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89화 (89/285)

제89화. 화해냐 다툼이냐, 공생 던전 (2)

공생 던전.

이곳은 메탈 K가 서식했던 카스텔라 던전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규칙 던전이다.

쿠웅.

던전에 들어서자 여느 던전과 다름없는 거대한 미궁 같은 내부가 보였다.

벽과 바닥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천장 곳곳에선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어두운 내부를 밝혀주고 있었다.

“보고하라.”

주위를 둘러보던 천마의 말에 고은진이 눈을 깜박였다.

“뭘 말입니까?”

“아니다.”

던전에 들어서면 늘 쓸데없는 설명이나 길 안내를 했던 무명.

고은진과 함께 말없이 던전을 걷자, 그제야 무명이 없다는 걸 실감했다.

쿠웅.

그때 어디선가 낮은 진동음이 들렸다.

꽤나 멀리서 들려온 듯했으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가슴 한편이 무거워졌다.

‘심령을 파고드는 소리라.’

통로를 걷는 천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금 전 파고들었던 낮은 진동음은 섭혼마음(攝魂魔音)과 비슷한, 마음을 뒤흔드는 음파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게 뭡니까?”

앞서 걸어가던 고은진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눈앞엔 거대한 문이 있었는데, 그곳엔 천마의 형태와 아주 비슷한 까만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쪽 모습을 까맣게 칠해놓은 것 같습니다만.”

“흠.”

자신의 형태를 꾹 찍어놓은 듯한 까만 그림자.

까맣게 물든 그림자의 형태를 바라볼수록 천마는 영혼이 빨려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밌겠군.”

쿠웅.

천마는 힘껏 문을 열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새하얀 빛이 천마의 시야를 가려 버렸다.

“이게 뭡니까?”

고은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천마는 다시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마는 바닥이 푹 꺼진 곳에 우뚝 서 있었고, 고은진은 자신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뚝 선 채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음?”

고갤 돌리려던 천마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몸을 움직이려 해도 나무토막이 된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그쪽 욕망입니까?”

고은진의 외침에 천마는 주변을 살폈다.

정방형의 넓은 내부 바닥은 커다란 바둑판마냥 줄이 그어져 있었고, 눈앞에는 커다란 석 상 세 개가 세워져 있었다.

“허…….”

세 개의 석상을 바라보던 천마가 눈을 크게 뜨자 다시 고은진이 중얼거렸다.

“이거 대체 뭡니까? 아무리 봐도 장기 같은데.”

어느새 고은진의 앞에는 네모난 장기판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천마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숨겨진 본좌의 욕망이었나.’

무림엔 도저히 적수가 없는 천마.

물론 정천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나타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천마의 손에 ‘맞아 죽지 않고 훗날을 기약할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때문에 천마의 마음속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은 목마름이 있었다. 피와 살이 튀는 치열한 승부 말이다.

천마는 결국, 자신의 연공장에 커다란 장기판을 그려두고 가상의 강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의 공력을 서푼 정도 능가하는 천패왕(天霸王).

자신의 심령을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는 섭심술의 대가, 희월랑(姬月娘).

자신의 움직임보다 한 치 정도 앞서는 극섬영(克閃影).

물론 고금제일의 경지에 도달해 있기에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천마는 자신의 능력을 아주 조금 앞선 정도의 가상의 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가상의 적들을 연공장에 때때로 불러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건 본좌가 만든 장기다.”

천마의 대답에 고은진이 앞에 놓인 네모난 판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습니까?”

나무를 켜서 만든 듯한 판 위엔 천마를 꼭 닮은 인형과 세 개의 석상을 닮은 인형이 올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쪽 욕망은 장기를 두는 거였군요?”

“단순한 장기가 아니다.”

“그렇습니까. 근데 왜 이게 안 움직입니까?”

고은진은 판 위에 올려진 인형들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땅에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 본좌가 만든 허상혼전(虛像混戰)이다. 장기와 논검(論劍:말로 무예를 겨룸)을 결합해 놓은 것이지.”

“그게 뭡니까?”

그그그긍.

그때 맨 앞에 서 있던 우락부락한 석상, 천패왕이 천마의 앞으로 한 칸 다가왔다.

동시에 두 주먹을 상단과 하단에 나눠 뻗었다.

“그렇군. 본좌 역시 장기판의 말이 된 건가.”

상황을 파악한 천마가 고은진을 향해 크게 외쳤다.

“천패왕이 사용한 초식은 극천문의 화풍파옥(和風破玉)이다. 본좌의 인형을 간방(艮方:북동쪽)으로 한 걸음 옮기고, 극천용화수(極天鎔化手)라고 외쳐라.”

“잘 못 들었습니다!”

“간방으로 일보, 극천용화…….”

퍼억.

천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천패왕이 천마의 가슴과 아랫배에 두 주먹을 쑤셔 박았기 때문이다.

“크으.”

천마의 입에선 낮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천패왕이 뻗어낸 일격은 천마의 금강지체를 일순간 깨뜨릴 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그그그긍.

이때 멀리 서 있던 극섬영이 어느새 천마의 앞으로 다가와 팔을 뻗었다.

“진방(震方:동쪽)으로 이 보, 취사멸도(取捨滅度)다!”

“진, 진방으로 이 보. 취사… 잘 못 들었슴다?”

“취사멸…….”

천마의 말은 또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번개처럼 다가온 극섬영의 수도가 천마의 명치에 쑤셔 박혔기 때문이다.

“크으으.”

명치 부근의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퍼져나가자, 천마는 버럭 소리쳤다.

“멍청한 것, 불러주는 초식의 이름도 기억 못 한단 말이냐!”

“초식인지 육식인지 내가 어찌 압니까? 그리고 발음이 왜 하나같이 그 따굽니까?”

그그그긍.

이번엔 멀리 서 있던 희월랑이 아름다운 춤을 추며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심혼을 빼앗는 마후의 섭혼마술, 극락사향섭혼무(極樂死香攝魂舞)였다.

“요괴! 빨리 십교무상행(十敎無上行)이라고 외쳐라!”

“십교무삼행?”

이번엔 발음이 틀렸다.

그 덕택에 춤을 추며 다가온 희월랑이 어느새 천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대었다.

지이이잉.

희월랑의 눈에서 싯누런 빛이 흘러나와 천마의 안구에 쏟아졌다.

삼혼칠백이 녹아버리는 듯한 고통에 천마는 전에 없던 울화통과 분노가 솟구쳤다.

“네놈의 머리는 밥통인가!”

“그쪽 말이 너무 빠릅니다! 그리고 발음도 좀 똑바로 하십쇼!”

그르르르릉.

그 사이 천패왕의 일권과 극섬영의 수도가 천마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건방으로 삼 보, 마각천풍(魔脚天風) 현빙삼화(玄氷三火)… 커억!”

하지만 또 늦어버렸다.

결국 매섭게 날아온 공격을 모두 안면으로 받아낸 천마의 입에선, 장채원이 즐겨 말하던 비속어가 절로 튀어나왔다.

“네놈은 정녕 귓구녕에 소세지를 박은 것이냐!”

“뭐 소세지? 말 다 했습니까?”

분노에 찬 천마의 외침에 고은진도 버럭 소리쳤다.

“아까부터 발음이 문제였습니다! 어려우니 또박또박 말하십쇼!”

“귓구녕을 활짝 열고 들어라, 요괴!”

연달아 다시 방위와 초식의 이름을 외치는 천마의 눈동자에서 혈염광휘가 쏟아졌다.

299초.

한마디로 299번을 얻어맞은 끝에, 장기 말이 된 천마는 마침내 세 명의 석상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크흐.”

웅크렸던 몸을 일으킨 천마의 얼굴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한 대만 맞아도 금강지체가 깨질 만한 위력의 공격을 이백구십구 번이나 얻어맞았으니, 몸이 성할 리 없다.

쿠우웅.

석상이 무너지자 굳었던 천마의 몸이 움직이더니, 바둑판처럼 생겼던 내부가 다시 평범한 던전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괜찮습니까?”

멀리 서 있던 고은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뭐 이런 이상한 게임을 만들고 그러십니까.”

“뭐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괴상한 장기 게임을 내가 만들었습니까? 그쪽 욕망이잖습니까?”

이빨을 으드득 깨문 천마는 말없이 걸어 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흐흐.”

말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쭉 걸어가던 천마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엔 아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천마가 아닌 고은진의 형태와 꼭 닮은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네놈이 분명 그랬지. 이 던전은 서로의 욕망으로 함정을 만든다고.”

“잠깐만, 설마…….”

“재밌겠군. 다음 함정을 기대해 보지.”

“잠깐! 내가 일부러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안색이 변한 고은진이 외쳤지만 천마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문을 벌컥 열었다.

순간 고은진의 눈앞에 새하얀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부터 제1회, 전국 맛짱 요리사 선발대회. 본선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자 고은진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수십 개의 카메라와 방청석이 사람들로 꽉꽉 채워져 있는 커다란 스튜디오의 풍경이 보였다.

“요리 대회?”

고은진은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던전 내부는 요리 대회 현장으로 바뀌었고, 고은진은 요리복을 입은 채 요리 경연 대회에 참가한 참가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심사관은… 무림에서 독보무적을 구가하는 천마 님을 모셨습니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치켜든 손을 따라가 본 고은진은 입을 벌렸다.

무대 위 단상에는 천마가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임몬이… 심사관?”

요리 대회 심사관이 저 괴팍한 인족이라니? 이건 주최 측의 농간이잖아? 고은진이 놀랄 새도 없이 사회자의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자! 이제부터 자신 있는 요리를 해주세요. 스타트!

멍하니 서 있던 고은진은 자신도 모르게 재료가 쌓여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저 선임몬은 분명 시비만 걸 텐데.’

사실 고은진이 맛있게 할 수 있는 요리라곤, 도노반으로 만든 꼬치구이뿐이었다.

‘가만, 여기 재료들은?’

다양하고 신선한 재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본 그녀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두 말 나오지 않게 우승을 해주겠습니다!”

재료대에는 대형 마트에서도 보기 힘든 여러 가지 고가의 재료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고은진은 바구니에 재료를 가득 담고 조리대로 돌아와 빠르게 요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만든 건 채소 수프와 송아지 고기로 만든 찜이었다.

‘선임몬 주제에 이런 음식이나 먹어봤겠습니까.’

요리를 마친 고은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고은진은 천마가 있는 단상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호박과 당근 등 다양한 채소를 넣은 수프와 과일을 올린 송아지 스테이크입니다.”

천마는 고은진이 차려놓은 음식을 오물오물 먹더니 고개를 저었다.

“평범하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요리라고 부를 것도 없다.”

-아, 아쉽습니다. 고은진 참가자 탈락!

“맛있게 먹어두고 딴소리십니까?”

고은진의 외침에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본좌는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시궁창에 담긴 고기라 할지라도.”

“뭐어?”

“요리사라면 요리사다운 요리를 보여라. 이런 건 동네 꼬마도 만들 수 있는 요리다.”

“이, 이 망할 선임몬…….”

선홍빛 잇몸을 훤히 드러낸 고은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거기서 딱 기다리십쇼!”

몇 시간 후.

-자, 이제부터 제23회, 전국 맛짱 요리사 선발대회. 본선을 시작하겠습니다!

고은진은 이를 악물고 요리를 만들었다.

요리 지옥.

이곳은 요리 지옥이었다. 아무리 혼신을 다해 만들어도, 천마의 평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별로다.”

“평범한 맛이군.”

“네놈이 요리사라면 좀 더 생각하고 만들어라.”

매번 혹평이 나올 때마다 고은진의 등 뒤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차라리 천마처럼 몇 대 얻어터지는 것이 나은 편이다.

이렇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정성까지 넣어야 하는 요리를 하염없이 하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두고 보십쇼!”

또다시 몇 시간 후.

-자, 이제부터 제36회, 전국 맛짱 요리사 선발대회. 본선을 시작하겠습니다!

“답이 없군.”

천마는 씹고 있던 게살튀김을 퉤 뱉으며 손을 저었다.

“실격이다.”

“이 망할…….”

천마가 메인요리 접시를 발로 밀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고급 재료란 재료는 다 넣어서 요리했는데!”

벌써 서른여섯 번째였다.

무슨 요리를 하든 천마는 혹평을 할 것이 뻔했다. 애당초 뭘 만들던 실격은 정해진 상태다.

“복수를 하려면 하십쇼! 차라리 날 한 대 치란 말입니다!”

머리에 쓴 조리 모자를 패대기친 고은진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내 요리를 모독하지 마십쇼! 알겠습니까?”

“모독?”

“그래! 아까 복수하려고 내 요리를 일부러 무시하는 거잖습니까!”

냅킨으로 입을 닦은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한심하군.”

“뭐?”

“본좌가 고작 하찮은 요괴 따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음식을 모독한다고?”

천마는 차갑게 식은 고은진의 요리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곳은 요리 경연장이고 본좌는 심사관이다. 본좌는 그저 공정하게, 또 냉철하게 요리를 심사했을 뿐이다.”

“웃기지 마십쇼. 선임몬 당신은…….”

“네놈은 요리산가, 아니면 기술자인가.”

“무슨 헛소리십니까?”

“처음부터 네놈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요리를 하더군. 뭐, 거기까지면 괜찮다.”

천마는 경멸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고은진을 내려다보았다.

“네놈이 음식을 만드는 건 요리 기술을 뽐내기 위해서냐, 아니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냐?”

“무슨 말입니까, 그게.”

“동네 객잔의 작장면 한 그릇에도 주방장의 혼이 담겨 있다. 맛있게 먹을 손님을 떠올리며 요리를 하지. 하지만 네가 만든 음식을 봐라.”

천마의 호통에 고은진은 입을 벌렸다.

그렇다. 그녀는 요리 대회라는 허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맛있는 요리가 아닌, 고급스럽고 보기 드문 요리만을 줄곧 고집했다.

-선임몬 주제에 이런 거나 먹어봤겠습니까?

무시, 교만, 자만심…. 이것이 요리를 했던 고은진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천마를 만족시킬 수 있는 요리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음식은 육체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자, 생명을 이어주는 고귀한 것이다.”

“뭐?”

“그리고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를 고려해야 하지.”

전혀 반박할 수 없는, 이치에 합당하고 옳은 말이다.

천마는 그 누구보다 곤궁한 삶을 살아왔다. 때문에 음식에 대해선 어떤 요리사보다도 진지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고은진은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기, 기다리십쇼. 한 번만 기회를 주면…….”

“더 가져올 필요도 없다, 요괴.”

고은진의 말을 자른 천마의 음성엔 지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네놈의 썩어빠진 요리를 먹어줄 비위 따윈 없으니.”

더 없이 모욕적인 말이다. 평소의 고은진이라면 삼수갑산을 보더라도 천마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천마의 말에 고은진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

요리에 대해 거만했고 방자했던 건 자신이었다. 천마는 진심으로 자신의 요리를 먹었으며, 정직한 평가를 해주었던 것이다.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만들 기회를 주십쇼.”

“거절한다.”

“부탁입니다!”

고은진은 아예 엎드릴 듯 고개를 숙였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쇼. 두 번 다신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환진일족인 그녀가 두 손을 맞잡은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흠.”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요리사의 자부심과 긍지. 그것 하나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좋다. 대신…….”

천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딱 한 입만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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