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화해냐 다툼이냐, 공생 던전 (3)
-자, 이제부터 제37회, 전국 맛짱 요리사 선발대회. 본선을 시작하겠습니다!
고은진은 다시 재료를 꺼내 정성스럽게 손질했다.
그녀가 만든 것은 평범한 샐러드와 꼬치구이였으나, 송아지 스테이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토마토와 바질, 치즈를 넣은 샐러드와 검은 늑대의 앞다리살로 만든 소금 꼬치구이입니다.”
-아, 고은진 참가자! 놀랍게도 사람들이 혐오하는 던전 식재료로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사회자의 외침에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기회를 달라면서, 호불호가 강한 식재료를 선택하다니? 심지어 도노반이 아닌 일전에 육회를 만들다 실패한 검은 늑대의 고기로 말이다.
하지만 천마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천천히 꼬치구이를 집어 들었다.
“후우.”
꼬치구이를 입 안에 넣자마자 천마의 입 안으로 육즙이 가득 찼다.
겉보기엔 그냥 숯불에 구운 것 같지만 칼집을 정성스레 넣은 후, 여러 가지 향신료로 밑간을 해두었다.
거기다 구울 때 참기름을 중간중간 발라서 안까지 고르게 익혔다.
우물우물.
잘 씹은 꼬치구이를 삼킨 천마가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의 맛을 잘 살렸군. 왜 검은 늑대의 고기로 꼬치를 한 거지?”
“그동안 느끼한 걸 많이 먹었잖습니까. 검은 늑대가 고기가 좀 질기고 누린내가 나지만, 지방은 적고 담백해서…….”
자신 없는 대답이었으나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소금구이가 아닌, 여러 가지 양념을 은근히 발라 맛을 냈군.”
한 입만 먹겠다던 천마는 젓가락을 들어 샐러드를 집어 올렸다.
“흠, 신선하군.”
샐러드를 씹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꼬치구이와는 어울리지 않는데…….”
“혀가 지쳐 있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샐러드를 먹으면 다시 입맛을 돋워줄 것 같아서 만들어봤습니다.”
“그렇군. 둘 다 상당한 맛이다.”
-아아, 칭찬이 인색한 천마 님의 입에서 상당한 맛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이번 제37회 전국 맛짱 요리사 선발대회. 우승자는 고은진 님입니다!
빠바바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꽃가루가 흩날렸다.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고은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양손을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격한 고은진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할 무렵.
“뭐 하나.”
천마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고개를 드니 어느새 스튜디오의 풍경은 사라지고, 휑한 던전 내부의 모습만이 보였다.
“끝났구나.”
고은진은 허탈한 미소를 보였다.
비록 요리 대회는 환상에 불과했으나, 천마의 매서운 충고는 그녀의 마음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본좌가 앞장서도록 하지.”
늘 그렇듯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말투였으나, 지금은 어딘가 모르게 정감있게 들렸다.
‘입에 여물만 처넣는 황소 같은 선임몬인 줄 알았는데.’
호전적인 요괴들 사이에서 요리에 관심이 있었던 고은진.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괴짜 취급을 받았으며 무시를 당했다.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의 요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평가해 주지 않았다.
‘맛을 평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요리에 대한 철학까지 갖고 있잖아?’
그저 몬스터나 닮은 인족이라 생각했던 천마는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음식을 대했다.
심지어 음식은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정성스레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까지 갖고 있었다.
‘그, 그렇게 나쁜 선임몬은 아닐지도.’
어떤 분야든, 그 노력과 가치를 인정해 줄 줄 아는 자는 멋진 법이다.
천마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애 감정은 아니지만, 진지한 요리 철학을 가진 천마의 모습이 살짝 멋짐을 느낀 것이다.
“뭐 하나.”
“아, 갑니다.”
재촉하던 천마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전에 없던 미소를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장인 정신. 천마는 그걸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자였다.
그것은 인간의 수명을 아득히 뛰어넘는 요괴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품격이었으니까.
쿠르르르릉.
던전 중심부의 문이 열리고, 진입한 고은진.
내부를 살펴보자마자 그녀의 입가에 그려졌던 엷은 미소가 증발되어 버린 듯 사라졌다.
-빠빠바밤! 던전 노래방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던전 내부는 회식 장소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 노래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던전 노래방 규칙은 간단합니다! 각자 마이크를 하나씩 잡은 후, 진동이 울릴 때마다 순서대로 노래를 부르시면 됩니다.
긴말할 것 없이, 설명부터 들어가는 커다란 기계를 보자 천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냐.”
“단순한 노래 이어 부르기 게임 같은 겁니다.”
고은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사람이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다가, 진동이 오면 즉시 노래를 바꿔 불러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내가 ‘안녕하세요’라는 가사를 부를 때 ‘안녕’쯤에서 진동이 오면 바로 그쪽이 ‘하세요’ 부분을 불러야 한단 말입니다.”
“노래를?”
“맞습니다. 흥얼거리는 노래 말입니다.”
-자, 오늘 불러야 할 노래는… 바로 ‘나는야 트레저 헌터!’입니다.
“음?”
-민현기 씨가 음파 공격 스킬을 얻고 나서 유명세를 떨친 곡이죠.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나는야 트레저 헌터!
그 순간 천마의 얼굴이 사정없이 굳었다. 하필, 불러야 할 노래라는 것이 그 정신 나간 녀석의 소음공해 노래라니?
-지이잉. 징징징. 지잉징징!
전주가 흐르자 노래방으로 꾸며진 던전 내부를 화려한 조명이 감싸기 시작했다.
노래방 화면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으아, 이 노래 정말 싫은데 말입니다.”
커다란 노래방 화면에는 락커 분장을 한 트레저 헌터, 민현기의 자아도취된 표정이 비치고 있었다.
“이 노래 아십니까?”
고은진의 물음에 천마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이 노래를 만들게 된 영감을 준 장본인이었으니까.
-띠리리링.
화면 속 공갈 기타를 치는 민현기의 모습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실패? 포기?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이곳을 나가고 싶다 해도, 저따위 것을 노래라고 부르고 싶진 않았다.
“안 하겠다.”
“잘 못 들었습니다.”
두 눈을 감은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좌는… 할 수 없다.”
“뭐야.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는 겁니까?”
“포기? 포기가 아니다.”
천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저딴 건 노래가 아니다. 다른 걸로 바꿔라!”
“뭐, 뭐라는 겁니까?”
“바꿔라!”
천마가 아랫배에 힘을 주고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어서 바.꾸.란.말.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탓인지 소리를 지른 천마의 아랫배에선 자연스레 내공이 발산되어 사자후에 가까운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우웅우웅우웅.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진동이 사방에 울려 퍼지더니, 갑자기 노래방 기계에서 팡파르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100점! 완벽한 성공입니다!
노래방 기계 화면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뭐냐.”
“와.”
스크린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계가… 시끄러워서 고장 났나 봅니다.”
“그런가.”
천만다행이군.
천마는 황급히 이 말을 삼켰다. 고금제일인이 내뱉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나약하고 초라해 보였으니까.
빰빠바바밤!
그때 웅장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던전 내부의 풍경이 또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마지막 관문을 100점으로 통과한 분을 위한 보너스 스테이지입니다! 바로바로, 댄스댄스 게임입니다!
크르르릉 소리와 함께 던전 바닥은 발바닥 표시가 반짝이는 발판이 깔렸고, 천장에는 화려한 사이키 조명이 요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던전 중심부가 게임장으로 바뀐 것이다.
-자, 그럼 보너스 스테이지를 시작합니다!
커다란 발판에는 어느새 발자국이 어지럽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에선 흥겨운 댄스음악이 퍼져 나왔다.
쿵짝쿵짝 쿵쿵쿵!
하지만 화면에는 여전히 발자국과 함께 락커 분장을 한 민현기가 물에 빠진 닭처럼 퍼덕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 화면은 안 바뀌는 건가.”
-자, 두 사람 모두 함께 발판에 올라와 주세요호!
눈 밑이 검어진 천마가 낮게 중얼거리자, 사회자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점수와는 관계없으니 편하게 즐겨 주세요호!
화면에서 쏟아지는 화살표와 발판에 찍힌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쿵짝쿵짝쿵짝!
점차 음악이 빨라지며 흐르자, 던전 내부는 후끈한 클럽처럼 열기가 달아올랐다.
“이건… 보법인가.”
무림에선 보법을 익히기 위해 청석판에 발자국을 새겨놓은 경우가 매우 흔하다.
과거 무림을 잠시 주유하던 천마 역시, 어느 이름 모를 산에서 정파 제일의 보법을 새긴 돌을 발견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진행 방식이 특이하군.”
천마는 대뜸 반짝이는 발자국을 밟았다.
그러자 ‘완벽해요!’라는 외침과 함께 화면과 발판이 반짝거렸다.
천마가 다시 한번 발을 움직이자 윙윙 하는 진동음과 함께 ‘완벽해요!’, ‘최고예요!’, ‘멋짐이 폭발하네요!’ 따위의 환호성이 연신 흘러나왔다.
“으음.”
처음엔 느릿하던 화면의 발자국들이 슬슬 빠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흥미를 느낀 천마가 재빨리 걸음을 옮기려 하자, 고은진이 천마와 마주 섰다.
“뭐냐.”
“오, 오해하지 마십쇼.”
그녀는 천마의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이거 2인용으로 설정된 댄스 게임입니다. 클리어하기 위해선 둘이서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럼 빨리 시작해 보지.”
천마가 다시 발자국을 밟으려 하자 고은진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 동시에 발판을 밟아야 합니다. 먼저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어째서냐.”
“그야… 이건 두 사람이 합을 맞춰 스텝을 밟아야 하는 거니 말입니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말입니까?”
화면에서 쏟아지는 발자국과 고은진의 움직임을 번갈아 바라보던 천마가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연구해 봐도 이 보법은 별로 쓸모있는 것 같지 않군.”
“쓸모라뇨.”
“이렇게 흐느적거려서야… 적의 공격을 모두 안면으로 받아낼 것 같다.”
“뭐라고요?”
고은진은 천마를 찬찬히 관찰했다.
몹시 곤란한 표정, 어색한 발놀림으로 화살표를 쫓는 천마를 보자 그토록 어리숙해 보일 수가 없었다.
“풉, 푸하!”
결국 고은진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다음 날.
내당의 문을 연 장채원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슴을 졸이며 걷던 그녀는 매장으로 들어가는 뒷문에 서자, 걸음을 멈추었다.
‘공생이냐 혹은 공사냐?’
김찬원의 말대로 공생 던전을 같이 클리어한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박 터지게 싸우고 최악의 상황으로 갈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던전에 들어간 걸로 두 사람이 변할 거란 생각은 안 드네…….’
최악의 경우, 고은진을 해고해야 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장채원, 그녀도 살아야 하니까.
꿀꺽.
마른침을 삼킨 장채원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벌컥 문을 열자마자 투닥거리는 천마와 고은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글쎄, 서류도 한번 정리해 봐야 한단 말입니다.”
“거절한다. 그건 본좌의 업무가 아니다.”
“그래도 해봐야 던전 재료에 대해서 좀 파악이 될 거 아닙니까?”
“필요 없다. 무명이 있잖나.”
어김없이 말다툼 레이스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아, 틀렸네.’
또다시 뱃속이 쓰려온다. 명치를 움켜쥔 장채원이 습관처럼 위장약을 집어 들 찰나.
‘응?’
이상하게 속이 쓰리지 않다.
그러고 보니 말다툼은 하지만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살벌하지 않다.
‘어라?’
자세히 보니 말다툼을 하고 있는 고은진의 표정이 이상하다.
어딘가 웃고 있는 것 같고, 말투도 왠지 모르게 부드럽게 느껴졌다.
‘뭔가 달라.’
물론 천마의 무뚝뚝한 말투는 똑같았지만… 왠지 다정한 단짝이 투닥거리는 것만 같다.
“아, 사장님 오셨어요?”
그때 장채원을 발견한 고은진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 미소는, 만개한 꽃처럼 아름답고 싱그러웠다.
‘은진 씨가… 이렇게 웃을 수도 있었구나.’
장채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고은진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걸.
그리고 천마에게 향한 시선도 경멸과 멸시가 아닌, 어느 정도 선임자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역시, 그렇게 된 거구나.’
장채원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는 엄청나게 강하다. 아마도 공생 던전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돌파했을 것이고, 그것을 본 고은진은 기가 죽은 것 같다.
실제로는 요리에 매우 진지한 모습을 보인 탓이었지만. 장채원이 그걸 알게 되는 건 조금 나중의 일.
‘뭐, 아무렴 어때. 저렇게 사이가 좋으면 나야 좋지, 뭐.’
장채원도 두 사람을 보며 환한 바다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안녕하세요, 은진 씨. 천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