

생김새답지 않게 파격적이고 신선한 사고방식을 가졌으나, 때때로 인테리어 시공 분야와는 맞지 않는 돌발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내부에 까만 페인트를 칠한다든가, 아니면 벽에 난 곰팡이를 없애기 위해 벽을 없앤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어차피 매장 한가하니까, 오랜만에 같이 가줄게.”

* * *

천마의 라마스가 멈춰 선 곳은 호숫가 근처에 지어진 고급스러운 대저택이었다.

울창한 숲 끝자락에 반구형 모양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고즈넉하고 낭만이 가득해 보였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본관의 현관 입구 앞에 선 장채원이 조심스레 차임벨을 눌렀다.

“복복 인테리어에서 왔습니다.”

지이잉.

대답 대신 기계음과 함께 자동으로 현관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대리석이 깔린 거실의 풍경이 보였다. 가정집이라기보다 대저택형 호텔에 가까웠다.

“어서 오세요.”

거실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샹들리에 조명 아래 선 그림자는 오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깡마른 남성이었다.

물감이 잔뜩 묻은 캔버스 앞치마를 입은 남성은 놀랍게도 여성처럼 진한 화장을 하고, 드레스 같은 걸 입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채원 씨.”

“네에,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소조(燒造)신 님.”

장채원은 전에 없던 매우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짙은 화장을 한 남성이 바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나눠주신 신, 소조신이었다.

상당한 힘을 가진 신이지만, 변태적인 성향과 괴팍한 성격 탓에 대지유신 사이에선 조금 외톨이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채원 씨.”

“네? 네에.”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햇살에 반사된 금빛 모래처럼 반짝이고, 하얀 피부는 어두운 밤 휘영청 뜬 보름달처럼 투명하고 은은하군요. 화장기 하나 없는 미모가 이 정도라니. 늘 볼 때마다 놀랍고 짜릿하답니다.”

영감을 나눠주는 신이라 그런지,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미사여구의 칭찬을 던졌다.

빙긋 웃던 소조는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천마를 보고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아, 이분이 그 유명한…….”

천마를 보며 눈을 반짝이던 소조신은 무도회에서 인사하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

“반가워요. 소조라고 해요.”

“처음 뵙겠소이다. 천마라고 하외다.”

기괴한 복장 차림을 한 소조신을 보고도 천마는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포권을 했다.

“놀랍군요.”

“어떤 것이 말이외까.”

천마의 눈빛을 바라보던 소조신의 눈엔 이채가 떠올랐다.

저 무심하고도 심드렁해 보이는 눈빛은 결코 꾸며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처음 절 보면 한 번쯤은 놀라니까요.”

“그렇소이까?”

소조신의 말에 천마는 전혀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였다.

사실 마도무림의 고수들은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거나, 기괴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환갑이 넘었는데 아이 옷을 입고 다니는 착란살수(錯亂殺手)라든가, 옷 대신 독물을 몸에 휘감고 다니는 오독동자(五毒童子)라든가.

심지어 고통받는 걸 즐기는 탓에, 몸에 수백 개의 송곳을 박아넣고 암기로 사용하는 만침살귀(萬針殺鬼)도 있었다.

“뭘 보고 놀란다는 것인지 모르겠구려.”

천마의 말은 진심이었다.

늘 어딘가 맛이 간 마도고수들을 휘하로 두었기 때문에, 여장 정도는 오히려 평범하게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과연, 인족 중에서도 걸출한 인물이 있군요.”

그 사실도 모른 채, 소조신은 천마가 일말의 편견도 갖지 않은 너른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생각하고는 감탄성을 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소조신이 이끈 곳은 커다란 작업실이었다.

각종 그림들과 작업 도구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고, 바닥은 따스한 분위기의 마루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천장 위에는 신계용 조명을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신주갑이 있었는데, 나사가 풀린 건지 덜렁거렸다.

“어차피 신주갑이 다 되어서 이참에 조금 좋은 조명으로 교체하려고요.”

소조는 작업실 한편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가리켰다.

“일전에 금룡신께서 준 선물인데… 제가 설치하기엔 조금 무겁더군요.”

장채원이 박스를 열어보니 마치 공처럼 만들어진 커다란 조명이 있었다. 문제는 그 겉면이 모두 신령목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이었다.

“아아, 그렇군요.”

이 정도 크기의 신령목 조명이라면 무게가 어마무시할 것이다.

일전에 천마는 체력이 다한 상태로, 신령목으로 만든 토룡신의 집기를 옮기다 깔릴 정도였으니.

“천마, 들 수 있겠어?”

“물론이다.”

“사다리는 이걸 쓰세요.”

소조가 작업실에 있는 신령목 사다리를 내밀자 천마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하외다.”

겉에만 신령목으로 만들어져 있을 뿐, 모양과 교체 방법은 인간들이 흔히 사용하는 조명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점주, 차단기를 내려라.”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천마는 안전 수칙부터 이행했다.

“내렸어.”

장채원이 배전반의 차단기를 끄자, 천마는 조명의 전선을 뽑고 공구통에서 드릴을 꺼내 조명의 브라켓(조명을 고정시킬 수 있는 고정대)을 풀기 시작했다.

위이잉.

브라켓을 풀자 천장에는 성인의 주먹만 한 두 가닥의 전선이 보였다.

“이게 뭐냐.”

도저히 펜치로는 자를 수 없을 만한 굵기의 피복은 마치 악어 가죽처럼 두툼하고 질겼다.

하지만 천마는 당황하지 않고 엄지와 식지로 전선을 잡은 후 내공을 끌어올렸다.

“영마용조수(永魔龍爪手).”

싸악.

손가락에서 칼날 같은 기운이 쏟아지자 굵직한 피복이 깨끗이 잘려 나갔다.

‘과연… 제법 힘이 있는 신지로군.’

손끝에서 쏟아지는 진기는 이(二) 갑자를 상회했다. 바닥에서 올라온 강력한 신력 때문이었다. 능숙하게 선을 자른 천마는 다시 브라켓을 박았다.

그리고 남은 건 저 거대한 조명을 천장 위로 들어 올리는 일이었다.

“후읍.”

미리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린 천마의 몸에선 붉은 기운이 쏟아졌다.

하지만 쾌자 형태의 ‘우리옷’ 때문에 구슬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기가 불편했다.

투드드득.

진기를 주입한 천마는 ‘우리옷’을 광마혈투의와 비슷한 민소매 작업복으로 변환시켰다.

그 순간.

“오오!”

헐렁한 작업복으로 변한 ‘우리옷’을 입은 천마를 보자 소조신은 비명과도 같은 탄성을 질렀다.

“저 아름답고 우람한 대흉근…….”

“음?”

“대나무를 여러 겹 붙여놓은 듯한 전완근, 언덕과 같은 상완이두근, 생생하게 튀어나온 혈관, 이 아름다운 조각 같은 육체! 정말… 정말 완벽해요! 퍼펙트!”

소조신은 천마의 근육을 황홀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정말 최고로 멋진 몸을 가지고 있군요. 오, 마이 가쉬!”

“…….”

“오고 있어요. 오고 있어요! 당신의 몸을 보니 뜨거운 태양과도 같은 영감(靈感)이…….”

두 눈을 감고 호들갑을 떨던 소조신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천마 씨. 제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세요!”

“모델?”

눈을 껌뻑인 천마가 장채원을 바라보았다.

“점주. 모델이 뭔가.”

“음. 쉽게 이야기하자면… 널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는 거야.”

“흠.”

잠시 고민을 하던 천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소이다.”

“어, 어째서요?”

“본좌는 인테리어 전문가외다. 예술가가 아니오.”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요! 한 시간, 아니 30분이면 돼요.”

천마의 단호한 표정을 바라보던 소조신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모델료로 천만 원 드리겠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오만, 본인은 인테리어 전문가…….”

“그리고 계약한 은총의 두 배, 아니 세 배를 드리겠어요!”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천마는 성실한 표정으로 소조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자세를 취하면 되겠소이까.”

소조신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잠시 도구들을 가지러 간 사이, 장채원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괜찮겠어?”

“뭐가 말인가.”

“모델 말이야. 네 모습이 이 세계에 대대손손 남는 거라고.”

“상관없다. 무림엔 본좌의 초상화가 전국 방방곡곡에 걸려 있다. 무림맹에서 본좌의 허락도 없이 배포한 것이지만.”

“…그거 초상화가 아니라 수배 전단 같은 거 아냐?”

천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든 상관없다. 고작 한 식경만 서 있으면 15년의 내공이 들어오는 거 아닌가?”

현재 천마의 내공 수위는 반 갑자하고도 10년. 즉, 40년. 그리고 이번 의뢰를 완수한다면 단숨에 55년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좀 그런데.”

장채원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누가 괴팍한 신 아니랄까 봐, 천마를 모델로 쓰다니.

“고작 그림 모델 해주는 걸로 은총을 준다니. 뭔가 이상하잖아.”

장채원의 불길함은 적중했다. 방에서 나온 소조신은 아주 얇은 천 조각을 천마에게 내밀었다.

“옷을 전부 벗고, 이걸 입어주시겠어요?”

“이게 무엇이오?”

“속옷이에요. 저는 천마 씨의 아름다운 육체를 샅샅이 살펴보고 싶거든요.”

천마는 눈앞에 놓인 붉은 천 조각을 바라보았다. 번들번들한 실크 재질에 요사스럽도록 붉게 물든 천 조각은 그의 주요 부위를 간신히 가릴 수 있을지조차 우려되는 크기였다.

“이걸 꼭 입어야 하외까?”

“물론이죠.”

“으음.”

그제야 천마의 얼굴에도 갈등이 어렸다.

지금까지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전단지는 수백 장을 봐왔다.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의 몸, 그것도 나체에 가까운 알몸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은 없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소조신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천마 씨의 몸은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초월한 예술품과 같아요. 인간의 몸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극한의 아름다움…. 저는 반드시 이 몸을 후대에 남기고 싶어요.”

“으음.”

“부탁드립니다. 은총은 인과율에 의해 지급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델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은총을 드리지 못하지만… 혹시 좋은 의뢰가 있다면 제가 더 소개해 드릴게요.”

“꼭 본인의 몸을 그려야 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천마 역시도 찜찜함을 참을 수 없는 듯 슬그머니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소조신의 눈동자는 간절함과 절박함, 그리고 뜨거운 예술혼으로 활활 불타고 있다.

“당대의 예술가들은 너무나 영감이 부족해요. 10년 전부터 제가 슬럼프에 빠졌기 때문이죠. 저의 영감이 강해져야만이, 그들에게 뜨거운 예술혼을 불어 넣어줄 수 있답니다.”

“흠.”

“물론 천마 씨의 몸을 한번 그린다고 해서, 모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가득 채워주진 못하겠죠.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예술가들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싶어요.”

소조신은 천마에게 고개까지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천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술혼. 그것은 최고의 작품을 위해 몸과 영혼을 바친 예술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순수한 집착이기도 하다.

“영감이라.”

천마 역시 무학의 끝을 본 절대지경의 고수였기 때문에 소조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좋소이다.”

깊은 고민 끝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가능한 짧게 끝내주시길 바라오.”

돌아가는 차량 안,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장채원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의외네. 절대 허락 안 할 줄 알았는데 말야.”

“사실, 별거 아니다.”

“응? 별 게 아니라니. 거의 나체로 30분간 서 있었잖아.”

잠시 과거를 회상한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좌는 삼천 명이 넘는 여인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칠 주야를 생활한 적도 있다. 이 정도는 정말 별거 아니지.”

“삼천 명? 뭐야. 그쪽에서 누드모델도 했었어?”

“극음진기를 얻기 위해서 빙궁의 삼천 제자들이 본좌에게 조금씩 한빙진기를 나누어준 것뿐이다. 극음진기를 주입할 땐 옷을 입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체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

장채원은 눈을 깜빡였다.

“그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야?”

“목표를 위해선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

“뭐”

“불후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처럼 말이다.”

소조신의 절박한 표정을 떠올린 천마는 씩 웃었다. 머지않아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 채.

* * *

보름 후.

매장 일이 바빠진 탓에 천마와 장채원, 그리고 고은진과 김찬원까지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자 다 같이 매장 근처에 있는 중화루에 방문했다.

후루루룩.

TV를 보며 짜장면을 먹던 김찬원은 문득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여, 저거 천 씨 아녀?”

“푸웁!”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보던 장채원과 고은진은 먹고 있던 볶음밥을 뿜었다. 커다란 TV 화면엔 허리를 튼 자세로 서 있는 남성의 아랫배와 허벅지 사이의 신체 부위가 보였다.

“저, 저게 뭡니까?”

고은진이 입을 벌리자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본좌의 엉덩이다.”

그렇다. 그건 엄청나게 탱글탱글하고 잔뜩 성이나 있는 천마의 엉덩이었다. 얼마 전 장채원도 실물로 보았던.

-…세기의 예술가 100인에도 뽑혔던, 봉준구 작가가 최근 발표한 ‘분노에 찬 엉덩이’란 작품입니다. 거친 짐승과도 같은 근육질의 엉덩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초식남으로 대표되는 요즘 남자들의 세태를 꼬집고 있는데요.

TV 속 앵커는 말도 안 되는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며 천마의 엉덩이를 찬양하고 있었다.

“이곳에선 저런 걸 예술이라고 하는 건가.”

짜장면을 씹고 있는 천마의 말에 중국집 내부엔 적막이 흘렀다. 화면에는 귤껍질을 깐 귤처럼 근육 결이 생생한 갈색 엉덩이가 연신 비치고 있었다.

-유명인의 신체 부위를 강조해서 그린 작품들은 매우 흔합니다. 하지만 누군지 모를 사람의 엉덩이를 그려낸 작품이 왜 극찬을 받는 걸까요?

-신체 부위를 그린 것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봉 작가의 작품에는 엉덩이라는 부위가 나타낼 수 있는 모든 이상이 담겨 있으며, 이는 나약한 현대인의 외양뿐만 아니라 그 성격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시대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시각화한 작품으로…….

당연히 ‘이게 무슨 예술이야?’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평론가의 입에선 극찬이 쏟아졌다.

입을 벌리고 있는 일행들과 평론가의 이야기를 듣던 천마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나.”

“알아먹겠어? 저 헛소리를?”

“물론이다.”

장채원의 물음에 천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니, 본좌의 엉덩이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뜻이지.”

“아냐, 틀려. 저런 건 예술이 아냐…….”

“틀리다니. 저 사람들의 극찬이 안 들린단 말인가?”

입안에 넣었던 모든 볶음밥을 도로 쏟아낸 장채원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그래.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

아마도 소조신. 그 엉뚱하고 괴팍한 신이 인간들에게 쓸데없는 영감을 주입한 것이겠지.

시간이 흘러 주입되었던 영감이 사라지면 곧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까?

아니다. 이미 평론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은 저 작품은, 절대로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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